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산행,걷기)

18.주말산행-진도 여귀산·동석산

ngo2002 2011. 8. 25. 14:37

주말산행-진도 여귀산·동석산


입력시간 : 2008. 02.15. 00:00


동석산
진도아리랑 한바탕 흥얼흥얼

바위가 발길 잡는들 무슨 대수랴

주적주적 내리는 겨울 빗속을 뚫고 여귀산과 동석산을 답사하기 위해 진도를 찾아간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한번 쯤 짚고 넘어가야 하는 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섬으로 동쪽은 명량해협 일부를 사이에 두고 해남반도로 이어지고, 서쪽은 황해, 남쪽은 제주해협으로 트여 있으며 북쪽은 해남반도의 일부인 화원반도 및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마주한다. 본 섬인 진도를 포함해 상조도·하조도·가사도 등 45개의 유인도와 185개의 무인도를 합하여 230개의 섬으로 1개읍, 6개면으로 이루어졌으며 면적은 430.6㎢다.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선 330여척을 무찌른 명량대첩지, 울돌목위에 1984년 10월18일 우리나라 최초로 그림같은 사장교 (길이 484m, 폭 11.7m)인 진도대교가 완공됨으로 비로소 육지와 연결되었다. 그 후 교통량의 증가로 2006년 12월 15일 제 2대교가 개통되었다.

얕으막하지만 아름다운 산 많아

진도에는 얕으막하지만 만만이 보지못할 아름다운 산도 많다. 동쪽에는 첨찰산(尖察山·485.2m)이 있고 서쪽으로는 지력산(智力山·325m), 남쪽엔 동석산·급치산(221m)·여귀산(457m)이, 북쪽에는 금골산(金骨山·193m)이 그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53호인 진돗개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예로부터 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이름 높았다.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진도아리랑을 비롯해 이 지방에서 불려지는 민요로는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농업요가 대부분이고, 고기를 잡으면서 부르는 닻배 노래 등 어업요도 많다. 또한 조선 후기 남종 문인화의 대표적 화가인 소치 허유-미산 허형-의재 허백련-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화가와, 서예가 소전 손재형 등이 진도 출신이다.

충무공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단 12척의 배로 130여 척의 적선과 당당히 맞서 물리친 명량대첩의 현장이 바로 울둘목이다. 선조는 간계에 의해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지만 이순신이 우수영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9명의 장교와 그보다 적은 6명의 병사 뿐이였다. 이순신은 약 보름동안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군사를 모아 가까스로 수군의 모습을 갖춰 다시 전투 태세를 갖추려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후 장수나 병사들은 겁을 먹고 사기를 잃은체 제대로 싸우려들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긴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세계적으로 소문난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 약 2.8㎞가 썰물 때 갯벌이 드러나는 현상으로 매년 음력 3월 초와 보름에 조수간만의 차로 40m 폭으로 1시간쯤 바닥이 드러나는 이 때를 '영등살'이라 하여 영등제가 열리는 현상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이 몰려들어 전 세계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을 보기 위해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여귀산


문화예술의 보금자리 운림산방

뿐이랴 앞에서 언급한 서화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는 운림산방이 있다.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許維·1809∼1893)가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냈던 화실을 말한다. 소치는 죽수계정도, 선면산수도, 노송도 같은 좋은 작품을 남겼으며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이듬해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지었다. 이곳에서 소치는 8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자를 기르며 불후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 후 운림산방은 한국 남화의 본거지로서 소치 허유-미산 허형(米山 許瀅)-남농 허건(南農 許健), 임인 허림(林人 許林)-임전 허문(林田 許文)으로 이어지는 직계 4대에 걸쳐 5인의 화가를 배출하면서 세계에서 보기드문 화맥을 이어가고 있는 가문이다. 그래서 진도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진도의 허씨 집안은 빗자루만 잡아도 명필과 명화가 나온다'고 말 한다던가?

또 진도에서는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려 세 가지나 된다. 첫째 글씨 자랑이요, 둘째 그림 자랑이고, 셋째는 노래 자랑이다.

진도에선 글씨·그림·노래 자랑 말라

다른 고을의 자랑거리와 비교해 볼 때 품격이 다르거니와, 이 세 가지만으로도 진도를 우리나라 최고의 예향으로 꼽는 데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주량을 들 수 있다. 홍주를 앞에 놓고 주량을 자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진도는 민요가 파도치는 고을이다. 우리나라 인간문화재 23명 중에서 이 고장 출신이 무려 6명이나 된다는 점에서도 짐작 할 수있을 것이다.

여러면에서 진도 아낙네들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농삿일이 많아 김매기는 물론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나뭇꾼은 물론 상여를매는것조차도 여자의 몫이었다고 한다. 진도 씻김굿은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지전(紙錢)춤을 춘다. 다시래기는 망자가 수명을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났을때 동네 상여꾼들이 전문 소리꾼을 불러 밤을 지샌다. 다시래기는 한자로 다시락(多侍樂), 즉 같이 즐긴다 또는 우리말로 다시 낳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래기 놀이 맨 끝에 사람 죽은 집에서 "갓난애나 둘려 가지고 가자"는 대사처럼 죽고 낳고 하는 세상살이를 이야기하는 굿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지만 언제부턴가 모든 지역에서 사라졌고 진도에서만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슬픈 곡소리가 들려야 할 상가에 다시래기굿으로 웃음이 터지고, 슬퍼해야 할 장송곡인 상여소리에 풍악이 울리니 진도 주민들의 의식세계를 외지에서 처음 찾는 사람을 어리둥절 하게도 한다.

망자도 풍악 울리며 보내주는 마을

그러기에 진도의 민속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진도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진도가 간직하고 있는 이런 원형의 아름다움은 역사적인 상처에서 유래했다.

진도의 비극은 후삼국시대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한 후백제 군사가 진도에서 격파되었고 고려 말기엔 삼별초군이, 임진왜란 때도 왜군은 전략상 요충지인 진도에 상륙하여 약탈 과 방화, 살인등으로 섬을 초토화했다. 이 때 마다 진도에는 피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삼별초의 항몽전에는 여몽 연합군은 승리한 뒤 아녀자를 제외한 모든 장정을 몰살했거나 살아남은 자들은 몽골에 노예로 끌려갔었고 한 때는 왜구 때문에 80여 년간 섬을 비운 적도 있을 정도로 환란이 많았던 곳이다. 이렇듯 각종 전란으로 남자들의 씨가 마르면서 진도 아낙들은 남성의 일인 상여를 메고 지아비를 장사 지내는 아픔을 겪었을것이다. 이러한 한이 씻김굿 등으로 승화됐다.

정선 아리랑이 깊은 산중에서 삶을 읊은 한의 노래라면, 진도 아리랑은 넓은 들녘에서 여유있게 부르는 흥의 노래다. "흥, 흥, 흥" 하는 후렴의 가락은 바다의 물결이 출렁거림에서 왔을 것이고. 이는 리듬과 율동의 동시성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개념 없이 불리던 진도아리랑을 악보화 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임회면 출신인 우리나라 대금산조의 명인으로 꼽히는 박종기(1879∼1939) 선생이다.

한편, 진도는 유배의 섬이였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무려 180여 명이 진도에 유배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배를 온 벼슬아치들은 일정기간동안 그림이나 글을 쓰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주민들에게 전파됐을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들과 이웃하고 있으면서 교류하던 주민들의 정신에 파고드는 넉넉함과 예술적인 기질의 고급 문화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점을 흡수해서 진도만의 독특함이 유래됐을 것이다. 진도아리랑에 등장하는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하는 대목도 유배생활을 했던 영남출신의 흔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얼마 전 진도 출신의 한 음악선생은 자신의 논문에서 진도아리랑의 첫마디가 '문경새재'가 아닌 '문전세재'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문 앞의 세 고개'는 태어나는 첫 번째 고개, 인생살이 두 번째 고개, 북망산천으로 가는 세 번째 고개를 뜻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60세 이상의 토박이 노인들은 모두 '문전세재'로 발음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이런 저런생각을 하는사이 비 멎은 말끔한 도로위를 달리는 애마는 국악전수관 앞을 지나 탑립마을 버스 정류장에 가 멎는다, 농원쪽으로 100여m를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좌측으로 탑이 새워진 모습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능선에서 우측으로 난 밭 뚝길을 지나 곧바로 산으로 빨려드는 등산로가 열리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정상에 오르면 아름답게 펼쳐진 다도해

숲속을 잠시 오르면 진주 허씨 묘가 나오고 이어 암릉에 로프가 설치된 바위를 붙들면서 조심스럽게 오르면 농원과 국악원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철 계단을 따라 오르면 무인 통신 시설이 있는 여귀산 정상이다. 눈 앞에 펼쳐진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섬 군락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하산은 되돌아 나와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계속 진행하면 바위가 멋들어진 작은 여귀산을 지나 탑립농원이 가까이 내려다 보이면서 사슴울타리를 지나 2시간만에 도로에 닿는다.

바위 많아 전문 산악인 안내 받아야

여귀산 주차장에서 버스로 15분이면 동석산이 있는 심동리의 아랫심동 마을에 닿는다. 눈 앞을 가로막는 바위 산 무더기가 가슴을 압도한다. 바위로 이루어진 등산로는 그 동안 낙반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심하게 다친 경우가 빈번하여 등산로 안전시설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안전 시설이 천종사에서 오르는 등산로에만 설치 됐을 뿐이어서 이 산의 반 정도 밖에 경험할 수 없다. 교회에서부터 올라가면 동석산 전체를 답사할 수 있으나 보조자일이나 전문 산악인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천종사에서 올라 천종사 뒷편으로 하산 할 경우 1시간 정도면 충분 하지만, 교회에서 부터 시작하여 동석산을 종주 할 경우 4시간은 족히 걸리는 시간이다.

산행코스

여귀산=탑립버스정류장-정상-작은여귀산-탑립농원(2.5시간 산행후 버스로 동석산으로 20분 이동)

동석산=교회--갈림길--정상--아랫심등(보조자일이 필요한 4시간 소요), 보조자일 산악회준비







박길만 광주토요산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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