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13. 어머니의 산 지리산(6)
2010년 01월 25일 00시 0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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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 이인로 최초 기록 정감록 등에 언급
동학 은신처·의병 활동 무대 기구한 변천사
"청학동의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데
남쪽에는 석문이 있고
위쪽에는 신선바위가 있다.
그곳은 찾기 어렵다
높은 골짜기에 숨어있는데도
산중에서 가장 늦게
서리가 내리는 곳이다"
청학동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로 하얀색의 옷을 입는다. 한복차림의 처녀, 총각들은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로 묶었다. 남자 어른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 어른들은 쪽을 진 머리로 전통모습 그대로다. 타임머신을 타고 지나온 조선시대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청학서당(훈장 김봉곤)에서 재래식 방식으로 교육을 받는다. 시골훈장인 그는 TV스타이다. 약방의 감초처럼 그의 출연을 기다리는 방송국이 있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학동으로 삼신봉 남쪽해발 850m의 높은 산중으로 일반인의 발길이 뜸한 곳이 청학동이다. 일반국도에서 협곡을 따라 22㎞를 들어가야 동네가 보이는 깊고 깊은 오지중의 오지이다.
이곳은 일찍이 무학선사가 계곡의 물과 산수의 아름다움에 별이 응하는 곳이라고 했으며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유운룡은 넓게 펼쳐진 청학동 뒤뜰을 보고 감탄했다. 들판의 1천보쯤은 식량이 나와 살만한 곳이고 골짜기에서는 물이 그칠 날이 없다고 했다. 고려 때는 선인 청련 거사가 세상을 등지고 혼자서 20년을 살았다는 곳이다. 신선처럼 유유자적하며 편안한 삶을 영위했다.
청학동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때는 지금부터 250여 년 전의 일이다. 쌀과 보리 등 곡식 농사와 고랭지채소 및 산나물을 재배하고 사슴을 기르며 토종 꿀벌을 치며 꿀과 약초를 내다팔아 이곳을 지켜왔다. 이들의 모습은 어디서 보아도 유별나다. 청학동 도인 촌 모두가 그런 차림새다. 요즈음은 입지 않은 한복과 댕기머리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그곳에도 최근에는 국립공원의 강화된 규제로 산채와 약초채취가 예전만큼 쉽지 않다고 한다. 청학동 주민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청학동민에게 보내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반갑잖게 여긴다. 청학동 사람들은 오로지 한복에 댕기머리를 늘어뜨려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 올가미에 스스로를 옭아 맺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젠 지식정보화의 시대로 변해가면서 초등학교도 가지 않고 서당의 한문교육만 받았던 청학동 아이들도 중·고등학교에 다닌다. 댕기머리만 고집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외지 학교로 다닐 때는 긴 머리를 자르고 현실과 타협한다. 첩첩산중의 세상과 단절된 곳이 결코 아니다. 시절이 많이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동네 어른들은 아직도 머리카락을 보배로 여겨오며 여전히 긴 머리를 자랑한다. 불편하고 딱하다는 느낌이 먼저다.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유토피아로서 천국이라는 청학동은 어디에 있을까? 청학동이 있다는 장소와 그에 관한 비결은 너무 많다. '정감록'이나 '무학선사 청학동결'에서도 청학동이 언급되었다. '옥룡자 청학동결' '옥계일지' '겸암선생일기' '일승지 청학비결' 등 수십 가지가 된다. 이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하다.
청학동의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데 남쪽에는 석문(石門)이 있고 위쪽에는 신선바위가 있다. 그 주변이 사십 리나 된다. 그곳은 찾기가 어렵다. 높은 골짜기에 숨어있는데도 산중에서 가장 늦게 서리가 내리는 곳이다. 밭 한마지기에 다섯 섬의 소출이 난다. 그곳에 들어가서 십년이 넘으면 벼락이 치면서 석문이 깨지고 이십년이 지나면 쌍두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큰 길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삼십년이 지나면 재상과 장군이 속출할 것이라고 했다.
이곳의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의 모습은 여느 곳과는 다르게 유별나고 특이한 모습이다. 산속에 몸을 숨기면 골이 길고 끝이 막혀있는 곳이라서 죄를 짓고 도망쳐온 자들이 숨어들어 도둑으로 살아간다면 다시 찾아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구름 위를 떠도는 신선들이 산다는 도인 촌에는 신선이 가득했으나 조선시대 중엽부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갔다. 떠돌다 숨어든 자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도적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이다. 고고한 학이 사는 곳으로서 한적하고 여여한 땅이 아니라 범죄인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도둑이 살면 도둑놈의 촌이 되고 만다.
은둔해 있던 자들은 후천개벽을 믿고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무리들과 활빈당을 자처하는 빈손으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무조건 들이밀며 주변을 소란하게 하고 어른 노릇을 했다.
청학동의 변천사는 기구하다. 갑오농민혁명에는 관군에 쫓긴 동학잔당의 은신처였다. 한일합방이후에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의병의 활동무대로 변했다. 한국전쟁이후에는 빨치산의 총본부가 되어 지리산과 주변마을에 비극의 참화를 불러들였다. 산속 깊은 곳이라 주류에서 밀린 자나 숨어살아야 할 자들이 활개를 치기에 알맞아 예기치 못한 엉뚱한 소굴로 변화시켰다.
밤과 낮이 바뀔 때마다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가슴속 상처는 피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다. 도인촌 청학동이 걸어온 피로 얼룩진 역사의 단면이다. 지리산청학동은 패배자들이 은근슬쩍 파고든 회한의 장소였다. 새로운 종교지도자나 미, 소의 냉전기류 사이에서 민족의 갈 길을 찾아 헤매던 자들이 재판을 피해 몸을 낮추며 숨죽이고 연명하던 곳이었다.
지리산 청학동이 최초로 기록되어 남겨진 것은 고려 시대 이인로였다. 옛날 노인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고 했다. 그곳은 길이 매우 좁아 겨우 사람들이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린 채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곳이 있는데 그곳이 청학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서는 사방이 터진 비옥한 옥토로 곡식을 뿌리면 넉넉한 알곡이 생산된다고 믿었다.
그곳은 오직 푸른색의 청학만이 사는 곳이다. 청학동이란 이름은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체로 세상을 피해 살던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으로 무너진 담과 구덩이가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쌓여있다.
조선의 명리학자 김일손은 지리산을 다녀온 후(1489년) 이렇게 말했다. 불일평전은 청학동이 있는 곳으로 경남 하동의 쌍계사 위쪽이라고 했다. 그곳은 계곡이 험해서 짐승이 아니고서는 찾아가기 어려운 위험한 길이라고 했다. 가솔이 함께 어울려 살기 어렵고 가축도 기를 곳이 못된다고 했다.
지리산이 좋아 자신의 집도 천왕봉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지었던 남명 조식은 산의 남쪽 불일암 부근을 청학동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남겨둔 각각의 문헌에서 자신의 주장만 했을 뿐 일치된 장소가 명확하게 지적되어있지 않다.
사진/ 청학동은 행정구역상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학동으로, 삼신봉 남쪽해발 850m의 높은 산중에 위치해 일반인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사진은 지리산 삼신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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