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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23) 정끝별 - ‘내 처음 아이’에게

ngo2002 2012. 7. 6. 10:17

[내 인생 마지막 편지](23) 정끝별 - ‘내 처음 아이’에게

서울 다녀오신 아버지가 사다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넌 일곱 살이야. 검정 반달 구두에 흰 양말을 신고 한껏 멋을 내고 있지만 까무잡잡한 얼굴에 가느다랗게 치켜뜬 눈은 영락없는 시골 아이야. 넌 어젯밤에도 내내 내 병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어. 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아침에 간호사에게 부탁했어. 저녁 식사 후 먹는 약에 수면제를 늘려달라고, 푹 자고 싶다고. 이 세상이 저편으로 걷잡을 수 없이 미끄러지고 있어. 그 저편에서 너는 ‘엄청나게 행복하게 믿을 수 없게 가깝게’ 달려오곤 해. 그럴 때면 간호사는 이렇게 말해, “할머니, 또 예쁜 일곱 살 됐네”.

내 안엔 내가 너무 많았고 너무 많은 나로 내 안은 늘 아우성이었지만, 일곱 살의 너는 내 안의 저편에서 슬픔의 싹처럼 자라곤 했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작은 아이였고 내 어린 영혼의 짐을 지고 왔던 어린 너였기에 나는 늘 네 편에 서는 게 시인에 속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존엄에 속하는 일이라 생각했어. 네가 나를 부끄러워할까봐 불안해했고 너와 내가 서로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웠어. 그런 너와 이제 어떻게 작별을 해야 할까?

검은 땡땡이 한복에 양산을 든 엄마의 손을 잡고 나들이 가는 너, 너는 엄마의 코티분 냄새를 좋아했어. 사거리에서 엄마 손을 놓치고 미아가 된 너, 엄마보다 먼저 들이닥친 어둠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던 문간마루의 너… 그래, 스무 살 무렵이었어. 대학 도서관 책상 모서리에 서 있는 너를 처음 본 게. 겁먹은 눈빛이었어. 그때 나는 처음 시를 썼어. 그리고 고개를 떨군 채 눈을 내리뜨곤 했던 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 사람이었기에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는지도 몰라. 서른일곱이 되었을 때 일곱 살 된 딸애에게서 너를 보기도 했어. 일곱 살의 너를 다시 사는 것만 같았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며 열패감에 악악거릴 때 “지나가고 지나간다”며 웅크린 내 등을 토닥여주던 네 작은 손바닥. 두 번의 유산 후 대낮의 빈방에 누워 있을 때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찬 항아리다”라는 문장을 적어주던 네 손톱. 남편에게 닥친 시련들 앞에서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라며 그 상처를 어루만지게 했던 네 손길. 그 작은 손이 없었다면 내 삶은 얼마나 삭막했을까. 엄마를 기다리다 소파에 잠든 딸애의 맘이 되어 “여섯 살짜리 딸애 칫솔과 내 칫솔이/ 뭉개진 털을 싸쥐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며 속삭여주던 네 목소리를 기억해. 세상 끝 될 것들에 다가가기 위해 내 스스로를 울력하며 느리고 늦되게 내던졌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 하는 출사표에서부터, 미처 다 펼칠 수 없었던 때늦은 때아닌 사랑들을 향해 “불선여정(不宣餘情) 불선여정 하였습니다”라는 미안한 고백 또한 네 말이었던 걸 알아.

매일이 어제이고 어제가 내일인 날들 속에서, 네가 내게 와주는 날들이 있었기에 더 설레고 따뜻했었어. 너에게 가까이 가려는 날들이 있었기에 덜 미워하고 덜 죄짓고 살 수 있었어. 네가 내게 올 때마다, 매일이 또 어제인 날들을 견뎌내는 내 슬픔의 부름켜가 깊어지곤 했어. 첩첩의 물가와도 같이, 첩첩의 주름과도 같이. 그러니 너를 기다리는 순간이 내 생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네가 들렀다 가는 잠시의 그 순간이 내가 가장 맑은 숨을 쉬는 순간이었어. 그때마다 너는 저편에서 도착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이편을 떠나가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또 언제였을까. 저편의 너를 맞이하면서 실은 너와 작별하는 법을 익혔던 셈이었어. 첩첩한 나의 외딴 구석에서, 너와 있을 때면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먼 시간의 저편으로.

처졌던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웃고 있는 건 너인가 나인가. “생각해보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제 몸 밖에 빗장을 걸어 잠근/ 내 처음 아이/ 늘 늑골 속에서 울고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도 그렇게 울었으리라”(‘내 처음 아이’). 네 작은 손이 깃털처럼 가볍게 내 손에 닿는다. 우리 두 손을 맞잡아줄 것만 같은 익숙한 손의 악력이 느껴져. 더없이 크고 따뜻하고 두툼했던 아버지의 손이야! 이제 네 손을 잡고, 아버지 손을 잡고, 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따라가는 것, 그것!

<정끝별 | 시인>


 

입력 : 2012-07-05 21:17:11수정 : 2012-07-06 01:2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