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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종합 능력이 있는 정치가가 필요하다

ngo2002 2011. 10. 17. 09:13

[이정우의 철학카페]종합 능력이 있는 정치가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나 일방적인 FTA 를 극복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다 그러나 도덕적 정당성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비대칭적 종합을 추구하는 정치가 절실한 것이다

인간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수식어들 중 하나는 ‘진정한’이라는 수식어이다. 진정한 정치가, 진정한 학자, 진정한 군인… 등을 찾는 것이야말로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의 시조인 플라톤이 고민했던 것도 이 ‘선별’의 문제였다. 도대체 어떤 기준을 통해서, 어떤 철학적 근거를 통해서 진정한 정치가, 진정한 철학자 등등을 선별할 것인가. 유명한 이데아론도 순수 이론적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실천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숱한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한 정치가라고 나서는 상황에서 이 선별의 문제는 중차대한 것이었다 해야 할 것이다. “상인들과 농부들, 또는 방앗간 주인들, 게다가 체육인들, 의사들, 이들 모두가 자신들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의 양육은 물론 통치자들의 양육까지도 책임진다고 자임함으로써, 우리가 정치가, 치(治)자라고 불렀던 ‘인간의 목동’과 경합한다는 사실은 아시오?”(플라톤의 <정치가> 중에서)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정치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정치란 결국 ‘보살핌’의 문제라고 본다. 이 보살핌은 참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강제적 보살핌이 아니라 자발적 존재들(오늘날로 말해 시민들)의 보살핌이다. 물론 이런 정의는 일단 윤곽을 잡아주는 정의일 뿐, 아직 충분한 내용이 채워지지 않은 헐거운 정의이다. 핵심적인 것은 도대체 누가 진정한 보살피는 자인가, 누가 자발적 존재들로서의 시민들을 보살필 수 있는가이다. 위의 여러 후보들 및 명기되지 않은 숱한 경쟁자들 중 누가 진정한 ‘인간의 목동’인가?

플라톤 실천철학의 중핵에 놓여 있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플라톤이 한평생 갈고닦은 이론이 곧 이데아론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데아론 자체라기보다 이 이론이 그의 사유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플라톤의 사유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이 방식, 그것은 바로 모방(미메시스)의 논리이다. 플라톤 사유의 핵심은 이데아론이라기보다 이데아들에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미메시스 개념이야말로 플라톤 철학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다.

플라톤에게 이상적인 정치가란 곧 신들이다. 물론 이는 실증적으로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보다 현실적인 맥락에서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를 플라톤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전기 대화편들(<프로타고라스> <메논> 등등)에서 (소크라테스를 따라) 지혜가 다른 덕들을 주재해야 한다고 했고, <국가>에서는 정의가 다른 덕들(지혜, 용기, 절제)을 조화롭게 한다고 했던 플라톤이지만, 말년의 대화편인 <정치가>에서는 지혜와 용기의 겸비를 강조한다. 그러나 지혜와 용기는 서로 대립의 관계하에 있다. 따라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다”는 말은 그 근거를 뚜렷이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말만 그럴듯한 것이 될 것이다. 플라톤은 이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씨줄과 날줄’의 논리를 전개한다.

대립하는 것들을 최대한 적절히 통합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위대한 정치가의 능력이다. 지혜와 용기라는 전혀 이질적인 두 요소를 결합하는 일은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는 방식도 아니며(이 경우 필수적인 두 요소 중 하나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제3의 매개자를 두는 방식도 아니며(이 경우 두 요소와 동등한 제3자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지혜와 용기의 위상이 죽어버린다), 또 둘을 섞어버리는 방식도 아니다(이 경우 지혜도 용기도 아닌 아페이론이 나와버린다. ‘문’도 ‘무’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대목에서 대립자들 각각을 살리면서도 그것들을 통합하는 방식으로서 ‘씨줄과 날줄의 교차’라는 구도를 제시한다. 씨줄·날줄의 구도야말로 형식논리학적 대립관계를 넘어 정지와 운동, 동일성과 타자성, 지혜와 용기가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해 준다(씨줄과 날줄은 대립자들을 묶어 주는 것이기에 직각을 이루어야 한다). 대립적인 두 능력을 씨줄·날줄과 같은 구도로 겸비하는 존재만이 신적인 정치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신적인 정치가는 기예와 법률을 함께 구사해야 하며 아울러 인식과 기예(실천)를 통합해야 한다. 이상태 즉 신적 존재는 현실적 존재들에게 모순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비모순으로서 영위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적 존재를 보다 잘 모방하고 있는 존재일수록 모순된 것들, 대립된 것들을 통합하는 능력에서 뛰어난 존재일 것이다. 지혜와 용기, 기예와 법률, 인식과 실천…, 같은 대립적인 것들을 섞는다거나 하나로 만든다거나 제3자를 매개시킨다거나 하는 방식이 아니라 ‘씨줄과 날줄’의 방식으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신적 존재의 모방자, 특히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능력인 것이다.

물론 이는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다. 이는 정치가의 ‘범형’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정치가들을 선별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그들이 이 범형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선별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국가 또한 이상적인 국가에 좀 더 근접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씨줄과 날줄의 논리로 사유했던 것을 우리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문제에 관련해서 시도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무한 대립만으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미 FTA 문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업(특히 대기업이나 초국적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과 약자들이나 서민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종합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종합은 대칭적 종합이 아니라 소수자들의 삶을 중심에 놓는 비대칭적 종합이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갉아먹는 신자유주의나 세계화, 일방적인 FTA 등을 극복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이다. 그러나 도덕적 정당성이나 감정적 대립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비대칭적 종합을 추구하는 정치가 절실한 것이다.

<이정우 철학자>



입력 : 2011-10-16 21:07:10수정 : 2011-10-16 21: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