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16.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 -진리의 바다로 떠나가는 해인사(2)
2010년 03월 01일 00시 0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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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퉁불퉁 솟아오른 바위산 압권
빼어난 경치 해동의 십승지 별칭
토신골 막아 댐 건설 청량제 역할
여름이 시작된다는 입하! 오월은 푸르구나. 깨복쟁이들의 세상인 어린이날!
이른 아침 가야산행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오늘은 와이프(Wife)가 동행하기로 한다니 즐거움이 배가 되리라 믿는다.
88고속도로의 해인사 터널을 지나 나들목(Inter Change)을 벗어나자 맑은 가야천이 흐르고 있었다. 법보 종찰로서 큰 가람답게 길 양쪽의 가로수에 묶어서 십리나 되는 절 길을 밝힌 법등이 길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십승지를 찾아다니는 여행길에 아내는 한 번도 동행하지 못했다. 내가 쉬는 휴일의 답사 길에는 아내는 교회에 나가서 봉사활동을 해왔기 때문인데 모처럼 함께한 나들이가 만족하기를 바랐다.
가야산은 일명 우두산이라고 불리는 상왕봉(1천430m)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상 경북 상주와 경남 거창, 합천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수려하고 당당한 산세를 자랑하는 가야산은 그 뛰어난 풍치와 장쾌한 기백을 자랑하는 영남의 알프스로 불리어지는 명산(名山)이라 하겠다.
법보 종찰 해인사를 껴안고 있는 가야산은 말만 들어도 범상치 않는 기상과 빼어난 경치를 짐작할 수 있음을 자랑한다. 해인사는 으뜸이 되는 가야산의 품안에 자리해서 진리의 바다로 끝없는 항해를 하고 있는 배와 같은 절이다. 바닷물이 없는 산속의 배는 마음속 파도를 넘어 바람을 타고 우주 본연의 모습으로 멈출 줄을 모른다.
해인사가 터 잡은 모습을 풍수지리사들은 진리의 바다에 떠있는 행주형국이라고 한다. 연꽃 봉우리처럼 둘러싸인 산세의 복판에 사찰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바다 속 구름 위를 달리는 배는 화엄의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상왕, 지환, 중향, 설산 봉들이 그것이다. '가야'는 우리말의 가람(江), 개(浦口)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인도의 붓다 가야에 있는 가야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가야산은 전해지는 말처럼 돋보이는 정상 일대의 장엄한 바위들의 자태가 신비감이 들 정도로 아름답기만 하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울퉁불퉁 솟아오른 바위산이 압권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끝이 뾰쪽한 바위가 줄줄이 늘어서서 불의 산이 공중잽이하고 있는 모양이다.
높기도 할뿐만 아니라 큰 산이라 그 경치가 빼어나서 예로부터 해동의 십승지로 일컬어졌던 곳이다. 바위사이에 단단한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듬성듬성 보이는데 신령스럽고 수도자의 자태마냥 고고하다.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가야산의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법등을 따라가자 어느새 가야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다다랐다. 산행지도를 펼쳐놓고 살핀 나는 제1등산로를 따라 6시간이 소요되는 산행코스를 택했다. 아내에게는 힘들면 산의 중간 어디에서든 하산하라고 했지만 내심으로는 정상까지 함께 오르기를 바랐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담벼락에 차를 세운 나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기를 시작했다. 토신골을 따라 오르는 길은 평범한 야산인 듯 동네 뒷산처럼 부드러운 흙 길이라서 걷기가 편했다. 골짜기의 오른쪽에는 거대한 전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너무나 크고 당당한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학사대’였다.
학사대란 이곳의 아늑하고 살기 좋은 지세로 모여든 학들이 춤을 추며 떼를 지어 살았다고 학사대라 부른다. 신라 말의 고운 최치원 선생은 대학자이자 문장가로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을 익힌 분이다. 당시에 일어난 황소의 난을 보고 ‘토황소 격문’이라는 글을 썼는데 뛰어난 글 솜씨로 반란을 평정했던 불세출의 문장가이셨다.
홍류동 계곡은 최치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봄이면 진달래꽃,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을 담아낸 그의 시에는 홍류동 소나무의 짙은 솔내음이 코를 찌른다.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산이 좋다면서 어찌하여 산 밖으로 나오려 하시는가?
뒷날 내 자취를 시험 삼아 보시게나.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당시의 혼란했던 사회정세와 자신의 야망에 넘친 정치를 펴려는 이상에서 고민하다 이곳에 들러 홍류동 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던 곳이다. 최치원 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았더니 지팡이 끝에서 살아난 전나무가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며 서있었다. 안타깝게도 학을 볼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 짜납기만 하다.
"내가 살아 있다면 이 나무도 또한 살아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여라."
고운 선생의 유언이 가야산의 메아리로 쩌렁쩌렁 들리는 듯하다. 용탑 선원을 지나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토신골과 극락골이 만나는 곳에는 높은 댐을 막아 수원지에 가득 찬물이 가야천으로 흘러내리면서 해인사 주변의 온갖 시끄러움과 먼지를 씻어 내려주고 있었다. 식수도 농사용도 아닌 저수지가 주변의 생물들을 촉촉이 적셔주는 고마운 물로 쓰인다고 하니 참신한 생각이 세상을 맑게 해주는 청량제 구실을 해준다.
가파른 산의 중턱을 막아 댐을 만들고 물을 가뒀다. 물은 산의 곳곳으로 흘러가며 물기를 전달해주고 나무들을 자라게 해준다. 산을 위한 물의 임시저장탱크인 것이다. 풍요로운 가야산은 이렇게 해서 가꿔진 것이었다.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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