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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하이웨이 대장정 ⑦창사 시내 옛 臨政터에 金九동상이

ngo2002 2011. 5. 19. 09:43

창사 시내 옛 臨政터에 金九동상이
1937년 일본이 중국 침입하자 1년간 머물러
기사입력 2011.05.16 17:08:01 | 최종수정 2011.05.16 18:56:18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 아시안하이웨이 대장정 ⑦ ◆

창사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모습(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7~1938년에 자리 잡았던 창사 중산로 난무팅 6호. 백범 김구 선생 동상(아래)이 취재진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창사 시내의 중산로 난무팅 6호(楠木廳 6號).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곳은 1937년부터 1년 남짓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곳이다. 꼬불꼬불한 미로를 돌아 들어가면 허름하지만 고요한 가운데 새소리가 들리는 임시정부 옛 터가 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1937년 1월 샹장(湘江)의 한기를 느끼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임시정부 인사들과 100여 명의 가족은 쟈싱, 항저우, 난징 등을 떠돌다가 후방기지인 창사에 도착한 것. 김구 선생은 어머니인 79세 곽낙원 여사와 16세의 아들 김인과 함께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1938년 3월 1일에 창사 임시정부 요원들은 미소를 지은 채 3ㆍ1절 19주년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백범일지에 보면 김구 선생은 장즈중 장군이 후난성 주석으로 취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편의를 봐주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창사는 물가도 싸서 좋은 데다 그동안은 줄곧 가명생활을 했지만 이곳에서는 드디어 김구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며 기쁨 어린 감회를 토로했다. 장즈중은 김구 선생을 위해 관저를 안배하는 한편 한국어 방송국 등을 개설하도록 도와줬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1938년 5월 6일 임시정부 2층에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4인이 괴한의 총격에 의해 부상을 당하고 1명이 사망하는 소위 `남목청 사건`을 겪게 된다. 독립운동 인사들에게 쓰라린 사건이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 1938년 7월 창사 임시정부는 난무팅 6호를 떠났다.

그후 중국 창사시 정부는 2007년 대한민국 창사 임시정부 터를 문화재로 지정했고 2009년부터 약 10억원을 들여 임시정부 터를 새로이 복원했다.

[특별취재팀 = 김상민 부장대우 / 이상훈 기자 / 서유진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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