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18.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4)
2010년 03월 29일 00시 0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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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시조 탄생시킨 산신 정견모주 전설
성철 스님 정진했던 백련암 '한폭의 동양화'
가야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온 산을 적시며 개천을 만들며 합천댐으로 모여서 황강이 되고 강물은 흘러 유장한 낙동강을 이루면서 고대국가 가야의 설화를 칠불봉이 간직하고 있었다.
해동 팔경이며 영남의 영산인 칠불봉에는 옛날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정견모주는 천신에 감응되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멀리 떨어진 상왕봉 아래에서 모자를 흔들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꽃순이 각시야, 빨리 오그라.”
두 손을 입에 모아 힘껏 소리를 질렀더니 더 빨리 모자를 흔들던 그녀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칠불봉 옆에서 날아오른 까마귀 한 쌍이 높이 오르는가? 했더니 갑자기 아래로 돌며 땅으로 떨어질 듯하다 다시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이었다. 주둥이를 마주대고 나는 날개 짓이 일상의 공중 비행이 아니었다. 짝 짓기의 계절에 알을 품기 위한 혼인 비행으로 암컷을 찾는 수컷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온 산을 진동했다.
“까옥 까옥”
숨을 헐떡거리며 쫓아 온 꽃순이와 마주 앉은 둘이는 한참이 지나자 흐르던 땀이 멎고 시원한 입하의 바람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가야산의 모든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백련암의 마당이 조그맣게 보였다. 자고로 가야산의 제일 경승지로 불리어지는 곳에 자리한 백련암은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기이한 바위와 탁 트인 전망이 자랑으로 많은 고승들이 수도 정진했던 곳이다. 역대 해인사의 제일 어른들이 주석해 왔으며 최근에는 무소유의 수행자 성철 큰스님이 용맹 정진했던 곳을 내려다보니 울렁거리던 내 가슴에 시조 한편이 떠올랐다.
해인 삼매 너른 곳에 우뚝 솟은 칠불봉
무얼 보고 웃으며 무얼 보고 즐겨할까?
세상을 굽어보며 가야천지 세심洗心이라
홍류계곡 맑은 물에 가슴을 안아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우주 속에서 탑돌이 한다.
찾는 이의 영혼을 적셔주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선한 사람끼리 마음을 나누리라
휘파람새 울더니 넓은 바다로 날았다.
지혜로 어둠을 이기고 가야산에 올라
유유한 황 강 심지에 빈 가슴 띄워보리.
모처럼 꽃순이와 함께한 산행에서 아집과 욕심으로 가득 찬 가슴을 비우고 해인의 빈 배를 타고 싶었다. 우리가 고행하며 깨달아 실천해야할 무소유! 이 세상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진리인데 무엇을 그리 가지려고 집착해 왔을까? 그런데도 좀 더 많이 가지려고 시기하고 빼앗고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거친 현실 속에서 가장 시급한 화두는 ‘무소유의 실천’이라고 믿는다.
패배주의도 자포자기도 아니고 오직 세상을 밝혀주는 기준의 가름자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산 길에는 능선 갈림길에서 극락골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다. 마애불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마애석불(보물 제222호)은 능선 길에서 내려가는 가야산의 중턱에 있었다. 높이만도 7m나 되는 바위에 불신이 양각되어 입체감이 살아있고 장중한 느낌이 우러났다. 걸친 가사의 옷 주름이 실바람만 불어도 흔들릴 듯 세밀한 묘사가 꼼꼼하고 멀리 보는 석불의 시선 속에는 인자함이 넘쳤다.
대적광전의 지붕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 왔을 때 계곡을 건너야 하는 근처에는 요즈음 보기 드문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어서 의아심이 들었다. 아직까지 외나무다리의 역사적 고증이나 기록은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조선시대에 승유 억불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하던 시절에 양반들이나 지역의 세도가들이 법당 앞까지 말을 타고 오는 등 그 행패가 심하므로 그런 일을 막기 위하여 말이나 소가 건널 수 없는 외나무다리를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유래야 어떻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에 놓인 외나무다리는 그 풍치만큼은 아름다웠다. 타임머신을 타고 먼 시간 여행을 한 듯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아무튼 해인사의 명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마음 틈새에 낀 잡티까지도 개운하게 해주는 물 따라 한 줄로 늘어선 산문의 첫발은 일주문에서 시작한다. 일주문 정면에 걸친 현판 글씨 ‘가야산 해인사(伽倻山 海印寺)’는 근대 서예의 대가이신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올려주는 듯하다. 자를 대고 줄로 그은 듯 반듯한 일주문 앞의 길 양편에 늘어선 나무들이 신록을 자랑하고 있었다.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주변을 더 돋보이게 한다. 봉황문(천왕문)과 해탈문(불이문), 구광루(보장전), 대적광전이 한 줄로 반듯하게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배치가 정결하고 아담했다.
사찰서점에 들러 사진첩 1매를 사서 배낭에 넣었더니 내가 찍은 사진 마냥 기분이 가뿐해지며 즐거움이 넘쳤다. 약수암 입구의 황토 길에 비구니 스님 3명이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정갈하고 깨끗해 보였다. 살짝 눌러 쓴 밀짚모자가 연한 피부를 보호해 주리라 믿었다.
일주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죽어버린 늙은 나무가 영화롭던 옛 시절을 자랑하듯 쓸쓸한 모습으로 앙상한 가지가 말라버린 몸통을 드러내고 서있었다. 이 나무는 신라 제40대 애장왕의 왕후가 병고에 시달리자 스님의 독실한 기도로 난치병이 치료되었다. 왕은 그 은혜에 보답코자 법당과 승료 등을 내려 가람을 헌공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그 때 기념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진다.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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