서울 삼성동 소재 호텔 로비에서 만난 황승진 미국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지난달 말 성균관대와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에서 개설한 `방송통신 최고경영자 과정` 강의를 마치고 일본을 들렀다 다시 한국을 찍고 돌아가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기술경영의 대가답게 최근 관심사는 에디슨에서 애플로 이어지는 기술시장의 변화다. 황 교수가 20년 넘게 몸담고 있는 스탠퍼드대는 실리콘밸리를 탄생시킨 비전(vision)의 원산지다. 그 역시 `실리콘밸리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교수`로 불리는데, 실제 구글 애플 등 세계적인 IT 기업의 경영진 중에는 제자가 수두룩하다고 설명한다. 황 교수가 얘기하는 실리콘밸리의 `4대 투자 트렌드`와 세계 기술시장 전망, 한국 기업들에 대한 조언에 귀를 기울여보자.
실리콘밸리의 부활…비결은 `절실함`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실리콘밸리에 대한 투자가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세계 금융위기는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지만 엄밀히 말하면 실리콘밸리나 벤처기업에 대한 존재 위협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의 닷컴(.com) 버블 붕괴야말로 정말 큰 사건이었는데, 그 후 투자는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창업의 중심지로서 정말 특별한 곳이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러시아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가 모두 흉내 내려고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모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실리콘밸리가 미국의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거의 유일한 장소라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미국 유럽 일본을 보면서 헬스케어든 항공산업이든 최소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고 있다. 하지만 세계 산업의 리더 격인 미국은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처방을 얻을 곳이 실리콘밸리밖에 없다. 그러한 `절실함`이 실리콘밸리를 펄떡이게 하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실리콘밸리의 구체적인 특장점은 무엇인가.
▶실리콘밸리에는 몇 가지 독특한 비즈니스 스타일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아웃소싱`이다. 기업 조직이 가볍다는 것이다. 일례로 삼성이나 미쓰비시 같은 대기업은 수많은 사업을 거느린 무거운 조직이다. 공급체인을 가볍고 짧게 잡기 때문에 조직이 민첩하고 유연성 있게 움직일 수 있다. 며칠 전 일본을 방문했더니 미쓰비시에서는 연필사업부를 파느냐 마느냐 하고 있더라. 이 거대 기업은 흑연광산까지 거느리고 있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대기업 구조는 앞으로 불리하다는 얘긴가.
▶단순히 규모를 두고 어떤 모델이 좋다, 나쁘다를 단언하긴 힘들다. 우선 대기업들은 잘나갈 때야 모든 것이 좋지만 관료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한다거나 기업 자체가 흔들릴 경우 지역적 위기로까지 번질 수 있다. 좋은 예가 미국 보스턴 루트128 산업단지다. 1960년대 보스턴 산업단지의 하이테크 기업 규모는 실리콘밸리의 두 배였지만 지금은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친다. 보스턴은 DEC나 델 등 큰 회사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특정 기업을 중심으로 한 `허브 구조(스타 구조)`보다는 `네트워크 구조`로 연결돼 있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오히려 대기업 구조가 경영만 제대로 한다면 위기를 컨트롤하기 유리할 수 있다. 대기업이 관련 산업이나 기업들을 위기에서 붙잡아주는 `앵커(닻)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거대하고 위대한 회사라도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기업 순위는 10년마다 바뀔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개별 기업을 떠나 `영속성` 측면에서는 실리콘밸리의 네트워크 구조가 더 유리하다.
`기술의 리듬`을 찾아야 성공한다…4대 투자 트렌드는 -실리콘밸리 하면 반도체가 떠오른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어떤 업종이 뜨고 있나.
▶(웃음)지난해 3분기 말 기준으로 실리콘밸리에서 반도체에 대한 투자는 5.2%에 그친다. 투자란 것이 유행을 타긴 하지만 실리콘밸리와 반도체 사이의 연관성은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 대신 소프트웨어(20.8%)나 바이오테크놀로지(19.6%), 의료기구ㆍ감시프로그램(11.9%) 산업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는 추세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은 "우리는 패턴인식(Pattern Recognition)산업에 종사한다"고 하는데 투자 대상을 고를 때 수치보다는 과거의 경험이나 패턴을 비교하면서 결정한다는 의미다.
-최근엔 어떤 패턴이나 트렌드가 부상하고 있는지 소개한다면. 또 그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투자 트렌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클라우드 컴퓨팅 △녹색기술 △데이터분석 등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SNS는 잘 알다시피 트위터, 페이스북, 싸이월드, 링크드인(Linkedln) 등이 있는데 크게 팩트만 다루되 작성자가 여럿인 위키(Wiki)와 의견(opinion)도 다루되 개별 작성자들이 활동하는 블로그로 나뉠 수 있다. 녹색기술은 `민간기업에 의한 공공재` 개념과 맥을 함께하는데 크게 이익과 사람, 지구(환경)라는 세 가지가 핵심 요소다. 구체적으로는 신재생에너지와 탄소 배출 절감, 폐기물 처리, 자연자원 보호 기술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왜 이런 트렌드가 형성됐는지` 묻는다면 "랜덤하게 유행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흥미로운 점은 여러 가지 기술이 꾸준히 예측된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하루아침에 유행이 바뀐다는 것이다. 일종의 `병목(bottle neck) 현상`이다.
일례로 게임산업을 보면 콘텐츠도 필요하지만 조이스틱 같은 기기,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도 발달해야 성공할 수 있다. 콘텐츠가 아무리 좋아도 네트워크 스피드가 못 따라가면 곤란하다. 지금 업계에서 작동하는 여러 가지 기술의 리듬을 맞춰야 한다.
클라우드 컴퓨팅이나 데이터 분석의 경우 지금까지 인터넷을 통해 거래만 하다가 이제는 이를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해지면서 각광받고 있다. 월마트가 자신들의 거래를 분석하려는데 1년치 데이터를 로드하는 데만 1년 걸린다는 소리가 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분석하려면 수만 개 컴퓨터가 함께 움직이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미래엔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이러한 트렌드가 핫(hot)하지만 자꾸만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할 것이다.
-한국은 세계적인 IT 강국이지만 소프트웨어나 서비스 분야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한국 IT 기업들을 어떻게 평가하나.
▶IT에도 비즈니스에 강한 IT와 소비재에 강한 IT가 있다. 그런데 한국의 IT는 주로 냉장고, 에어컨 등 소비가전 쪽이다. IT가 비즈니스에 이용되면 새로운 가치를 더한 부산물이 나온다. 시스코 라우터나 정보관리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이 좋은 예다.
하지만 TV나 게임기 같은 상품은 고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것으로 끝이다. 한국 기업 중에서 비즈니스 생산성에 기여한 곳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물론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다. 삼성이나 하이닉스는 정말 뛰어나다. 하지만 대부분 메모리반도체이고 시스템반도체는 약하다. 반면 대만은 시스템반도체 강국이다. 신추 사이언스파크를 중심으로 TSMC, UMC 등 세계 1위 파운드리 기반이 갖춰져 있고 유력 위탁제조서비스(EMS) 기업 등 시스템반도체 산업 발전 인프라스트럭처가 탄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