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12. 어머니의 산 지리산(5)
2010년 01월 18일 00시 0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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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요새인 운봉, 고려말 황산대첩비 건립으로 형성
교류 제한된 탓에 미풍양속 유지되고 주민 생활 여유
운봉을 지키는 길은 양쪽의 두 재만 지키면 안심이다. 해발평균이 450m인 이곳은 서울의 남산 두 배 높이로 하늘의 천연요새다. 근세의 동학농민전쟁은 물론 해방 후 빨치산전투에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고 고려 말 남해안에서 날뛰던 왜구도 운봉에 들어와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운봉장터를 지나면 왼쪽으로 황산대첩비가 서있다. 이성계가 젊은 장군 시절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곳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황산 대첩비를 세웠다. 운봉의 비전마을은 황산대첩을 기리는 비석이 들어서면서 그 덕분에 생긴 마을이다.
선조 1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리는 비를 세우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참봉과 관리를 유숙하게 했다. 그때 생긴 비전마을은 남원까지 40리 길이고 함양이 60리 길이다. 100리 길을 하루에 걸 수없는 터라 비전마을에는 일찍부터 원이 있었다고 한다.
원은 오늘날의 여관과 같은 곳으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들끓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해준 가마꾼이나 기생, 소리꾼들이 모여들어 흥청이던 모습은 한말을 지나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비전마을에는 나이 먹은 고목이 즐비하다. 비를 세우면서 인근에 있는 숲을 보호했던 까닭에 아름드리나무가 지금도 하늘을 찌른다.
일본의 침략사를 말해주는 눈에 가시 같았던 비는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으나 다시 복원해 놓은 것이다. 말 못하는 돌비가 무슨 죄가 있다고 부셔버렸을까? 하긴 자신들의 폐전을 기록한 비석을 두고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괘씸한 일본의 심보가 비석을 부셔버린 것이다. 산산조각난 돌덩이를 주워 모아 다시 쌓고 비를 세웠으니 듣도 보도 못했던 파비각(破碑閣)인 것이다.
운봉지역은 고랭지 기후를 제외한 모든 조건이 피난과 보신의 땅으로 적당하다. 세상의 온갖 번뇌를 잊고 유유자적하며 살아가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땅이다. 십승지의 한곳이 운봉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란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운봉은 산물이 풍부하고 먹거리가 풍부해서 이웃 간의 인심이 후덕하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지극히 제한되어있다. 몹쓸 단점이 지금은 장점으로 돌아왔다. 불편했던 교통로 덕분에 미풍양속이 살아남았고 주민들의 생활은 더없이 여유 있고 편안해졌다.
운봉에서 외부로 나가는 길은 동쪽의 팔랑치를 통해서 경남 함양, 거창과 대구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여원치를 통해서 전주, 광주로 연결된다. 주로 남원을 중심으로 생활권이 이룩되어있다. 88고속도로가 운봉근처를 지나간다.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이나 일부 산업 생산물의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운봉의 발전 잠재력은 엄청나게 크다.
십승지로 지목되고 있는 운봉은 지리와 자연환경, 산업, 교통, 생활과 풍속이 지리산이라는 광대 무비한 산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지리산은 산세가 웅대하고 커서 높으며 골이 깊다. 그래서 당연히 물도 좋다. 면적도 넓어서 운봉은 물론 주변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반도 제일의 지리산에는 서기가 서려있고 해로운 독이나 살기가 없어서 수많은 생명이 뿌리를 내린 산이다. 만물의 생명에 이로움을 주고 풍요로워 부족함이 없는 부덕한 산이다.
가난한 민중들은 지리산에 신령스런 기운이 서린 것으로 믿는다. 한반도의 등뼈 같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태백산과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서 끝점을 맺으며 크게 힘을 모은 곳이다.
산세와 지형이 인간의 심신을 순화 포용하는 형세이며 지질이나 수질에 해로운 성분이 없어서 인자한 것이 지리산이다. 우주 만물에는 기가 존재하며 이들은 상호 간에 영향을 끼친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동기감응이란 이런 것으로 최근에는 학문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의 세계를 과학화 계량화하고 있으며 지맥이나 정기의 흐름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십승지 운봉의 미래는 밝다.
거대한 산이 우리들을 규정지어준다. 산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이 없다고 했다. 산을 이용하고 정복하기보다는 함께하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사상으로 대한다면 승지로서 운봉이 가깝게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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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춰버린 지상낙원 청학동
잡다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맘 편하게 살만한 곳은 어디일까? 실제로 그런 곳이 정말로 존재할까? 신라멸망이후 무릉도원을 찾는 선비들 속에 잊히지 못하고 전해오면서 지금까지 전설처럼 남아있는 이상형으로는 지리산 남쪽의 양지바른 곳에 청학동이 있다. 파란색의 학이 날개 짓하는 청학동(靑鶴洞)을 찾아 그곳으로 떠나가 보자.
지금도 기다란 댕기머리에 조선시대의 복장을 입고 사는 그들의 생활은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 형이다. 그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며 유불선합일경정유도(儒彿仙合一更正儒道)를 믿고 치성제와 대제를 올리며 정감록의 전설을 바이블삼아 살아가고 있다. 특이한 종교는 그들만의 의식이다.
청학동의 전설을 철석같이 믿고 비약시켜가며 후세에는 반드시 선인이 나타나 지상낙원의 수도가 청학동이 될 것이라고 믿어오는 이들이다. 청학동은 거룩하고 위대한 영지이며 꿈과 철학이 담겨진 이상형이라고 굳게 믿는다.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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