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정승일칼럼]재벌개혁의 이상과 현실

ngo2002 2012. 2. 8. 11:19

정승일칼럼]재벌개혁의 이상과 현실

줄리아 로버츠가 인기를 얻은 영화 <프리티 우먼>에는 1980년대 후반의 미국에서 선량한 기업을 조각조각 해체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나쁜 자본가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기업사냥꾼인 리처드 기어인데, 실제 모델은 칼 아이칸이라는 유명한 기업사냥꾼이다. 지금도 미국에는 칼 아이칸같이 기업사냥 즉 적대적 M&A 위협을 전문적으로 일삼으며 떼돈을 버는 사모펀드 운영자들이 많다. 현재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역시 비슷한 사모펀드 운영으로 억만장자가 된 자이며, 그는 여전히 월가의 금융자본과 주주자본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월가 점령’ 운동을 비웃고 있다.

칼 아이칸은 2006년 초 우리나라의 KT&G(담배인삼공사)에 대해서도 적대적 M&A 위협을 가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재벌과 공기업의 비효율적인 기업지배구조 때문에 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주류경제학적 견해가 지배적이 되면서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시행됐다. 그 과정에서 이상적 모델로 간주된 것은 지배주주가 없도록 주식소유가 완전 분산되고 집중투표제와 사외이사제 등을 통해 소액주주의 권리 및 이익 관철이 용이한 주주자본주의적 기업지배구조였다. 과거 국영기업이던 KT&G와 KT(한국통신) 역시 민영화 과정에서 지배주주가 없도록, 그리하여 적대적 M&A 위협에 취약한 형태로 지배구조가 설계됐다.

소액주주의 이익이 완벽하게 관철되는 민영화가 완료된 2002년과 2003년에 KT와 KT&G는 경제민주화를 이끌던 시민단체들로부터 ‘최우수 기업지배구조상’을 연이어 받았다. 당시 시민단체를 대표하여 그 상을 수여한 강철규 교수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공정거래위원장이 되어 재벌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KT와 KT&G와 같은 민영화 공기업들이야말로 재벌개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람직한 모델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KT&G에 대한 칼 아이칸의 적대적 M&A 위협에 대해서도 “적대적 M&A 과정의 공격과 방어과정에서 투명성이 높아지고 지배구조가 개선될 것”이라며 기업사냥꾼의 투기적 이익추구를 옹호했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온 김우찬, 김진방, 김상조 교수 등 역시 KT와 KT&G야말로 이상적인 기업지배구조 모델이라고 말했다. 즉 재벌해체를 통해 계열사들을 독립기업화하고 그 독립 대기업들에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지배주주도 존재하지 않도록 하며, 그리하여 소액주주와 기업사냥펀드가 ‘투자자 이익 극대화’를 위해 마음껏 자신들의 권리와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상태를 이들은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들 진보적 경제민주화론자들은 소버린의 SK그룹 공격에 대해서도 소버린을 편들었다.

실제 오늘날 KT와 KT&G, 포스코 같은 민영화 대기업들은 ‘투자자 이익 극대화’ 경영의 선봉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무자비한 투자자 이익 극대화는 노동권 약화를 초래했다. 예컨대 KT의 주주자본주의형 민영화 과정에서 불과 수년 만에 6만명의 정규직 종업원이 3만명으로 줄었고 그렇게 해고된 노동자들은 외주노동자와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 KT는 지금도 무자비한 노동권 파괴로 유명하며 더구나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등 장기투자에도 인색하다. 또한 2G서비스 고객 등 고객 보호에는 소홀한 채 주주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투자자 이익 보호에는 선두를 달린다. 주식투자자 이익 보호에 자칫 소홀해 주가가 하락할 경우 아이칸 같은 기업사냥 펀드의 경영권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재벌 후계자 빵집 논란으로 경제민주화가 한국 사회의 주요 과제로 다시 등장하면서 강철규 교수가 민주통합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이 됐다. 그는 ‘경제의 가치와 사람의 가치가 충돌할 경우 어떤 선택을 할지’를 총선 후보자에게 묻겠다며 경제보다 인권을 더 중시하겠다 약속하고 있다. 경제민주화특위를 이끄는 다른 이들 역시 재벌개혁과 함께 노동권의 신장과 비정규직 해결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현재 민주통합당이 발표하는 재벌개혁안은 10년 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즉 집중투표제와 증권집단소송제, 출자총액제한 강화 등을 통한 소액주주권 강화와 적대적 기업사냥 활성화가 그 목표이다. 국제석학들은 이를 주주자본주의라고 지칭한다. 재벌개혁을 주도하는 인물들 역시 10년 전과 똑같다. 그리고 강철규 교수 등이 자신들의 주주자본주의에 대해 사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여전히 꿈꾸는 재벌개혁의 이상향은 삼성과 현대차, 롯데 등의 재벌그룹을 완전 해체 또는 부분 해체시키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KT와 KT&G와 같이 단기투자자 수익 극대화, 즉 국내외 주식펀드들의 낙원으로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99%의 인권과 노동권을 위한 길인가?

<정승일|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



입력 : 2012-02-07 21:20:15수정 : 2012-02-07 21: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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