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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형식적 원인 아닌 ‘탁월한 원인’을 찾자

ngo2002 2011. 10. 17. 09:11

[이정우의 철학카페]형식적 원인 아닌 ‘탁월한 원인’을 찾자

‘탁월한 원인의 사유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체제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혼란과 고통이 치유되기 어렵다’


‘원인’이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전문 용어로서 도입한 대표적인 용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4원인 개념을 떠올려 보자. 한 사물에는 질료인(그것이 어떤 질료로 되어 있는가), 형상인(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운동인(무엇이 그것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목적인(그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존재하는가)이 존재하며, 이 네 가지 원인을 모두 설명했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을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aitia’ 개념은 훗날 라틴어 ‘causa’가 되고 또 현대어 ‘cause’가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오늘날에도 어떤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과학적 탐구의 핵심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근대에 이르러서는 사물의 ‘운동인’이 특별히 중시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운동인을 찾는 것, 예컨대 어떤 환자의 병인(병의 원인)을 찾는 것은 현대의 과학적 탐구에서 핵심이 되었다.

일러스트|김상민 기자


그런데 이 원인 개념에 있어 ‘탁월한 원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탁월한’은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맥락에서의) ‘인과적으로’ 성립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비되는 말이 ‘형식적으로’ ‘형이하학적으로’ ‘우발적으로’이다. 요컨대 탁월한 원인과 형식적 원인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을 생각해 보자. 이 건물은 어떤 설계자가 그 형상을 설계했고, 노동자들이 벽돌 등등을 날라서 만든 것이다. 설계자가 그 형상인을 설계했고, 노동자들이 노동을 해서 그 건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건물은 벽돌 같은 질료들로 만들어졌고, 또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결국 하나의 건물은 이것을 설계한 설계자와 그것을 만든 노동자들 속에 ‘탁월한 방식으로’ 들어 있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이 건물이 지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돈을 대야 했을 것이다. 이때 돈과 그 돈을 댄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의 원인이라고 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이 건물을 매입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건물은 그 매입자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원인’에 어떤 위상을 부여한다 해도, 이들이 이 건물의 탁월한 원인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들이 이 건물에 대해 실제 한 일이라곤 돈을 댄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이 건물의 탁원한 원인이 아니라 형식적 원인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그러한가?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 건물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돈을 댄 자본가가 되어버린다. 왜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물은 돈으로 환원되고, 돈은 단지 형식적 도구가 아니라 사물 자체로 둔갑해버리기 때문이다. 돈은 한 사물의 탁월한 원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을 숫자로 표시해 교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런 도구를 많이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돈은 사물과 완벽하게 동일시되고, 따라서 한 건물이 만들어지는 데 자본가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해도 그 건물은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탁월한 원인이 아니라 형식적 원인이 사물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심층에 있는 존재론적 모순이다. 탁월한 원인과 형식적 원인의 지위가 바뀌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의 진정한 원인인 사람과 (돈의 힘을 통해서)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어긋남으로써 갖가지 형태의 모순들이 생겨난다. 사실 꼭 자본주의가 아니라 해도 이런 모순은 일정 정도는 생겨날 수밖에 없다(탁월한 원인과 우발적 원인이 꼭 일치하는 경우들만이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그러나 모든 것을 돈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극(極)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모순은 극단화된다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는 큰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산업자본주의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의 노동을 매개로 해서 성립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산업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의 저항이라는 측면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산업자본주의는 어쨌든 노동자들과 사물이라는 ‘실재’를 매개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체제이다.

반면 금융자본주의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상징(돈) 그 자체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된다. 기호의 사물 사이의 지시관계가 끊어지고 돈 자체가 돈을 낳는 체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체제에서는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와 화폐가 생산하는 가치가 분리되고,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게 된다. 결국 금융자본주의 시대란 존재론적으로 말해 형식적 원인이 탁월한 원인을 압도해버리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말에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체제란 결국 ‘고도 금융’의 고삐를 풀어줌으로써 가능했다. 고도 금융의 폐단으로 해가 저물어버린 영국을 보면서 미국은 고도 금융의 고삐를 죄었었지만(물론 이는 선택적 죔이었다 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에 도래한 갖가지 난해한 상황들하에서 고도 금융의 고삐는 풀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이 화폐자본주의가 폭발 직전에 이른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 등장한 이른바 ‘부자 증세’론은 극소수 부자들의 ‘양심’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금융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들 사이에서 이런 폭발의 예감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 증세’는 그 자체로서 대안이 될 수 없으며, 폭발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려는 자본주의 자체 내에서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가 달라지려면, 무엇이 사물들의 탁월한 원인인가를 새롭게 사유해야 한다. 그런 사유를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체제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혼란과 고통이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다. 사물들의 탁월한 원인을 찾는 존재론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윤리학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정우 | 철학자>



입력 : 2011-09-25 21:22:51수정 : 2011-09-25 21: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