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현실성, 가능성, 잠재성
인간이 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하나는 자신에게 드러난 현실을 그대로 지각할 뿐만 아니라 현실이 아닌(일종의 ‘무’인) 차원을 머릿속에서 생각한다는 점인 듯하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성만이 아니라 가능성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들이기도 하다(‘양상론’이라 불린다). 현대 철학이 전개되면서 ‘가능성(possibility)’과 ‘잠재성(virtuality)’을 구분할 필요가 생겨났다.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상적 용법에서는 그다지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는다. “저 아이는 큰 잠재성이 있어”와 “저 아이는 큰 가능성이 있어”는 거의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적 맥락에서는 두 개념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가능성’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매우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상황도 상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능’하다. 그러니까 “~수도 있다”고 말하게 되는 모든 것이다. 그러나 잠재성은 ‘현실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상적인 것도 아닌 것, 즉 어디까지나 ‘실재적인’ 것이지만 현실적인 것은 아닌 것을 가리킨다. 한 아이의 어른이 된 상태는 아직 현실성이 아니지만, 결코 비-실재적인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잠재태’(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뒤나미스’)로서 그 아이에게 들어 있다. 그래서 가능한 것은 단지 상상적인 것이지만, 잠재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실재적인 것이다.
바둑의 예를 보자. 이창호와 이세돌이 바둑을 두고 있다. 50수까지 두었다.(‘수’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반상의 검은 돌 25개와 하얀 돌 25개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창호와 이세돌은 지금 현전하는 25수씩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감각적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서는 보이는 그 어떤 수들을 부지런히 읽고 있다. 그 수는 객관적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은 환영을 보고 있다 해야 하리라. 또, 그 수들이 엄존하지 않는다면 바둑을 잘 두는 사람과 못 두는 사람의 차이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 사람이 읽는 수보다 다른 사람이 읽는 수가 (앞의 사람의 것을 포괄하면서) 더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이 더 뛰어난 기사라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두 사람은 “수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으리라),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공통으로 수들을 읽고 있고 상대방이 수 읽는 것 자체도 읽고 있는 것이다. 잠재성이 두 사람 사이에 분명 객관적으로 존재하기에 이런 수 싸움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현전, 나아가 현존/현실성만이 아니라 잠재성 또한 포괄하고 있다. 이것은 ‘잠재성’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큰 바둑대회의 결승전, 그것도 마지막 대국에서 A가 B에게 지고 있다. 바둑판도 대강 채워져 가고 A가 아무리 수를 읽어도 역전시킬 가능성―정확히 말해 잠재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 때 A는 저 바둑판과 바둑알이 흐물흐물 액체로 변해서 바닥에 퍼져버렸으면 하고 상상할 수 있다. 수를 읽는 것이 잠재성의 문제라면, 바로 이것은 오히려 가능성의 문제이다. 일상어에서는 가능성과 잠재성이라는 두 말 사이의 차이가 별반 없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다. 오늘날 ‘가능성’ 개념은 흔히 ‘가능세계론’이라 불리는 분야와 관련되고, ‘잠재성’은 베르그송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사유 계열에 깊이 관련된다. 현실성, 가능성, 잠재성의 관계는 우리 삶을 생각해 볼 때도 중요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이정우와 국민학교에 다니던 이정우를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머리가 하얗게 세게 되는 것은 잠재성의 문제이지만 국민학교 학생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이다. 전자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미래에 벌어질 일이지만, 후자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시간이란 비대칭적이라는 것, ‘불가역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잠재성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제이지만, 가능성은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문제가 된다. 기억과 상상이 통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잠재성과 가능성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해도 그 경계선이 꼭 명확한 것은 아니다.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가능적인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주관 자체도 결국에는 이 우주 안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의미, 확장된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이다.
한 인간의 기억과 상상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인 것이다. 말하자면 가능한/상상적인 것은 인간 주관의 잠재성이다. 나아가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에 따라 주관으로서의 잠재성이 객관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비행기의 발명 이전에 인간이 하늘을 난다는 것은 가능적/상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에 위배되는 순전한 공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주관에 존재하던 비행기를 현실화함으로써 과거에는 가능적/상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잠재적/실재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과거로 가는 것도 실재적인 것으로 화할 것이며 시간은 가역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가능성과 잠재성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이다.중요한 것은 현실성에서 출발해 가능성(상상의 넓이를 매개한 각종 가능성들)으로 갔다가 잠재성(좁은 의미의,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들)으로 와서 다시 현실성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현실성(가능성과 잠재성을 거침으로써 터득하게 된, 실천적으로 변화된 현실성)으로 돌아오는 원환이다. 우리 삶은 이런 원환을 그리면서 이루어질 때 양상론적으로 건강한 것일 수 있다.<이정우|철학자 jwlee@assist.ac.kr>입력 : 2011-11-06 19:47:17ㅣ수정 : 2011-11-06 19: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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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김상민 |
바둑의 예를 보자. 이창호와 이세돌이 바둑을 두고 있다. 50수까지 두었다.(‘수’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반상의 검은 돌 25개와 하얀 돌 25개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창호와 이세돌은 지금 현전하는 25수씩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감각적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서는 보이는 그 어떤 수들을 부지런히 읽고 있다. 그 수는 객관적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은 환영을 보고 있다 해야 하리라. 또, 그 수들이 엄존하지 않는다면 바둑을 잘 두는 사람과 못 두는 사람의 차이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 사람이 읽는 수보다 다른 사람이 읽는 수가 (앞의 사람의 것을 포괄하면서) 더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이 더 뛰어난 기사라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두 사람은 “수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그렇다면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으리라),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공통으로 수들을 읽고 있고 상대방이 수 읽는 것 자체도 읽고 있는 것이다. 잠재성이 두 사람 사이에 분명 객관적으로 존재하기에 이런 수 싸움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현전, 나아가 현존/현실성만이 아니라 잠재성 또한 포괄하고 있다. 이것은 ‘잠재성’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큰 바둑대회의 결승전, 그것도 마지막 대국에서 A가 B에게 지고 있다. 바둑판도 대강 채워져 가고 A가 아무리 수를 읽어도 역전시킬 가능성―정확히 말해 잠재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 때 A는 저 바둑판과 바둑알이 흐물흐물 액체로 변해서 바닥에 퍼져버렸으면 하고 상상할 수 있다. 수를 읽는 것이 잠재성의 문제라면, 바로 이것은 오히려 가능성의 문제이다. 일상어에서는 가능성과 잠재성이라는 두 말 사이의 차이가 별반 없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다. 오늘날 ‘가능성’ 개념은 흔히 ‘가능세계론’이라 불리는 분야와 관련되고, ‘잠재성’은 베르그송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사유 계열에 깊이 관련된다. 현실성, 가능성, 잠재성의 관계는 우리 삶을 생각해 볼 때도 중요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이정우와 국민학교에 다니던 이정우를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머리가 하얗게 세게 되는 것은 잠재성의 문제이지만 국민학교 학생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이다. 전자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미래에 벌어질 일이지만, 후자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시간이란 비대칭적이라는 것, ‘불가역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잠재성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제이지만, 가능성은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문제가 된다. 기억과 상상이 통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잠재성과 가능성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해도 그 경계선이 꼭 명확한 것은 아니다.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가능적인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주관 자체도 결국에는 이 우주 안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의미, 확장된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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