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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3)

ngo2002 2011. 4. 18. 09:46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2010년 03월 08일 00시 00분 입력


상황봉에서 바라본 칠불봉
'삼재' 피한 행주형 명당에 터 잡은 해인사

산형 천하 절승…임진왜란 6·25 때도 피해 없어

사다리·밧줄 연속 큰 바위 돌자 드디어 '정상'



"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 비유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 비치는(印)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



토신골로 올라간 나는 극락 골 따라 올라온 길과 만나는 능선 갈림길에 이르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길에서 벗어나 넓은 곳을 차지한 후 배낭을 풀어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납작한 돌을 놓고 밥상처럼 만든 후, 그 위에 김밥을 풀어놓고 먹기 시작했다. 아내는 신 김치를 잘도 먹는다. 나에게는 된장을 듬뿍 묻힌 톡 쏘는 맵디매운 풋고추가 더 맛있었다. 산에 오를 때는 배가 고파도 참고 견뎌야 한다. 부른 배로는 걷기가 거북하고 힘들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른 다음 점심을 먹어야하지만 아내의 먹고 가자는 공세를 피할 수 없었는데 먹고 나자 힘도 생기고 걸을 만했다. 칠부 능선쯤에 대피소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는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가 진동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상왕봉에 돌탑을 세우기 위해서 자재를 운반하는 중이라고 했다.

배낭에 든 물병의 물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흐르는 땀은 점점 많아져 갔다. 바위 틈새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자 어느새 능선에 도착했다. 전망이 훤히 트이고 사방이 시원스레 보였다. 화엄 종찰 해인사를 중심으로 부근의 암자들이 눈 아래 들어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아래 세워진 가람이다. 경사진 능선에 맞춰 축대를 쌓고 중심축선을 가운데로 많은 건물들을 배치했다. 해인이란 경전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海) 비치는(印)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솔한 세계가 바쁜 현대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깨달음의 모습이요, 아집을 털어 버린 참된 자아의 발견이라고 믿는다.

아내는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빨리 오라고 소리쳐 보았지만 거친 숨소리만 토해 낼뿐 막무가내다. 내려다보이는 지족암 일대에서는 뿌연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송화 가루가 흙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소용돌이 골바람에 휘날리는 소나무 꽃가루가 새 생명의 잉태를 약속한 듯 해인사 주변을 온통 뒤덮는가(?) 했더니 어느새 다시 가라앉았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우측의 거대한 암벽에 대고 큰 소리로 와이프의 이름을 외쳤다. 뒤따라오던 아내가 보이지 않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화순아! 꽃순아!"

그런데 바위벽에 부딪힌 소리가 메아리치며 다시 돌아왔다. 꽃 화자 꽃 순이의 대답이 희미하지만 메아리로 들려왔다.

"꽃순아!"

"예이~이."

숨을 헐떡거리며 용쓰듯 올라오는 아내의 모습이 산 아래 저만치에서 조그맣게 보였다. 힘쓰고 있을 꽃순이가 안타까웠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원래 등산이란 심판이 없는 자신과의 나 홀로 게임이기 때문이다.

올라왔던 길은 동네 뒷산 같은 육산이었지만 능선 길에서부터는 지나갈 산의 봉들 모두가 바위들로 기기묘묘한 모습이 천하절경이다. 커다란 바위 옆으로 만든 철계단 길로 들어서자 이정표에는 상왕봉이 0.1㎞라고 쓰여 있어서 다 온 듯 안심이 되었다.

붉은 색 글씨의 '낙석 주의'(Danger!)를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위를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20m쯤 수직으로 포개진 바위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이다.

사다리 길을 턱걸이 하듯이 올라서자 이번에는 굵은 동아줄이 길게 놓여 있었다. 숨이 차고 땀이 흘러 내려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다. 밧줄에 의지한 채 올라섰더니 이번에는 더 좁은 폭의 철계단이 앞을 막고 있었다. 한 단씩 발을 옮기며 양팔로 난간을 잡아당기면서 올랐다. 손만으로는 힘이 들어 무릎으로 기면서 오르기도 잠깐 다시 턱걸이하듯 천천히 걸 수밖에…

드디어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는 꼭대기 상왕봉(1,430m)! 작은 칠판 같은 패널에는 상왕봉의 표시와 함께 가야산 명소 자랑이 사진과 함께 붙여 있었다. 산 바로 아래는 경북 성주이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경남 합천이다. 멀리 북서쪽으로 장대한 덕유산이 희미한 모습으로 뽀얀 능선으로 보여주는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둥 마는 둥 답답하기만 하다.

상왕봉에서 10여 미터쯤 떨어진 곳의 바위는 깨지고 부셔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자세히 보았더니 최근에 깨진 모습이 분명했다. 아마도 벼락을 맞은 듯싶다. 위쪽에서 떨어진 돌이 흉하게 파손되어 보기가 사나웠다. 올라 왔던 길을 내려다보니 꽃순이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 무리했다가는 발병이 나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절 집들이 올망졸망하게 지붕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친절한 이웃들의 속삭임처럼 다정스럽게 보였다.

골의 깊은 곳에 자리한 해인사는 험난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삼재(火, 水, 風) 피한 곳에 위치한 행주형의 명당 터를 잡았다. 산(山) 자체의 격조와 품위로 본다면 예로부터 최상의 산이라 하겠다.

"산형은 천하에 절승하고, 지덕은 해동에서 제일이다."

이렇게 부르는데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임진왜란과 6·25를 겪으면서도 피해가 없기로는 이곳의 가야산(1천430m) 아래의 해인사가 으뜸이다. 상왕봉 정상은 거대한 바위들로 된 돌덩어리인데 신기하게도 구덩이가 둥그렇게 파진 곳에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월출산의 구정봉보다 조금 더 컸다. 고여 있는 물의 양이 제법 많았다.

물속에는 청색과 붉은 반점이 있는 산개구리 한 쌍이 짝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등에 올라탄 수컷 개구리 몸집이 훨씬 작아 보였지만 두 개의 앞발로 암컷을 힘껏 포옹한 모습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으나 짝 짓기에 넋이 나간 그들은 붙어 있는 그대로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꽃순이는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 혼자서 동쪽에 있는 가야산의 제일봉인 칠불봉(1,433m)에 오르기로 맘먹고 상왕봉에서 내려왔다. 두 봉의 중간 지점에는 '가야산 8'이라는 위치 표시와 함께 119구조 요청지점(1천380m)이 선명했다. 칠불봉에 오르는 산길은 좁고 어려운 난코스이다. 사다리와 밧줄이 연속된 험한 길이었다. 한 발짝만 실수하더라도 염라대왕 행이다. 커다란 바위를 돌아서자 드디어 정상!

길쭉한 돌에 아래로 내려쓴 칠불봉에는 검은 색이 칠해 있었고 가야산 정상 1천433m가 분명했다. 비석의 뒷면에는 위치가 쓰여 있다.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山162번지' 힘든 일정에 어렵사리 올라온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비석을 껴안고 세 바퀴나 돌면서 남쪽으로 왔을 때는 “경상남도” 라고 외쳤고 북쪽에 섰을 때는 "경상북도"라고 소리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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