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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22) 김백겸 - 칼리(Kali) 여신에게

ngo2002 2012. 7. 5. 10:04

[내 인생 마지막 편지](22) 김백겸 - 칼리(Kali) 여신에게

등불이 켜지기 전에도 존재했고 등불이 꺼진 후에도 살아있는 당신. 당신의 사랑과 관심으로 시작된 내 인생의 그림풍경을 전합니다. 딸 넷을 낳고 절망한 어머니가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리고 새벽에 백일기도를 해서 낳은 외아들을 기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동네 무당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 예언해서 어머니의 자부심과 환상이 마당의 키 큰 가죽나무처럼 무성했지요. 나는 대전시 대흥동에 있는 충남도지사 관사의 후문 뒷골목에서 이웃인 도지사의 권력을 동경하며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네모 눈금이 그어진 신체 측정판을 배경으로 알몸으로 찍은 내 사진이 있습니다. 가늘고 약한 사지와 머리만 큰 소년이 겁먹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수업 중에 설사를 해서 바지와 하체를 버리고 울고 있는 나. 학교 안 우물의 물을 길어 내 몸을 씻긴 담임선생님의 희고 긴 손가락. 생애 최초의 인텔리여자인 선생님을 여신처럼 생각했던 나의 치욕과 부끄러움. 지금은 선생님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로 여자를 볼 때는 손이 아름다운가를 먼저 보았지요.

등불이 켜지기 전에도 존재했고 등불이 꺼진 후에도 살아있는 당신. 당신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짙은 우울과 몽상 속에서 팝과 아리아의 여가수 목소리로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화집에서 본 보티첼리의 비너스나 모딜리아니의 잔처럼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을 적어보는 낙서들이 조금씩 시의 형태로 드러났지요. 대학 시절의 죽을 것 같은 첫사랑의 경험, 신춘문예로 시인의 관사를 머리에 얹은 일, 현실의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인생 역정이 모두 당신의 변신 이야기임을 나중에야 알았지요.

자본사회의 현실은 무서운 꿈이었습니다. 친구들의 승진 소식. 새 차를 사고 아파트 평수를 넓혀 간 주위 사람들. 사람의 가치를 행동이 아닌 돈으로 평가하는 경쟁사회는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는 일마저 비용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노후가 불안했던 나는 아내와 막 열풍이 불었던 컴퓨터 학원을 시작했고, 타이밍이 어긋난 사업은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투자금이 모두 휴지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현실이라는 꿈속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한 나를 죽지 않을 만큼만 경고를 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꿈의 배우인 시인으로 살도록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였지요.

등불이 켜지기 전에도 존재했고 등불이 꺼진 후에도 살아있는 당신. 내가 현실의 개미지옥에 빠져 영혼이 녹아내리고 있는 40대 중반, 당신의 현몽한 꿈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꿈속에서 당신은 화형대에 얹힌 마녀였습니다. 두렵게도 당신은 마녀의 모습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나 나는 마녀를 비난하는 재판관들의 권력이 무서워 그 자리를 회피했습니다. 불길에 타 죽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던 당신의 눈과 비명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화형장을 떠나 교회의 장례식에 갔는데 경쟁관계의 직장 친구가 가면을 쓰고 입장하라고 했습니다. 꿈속에서도 가면을 쓰고 바라보는 관의 주인공이 ‘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을 깬 그날 새벽에 양심의 가책으로 나는 울었고 꿈의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주인공처럼 나는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사람들이 가지 않아 수풀이 무성한 좁은 길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불현듯 정신이 든 그 자리에서 다시 되돌아가야 할 먼 길을 쳐다보니 내 나이 벌써 오십이었습니다. 나는 서가 구석의 돈 되지 않는 시 원고를 10년 만에 다시 꺼내고 체념한 인생의 와신상담으로 맹렬히 시를 쓰고 발표를 했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미로를 쥐처럼 기어가는 내 영혼을 독수리의 눈으로 찾아내서 당신의 치마 아래로 가두었습니다.

등불이 켜지기 전에도 존재했고 등불이 꺼진 후에도 살아있는 당신. 나는 당신이 내 영혼의 연인임을 이제는 압니다. 내 목숨이 다하는 날, 묘비명에 적힌 시인의 일생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 상관없는 순간이 오겠지요. 내 영혼은 이승의 시간을 내려놓고 강 건너 어두운 숲에 있는 당신의 궁전으로 흰 새처럼 날아가겠지요. 당신은 내 일생이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한 로미오의 꿈이었음을 이미 알고 있겠지요.

<김백겸 | 시인>

입력 : 2012-07-04 21:29:03수정 : 2012-07-04 2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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