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5. 길지에 입지한 천년고찰 마곡사(下)
2009년 11월 02일 00시 00분 입력
|
김구 선생, 몸 숨긴 사실로 더 유명세
인심·문화유적과 어울려 경치 이상적
"절을 휘감아 흐르는 잔잔한 물길이 태극무늬 그리며 절 중앙을 흘러"
계룡산의 남쪽 신도안에 궁궐을 짓다 그만둔 주춧돌이 허위가 아니며 정여립 역모사건(1592년)의 뿌리가 계룡산에서 모악산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부터 유포된 설과 민담수준의 이야기 꺼리에 불과한 것으로서 과학적 논리적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계룡산(해발 854m)은 원래 차령산맥의 한 자락이지만 산의 북쪽에서 동과 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강으로 인해 별개의 독립된 산으로 이루어졌다. 석영반암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금강물의 침식작용에도 살아남아 침식잔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덕분에 산의 모양이 수려하고 골까지 깊어서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많고 또 맑다. 계룡산은 풍수지리가나 무속인, 신흥종교인, 소위 말하는 도사라는 사람들이 산을 점령하고 성스러운 산의 위력을 믿어왔다.
산은 크지만 산속에는 적당한 넓이의 평지국면이 부족하다. 한나라의 수도 처로는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동남쪽으로 넓게 트이지 않아 궁성이 자리하기에는 면적이 좁다. 그러나 내맥이 멀고 골은 깊어 정기의 기운은 세다고 하겠다. 다만 서북쪽의 골은 더 깊어서 물고임이 수려하고 깊다.
계룡산과 공주의 마곡, 유구지역의 마곡사가 있는 곳은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체로 완만하고 평지가 많아 험악한 산보다는 200~300m정도의 완만한 구릉성이다.
계룡산을 두고 중앙을 동서로 흐르는 금강과 그 지류주변을 중심으로 드넓은 평야가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식량창고라 하겠다. 이러한 지역의 특징은 풍족한 산물과 더불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생활도 안정적이라 넉넉한 인심과 풍속이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도 후한 인심과 느린 말투에서 풍겨오는 여유는 예절과 문화의 고장임을 자랑한다.
예로부터 춘 마곡(春 麻谷) 추 갑사(秋 甲寺)라는 말이 전해오듯 이른 봄에 찾아가는 마곡사는 환상적인 봄을 맞이할 수 있다. 여기저기 피어오른 꽃이 화사하고 처처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요즈음에는 마곡사가 백범 김구 선생이 승려로 가장하고 이 절에서 숨어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유명세를 탔다. 명성왕후를 살해한 자객을 죽이고 감옥에 갇힌 백범이 탈옥한 후 잠시 이곳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그때 선생이 심었던 향나무 한 그루가 극락교를 건넌 곳에서 지금도 자라고 있었다.
명당중의 명당이라는 절터에 입지한 마곡사는 여느 절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눈에 보인다. 계곡물이 절 가운데를 태극처럼 휘돌며 흐르는 것이다. 상원골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중심으로 대가람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있다.
절의 제일위로 올라가면 대웅보전이다. 밖에서 보면 2층처럼 보이지만 팔작집형태의 단층건물이다. 둥그런 싸리나무 기둥이 중심을 받쳐주는 일층공간이 드높고 환해서 웅장하게 보인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가게 되는데 염라대왕이 꼭 물어보는 말이 있다.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 돌았느냐?"
이때 기둥을 돈 횟수에 따라 극락행과 지옥행이 결정된다. 많이 돌았다고 하면 극락길에 가까워지고 기둥을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그래서 그런지 마곡사 대웅보전의 싸리나무기둥에는 손때가 많이 묻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피난과 보신의 땅, 정씨 왕조의 800년 도읍지 등 갖가지 비전으로 이름 높은 계룡산과 수많은 사찰 중 가장 좋은 자리를 잡은 마곡사는 분명히 명당자리에 입지한 곳이다. 들어앉은 장소가 산물과 인심, 문화유적과 어울려 빼어난 경치가 매우 이상적이다.
지금은 삼군본부가 들어서서 한국의 군권을 통솔하는 계룡대가 들어섰다. 마곡사는 풍수 지리적 측면에서 장풍 득수의 지형이 만족하고 인심 좋은 사람들이 살기에 맞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속세의 다툼을 피하는 것이고 좋지 못한 땅은 피해가야 한다. 물욕과 출세욕을 버리고 유유자적하는 지식인은 자연에 파묻혀 자연과 함께 사는 여유를 필요로 한다.
끝이 없는 명예욕에 일생을 망치고 마는 자들이 많은 작금의 세태 속에 조선선비의 청빈을 배워야 한다. 빈곤하고 불편하더라도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소박한 삶은 마곡사의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부터 들어보아야 한다.
공주의 마곡천과 유구천 사이는 그 둘레가 2백리나 된다고 했다. 서얼이 차지할 땅이 마곡이라고 했다. 첩의 아들이 서얼이지만 오늘날은 이미 없어지고 만 옛말이 되었다. 다섯 장군과 여덟 재상이 나온다는 예언이 혹하는 마음을 뒤흔든다. 만약에 수염 없는 자가 나타나서 설치면 얼자는 모두 죽고 만다.
수염이 없는 자는 일부에서는 승려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힘없는 보통사람들이다. 조선중기이후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마다 서러운 눈물을 흘렸던 이들은 농민과 일반대중들로 정감록의 비결은 그러한 점을 경계하라는 의미라고 하겠다.
원래 십승지는 역성혁명의 역군들이 중앙정부의 눈총을 피해 가족을 거느리고 숨어살며 때를 기다리던 은거지였다. 기회를 노리며 숨어 지낸 자들은 주로 사대부 집안의 서얼자와 식량을 생산해 낼 땅 한 평이 없는 굶주린 농민, 억울한 죄명으로 쫓기는 죄인, 그리고 도망쳐 나온 노비들이 대부분으로 주류를 이루었다.
|
조선 말기에는 나라를 망치는 폐단으로 충청도 명문대가의 양반들로 당파싸움에 낀 자들이 골치 거리였다. 당시 대원군이나 민비 일당도 당파싸움이나 거드름을 피우는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밖에 나가서는 볼가진 배를 내밀어 쓰다듬으면서 집안에서는 배다른 서얼을 깡그리 짓밟고 무시했다. 정감록은 그들을 위해서라도 마곡을 지정해서 특별한 십승지로 마련한 것이다.
공주의 무산성은 토산이다. 산세가 부드럽고 순해서 억함이 없다. 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서 긴 골짜기가 많고 기름진 논밭이 많이 있다. 유구마을과 마곡사 사이에는 경치가 어울리고 들이 넓어 충분한 피난처가 된다. 평시나 난세에도 살기 좋은 고장이 마곡 일대라고 했다.
마곡천 상류의 깊은 골짜기를 삼심마곡이라 부르며 좋은 땅이라고 했다. 이 지역은 간곳마다 명당이라지만 특히 마곡사 터가 이름난 곳이다. 절을 휘감아 흐르는 잔잔한 물길이 태극무늬를 그리면서 절의 중앙을 흐른다. 이런 곳이 수태극의 길지다.
사찰의 뒷산은 수백 년 동안 가꿔온 소나무로 울창하다. 부드러운 흙길로 만들어진 산림욕장의 황토 길에 등산화 밟히는 느낌이 순하다. 송림욕장 길이 등산로다. 짙은 솔 냄새가 심신을 가다듬게 해준다. 옹달샘은 그칠 줄을 모른다. 우거진 소나무 뿌리가 생명수 샘터를 항상 적셔주기 때문이다.
마곡사는 풍수 지리적으로 연화 부수형의 자리이다. 절 뒤편 국사봉과 서쪽의 옥녀봉, 동쪽 무성산의 세 봉우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가람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졌다.
북원에는 대광보전과 대웅보전 응진전, 심검당, 5층 석탑이 있는 교화의 지역이다. 남쪽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흥성루, 매화당, 수선사 등의 선승들의 따뜻한 수행 자리로 이곳 지역에서는 제일가는 대가람이라 하겠다.
한국의 모든 사찰 중에 가장 좋은 자리에 입지한 마곡사가 있어서 계룡산이 더욱 더 빛을 내준다. 정도령을 기다리는 계룡산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산이 있어서 내가 있다.
사진/ 명당중의 명당이라는 절터에 입지한 마곡사는 상원골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중심으로 대가람이 남과 북으로 나뉘는 등 여느 절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눈에 보인다. 사진은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곡사의 모습
무등일보
'풍수지리.명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하늘도 울어버린 처절한 청령포(2) (0) | 2011.04.18 |
---|---|
6.하늘도 울어버린 처절한 청령포 (0) | 2011.04.18 |
4.길지에 입지한 천년고찰 마곡사(上) (0) | 2011.04.18 |
3.상원암과 동학사 (0) | 2011.04.18 |
2.천황봉을 시민의 품으로 (0) | 2011.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