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명리

15.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1)

ngo2002 2011. 4. 18. 09:44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15.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1)


2010년 02월 08일 00시 00분 입력


기근·역병·전란 피할 수 있는 지상낙원

임진왜란 중에도 유일하게 침략 벗어난 가야산 만수동

좌청룡·우백호에 해당하는 빼어난 산들이 자리 잡아

후덕한 인심·선량한 풍속으로 발복의 터전으로 자리매김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반도의 땅에서 우리가 살만한 곳은 어디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요충지에 자리해서 외침을 받아온 땅이 우리의 국토이다. 육지가 바다 속으로 길게 땅을 뻗어 내리는 곳이라서 양기가 발달한 남성적인 땅이고 기운이 넘쳐 서로 차지하려는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스스로 지키려는 힘이 부족했고 무(武)보다는 문(文)을 숭상해서 이론과 주의주장이 앞섰다. 그래서 유달리 빈번한 외침에 시달려왔던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륙과 해양에서 모두 931회에 이르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다. 대략적으로 2년에 한 번씩의 전란이 발생한 샘이다. 그때마다 국토가 유린되고 아녀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잡혀가는 고초를 겪었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마다 가난한 민초들에 커다란 희생을 강요당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농사를 짓다말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했다. 모진 것이 인간의 목숨이다. 배가 고파 굶어죽고 전염병에 걸려 귀한 생명이 시들어갔다. 침략자들의 무기나 말발굽에 치인자보다 기아와 병으로 죽어간 숫자가 더 많았다.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기근과 역병, 전란 등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알아두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화두였다. 최우선적으로 목숨을 건져야 했고 그런 곳이라야 사람이 살만한 이상향이 되었던 것이다. 십승지(十勝地)는 당하고만 살았던 민초들의 염원이었고 필생의 이상향이었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는 제일먼저 호구를 지켜가며 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기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조선중기의 예언가 남사고(南師古)는 기근, 역병, 전란을 피해 목숨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열 군데를 지적했다. 족집게처럼 용하다는 점쟁이 술가(術家)들이 지목한 승지로 가야산 아래 풍수의 땅으로 만수동이 그 중의 한 곳이다.

과연 그곳이 만년을 지켜오며 지친 이들을 보듬어주는 안락한 곳일까? 전국적으로 만수동(萬壽洞)이란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오죽이나 수명에 시달리며 한이 맺혔으면 일만 살까지 살기를 염원하며 마을이름에 만수를 붙였을까?

가야산 만수동은 산 밑 남쪽에 둘레 200여리에 걸쳐 만수동이 있다고 했다. 만수동에서 바라본 가야산(해발 1430m)의 정상은 검은 듯 하얀색의 바위가 왕관을 쓰고 불타고 있는 모습처럼 울퉁불퉁하게 솟아올랐다. 아무리 보아도 타오르는 불꽃이다. 양기가 넘치는 가야산을 진산으로 한 마을은 만 살까지 살 수 있는 길지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뚜렷한 산의 기상이 맥이 차고 넘쳐서 승지가 그곳이라는 믿음이 간다. 타오르는 불은 닥치는 대로 태워버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약해주는 상징이다. 생활 속에서 단 하루라도 불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불꽃바위아래가 번성할 승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가 찾아 헤매던 길지는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입살에 오르내리며 만수동으로 각인되었다.

만수동은 제일 높은 봉을 뒤로하고 마을 앞쪽으로는 매화산 제일봉(1010m)을 두었다. 가야면 일대는 임진왜란 7년의 와중에도 왜적의 침략을 벗어난 유일한 곳이라니 과연 길지중의 길지라는 생각이다.

만수동은 옛날부터 정감록과 여러 비결에 자주 언급되었던 곳이다. 가야산 동북쪽에 있는 만수동은 난세에 병화를 입지 않는 복지라고 전해온다. 감여가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여말과 한말에는 수도하는 이들의 입산도 많아졌다.

만수동 뒤의 태조 산에 해당하는 가야산과 탐라목성인 현무봉이 자리한 곳이 듬직해서 패기차고 활기가 넘친다. 좌청룡과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들의 형세도 빼어나다. 그리고 마을의 운세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생기를 보듬고 있는 형국이다. 물이 빠져 나가는 파구가 곧바로 밖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산자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만수동의 음복을 간직해준 모습이다.

물론 만수동의 안산도 형세가 어울린다.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계곡물은 마를 줄을 모르고 졸졸 흐르며 깨끗한 마을로 유지시켜준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화마를 재워주는 구실까지 해주고 있어서 양수 겹장이다.

가야산은 정감록의 감결에서도 곤륜산에서 시작한 백두산이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원맥에 속한 산으로 조씨(趙氏)가 천년을 도읍할 땅이라고 했다. 그만큼 신비하고 영묘한 산으로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풍수지리서나 예언서에서 가야산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신비성을 간직한 곳으로 문화유적과 풍부하고 다양한 산물, 후덕한 인심과 진실한 풍속으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했다.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생활이 윤택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장차 왕도(王都)가 될 지형과 지세라고 언급한다.

가야지역은 대도시 대구를 중심으로 고속도로와 국도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좋은 삶터의 조건을 가졌다. 이러한 특징은 십승지의 조건과 상충되기 때문에 피난, 보신의 땅과는 관계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래에 다가올 재앙은 가뭄이나 홍수 등의 자연적인 재해로 인한 굶주림과 질병보다는 전쟁이나 폭동 등의 인위적인 재해로 인한 살육과 살인이라면 가야지역은 보신의 길지임에 틀림이 없다.

인위적인 재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풍속 등에 의하여 야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덕한 인심과 선량한 풍속이 살아있는 이 지역은 발복(發福)의 터전이 될 것이라는 추정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택리지의 팔도총론에서도 가야지역을 으뜸으로 보았다. 감천 남쪽은 선석산이고 산의 남쪽은 성주와 고령이다. 고령은 옛날 가야국지역이고 남쪽이 합천인데 가야산의 동편이라고 했다. 세 고을의 논이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서 적은 종자로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곳에 뿌리박고 사는 이들은 모두가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떠돌이나 얻어먹는 부랑아가 발생할 줄 모른다. 결국 우리들의 삶은 자연에 의해서 결정되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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