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3.상원암과 동학사
2009년 10월 05일 00시 00분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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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아름다움 가득
내마음 찾는 순례의길
시간 흐르듯 세월 여행
조심조심 겨우겨우 도착한 상원암!
이곳은 청량사지로 짝을 이룬 칠층(보물 1285호)과 오층(보물 1284호)석탑이 마주보며 나란히 서 있었다. 울창한 숲 사이에 쌓인 석탑위로 쏟아지는 달빛을 즐기는 것이 계룡 8경인 ‘오뉘 탑 명월’ 이라지만 없는 달이 대수더냐 더 밝은 태양이 있어서 안심이다.
눈 쌓인 나무 가지 사이로 곧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옷깃을 여미며 우리들의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쌍 탑 앞에는 정한모 시인의 시가 게을러지기 쉬운 우리들의 생활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하나 될 새날을 열고자 나눌 수 없는 한 몸
나눌 수 없는 한 마음, 하늘이시여!
이제는 하나로 이루게 하소서 우리의 발돋움
하늘에 닿았으니 우리의 마음 돋움 하늘에 맞닿았나니.
7층탑은 탑에 낀 이끼와 돌 버섯으로 억겁의 세월이 흐른 듯 지나간 세월 속 여행을 하게 했으며 뒤쪽에 서 있는 오층탑은 기단 부를 제외한 층수가 4층이어서 몇 차례고 다시 층수를 헤아려 보아도 4층뿐이다. 없어진 한 층을 속히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탑 위쪽의 상륜부 옥개석 부분이 자국이 안 맞아 굼뜨고 엉성해서 사납게 보였다.
석탑이 있는 작은 공간은 지친 마음을 씻어주는 마당으로 그윽한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계룡산의 하늘과 숲이 남매 탑과 어우러져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지혜의 눈으로 열어주는 곳이었다. 청신한 바람이 소나무가지를 흔들어대는 이곳은 편안한 마음자리였다. 눈 쌓인 계룡산은 비록 지치고 힘들게 했지만 내 마음을 찾아주는 순례의 길이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고승 상원대사(신라 23대 성덕왕 15년, 716년)가 국내의 모든 명승지를 찾아 헤맨 끝에 동학사 남매 탑 터에 자리 잡아 암자를 짓고 용맹 정진하며 정심(正心)으로 수도하던 어느 날 어둡고 깊은 저녁에 큰 호랑이가 문 앞에 나타나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대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호랑이의 목에 커다란 가시가 걸려 있지 않은가!
조심해서 목에 걸린 뼈를 꺼내주었더니 호랑이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수일 후 어두운 밤에 다시 나타난 호랑이는 자신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잡은 산돼지를 보답하듯 문 앞에 두고 가려고 했다. 이를 본 대사는 수도하는 청정한 도량에 부정한 고깃덩이는 안 된다며 크게 꾸짖었다.
"요사스런 호랭이 이놈아! 본심(本心)을 찾는 도량에서 무시기 고기란 말이냐?"
말귀를 알아차린 호랑이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기를 다시 물고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어느 날 새벽, 방문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에 놀란 대사가 나가보니 호랑이 녀석이 예쁜 처녀를 업어다 놓고 가버린 다음이었다.
우선 소녀를 회생시킨 다음 연유를 알아본 즉 소녀는 본시 경상도 상주읍 김화공의 딸로 집안에서 달구경하던 중 별안간 달려든 범에 물린 기억뿐이라고 했다.
젊고 예쁜 아가씨와 함께 한겨울을 지내게 된 상원대사!
그는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 오로지 불도에 귀의했던 것이다. 이에 놀란 처녀도 행복을 버리고 불교에 입문함으로서 자신을 지켜갔다.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설픈 이야기지만 힘든 산행 길에서 만난 참신한 이야기라 하겠다.
결국 대사와 처녀는 남남으로 만났지만 ‘의남매’를 맺고 불도에 정진하여 많은 제자들을 남겼다고 한다. 탐욕을 버리고 진리를 찾았으니 전혀 다른 남과 녀의 관계설정으로 남매가 되었다. 이들이 함께 죽은 후 서광이 3일 동안이나 상원암에 비쳤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이 현존하는 지금의 두 탑을 세웠으니 현재까지 남매 탑으로 불리며 전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만난 성인 남녀가 한집에 살면서 오직 불교에 정진했다함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겠지만 여태까지 전해져 오는 두 탑에 얽힌 전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어렵사리 도착한 동학천, 물 흐르는 소리가 지친 몸을 일깨워주며 힘이 나게 해준다. 흐르는 물은 유성천을 지나 내륙에서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는 대전의 중심부를 씻어내는 갑천甲川과 만나 금강으로 흘러 갈 것이다.
계룡산의 여러 봉들과 계곡사이의 동쪽에 위치한 동학사는 너무나 유명한 사찰로 이곳은 비구니들만이 모여 수도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동학사의 승가대학은 전국의 비구니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필수 코스이며 불교 강원으로도 유명하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 23년 상원조사의 발원으로 회의화상이 창건했으며 고려 초기 월출산의 도선 국사가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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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는 숙모전, 삼은각 등 청아한 불각과 3층 석탑, 부도 등이 있으며 부속암자로 문수암, 길상암, 미타암이 있다고 한다. 특히 대웅전 전면의 7개의 큰문에 새겨진 나무문살은 섬세하고 정교한 솜씨가 일품이다.
대웅전 뒤편의 삼성각(문화재자료 57호 : 충남 반포면 학봉리)은 소담한 기와지붕으로 아담하게 보였다. 실내에서는 4명의 비구니들이 정성스레 공양을 드리면서 불경을 외우고 있었는데 정갈하게 깎아버린 머리에서는 푸른빛의 윤이 나고 있었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예불을 드리는지 목탁을 두들기며 함께 드리는 염불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스님의 온 몸을 던진 공양예불에서는 지극 정성이 흘러 넘쳤다.
흔히들 사찰에 들렀더라도 절 집의 기왓장과 스님이 벗어둔 흰 고무신짝만을 보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들은 목탁소리와 염불이 한동안 가슴속에 파고들며 흔적처럼 맴돌았다.
삼성각은 칠성, 산신, 독성을 함께 모신 곳이다. 칠성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 된 것으로 옛날부터 아들을 얻기 위해 치성을 드리던 신神으로 알려져 있다.
산신은 호랑이와 함께 나타나는데 부귀장수와 재액을 막고 복을 주는 우리 민족의 토속 신이며, 독성은 홀로 선정을 닦아 자아[Ego]를 발견해 가는 진리탐구의 과정을 말한다. 결국 삼성각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토착화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도교가 서로 융합되면서 나타난 예불 대상을 모신 곳이라 하겠다.
범종각에는 법고, 범종, 운판과 목어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목어는 크기도 하지만 색깔이 화려하고 붉은 서기가 살아난 듯 장엄했다.
‘목어’란 굵은 원목을 물고기 모양으로 다듬은 다음 배 부분을 파내고 배 안쪽의 양 벽을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잠자지 않고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목어를 두들긴다.
목어의 맑은 소리가 물속까지 전달되면 참선하는 자들은 잠을 쫓고 혼미한 정신 상태를 질책해 준다고 한다. 형태도 처음에는 단순한 물고기였으나 차츰 물고기의 몸을 취한 용두 어신龍頭 漁身의 형태로 변형되어 갔고,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많이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물고기라는 중생이 용이라는 보살로 변화되어 감을 의미하는데 나무를 등에 진 물고기는 마침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용이 되기를 서원한다. 결국 목어는 비감 어린 음성을 토하며 혹업의 중생을 거들어서 불국정토로 인도해준다고 한다.
목어의 주먹만큼 크고 부리부리한 눈을 뒤로한 채 일주문을 벗어났다. 길옆의 전주식당에 들러 비빔밥 한 그릇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밥맛이 꿀맛보다 더 달콤했다. 아침 겸 점심을 이제야 먹으니 맛이 더할 수밖에…
먼 거리의 답사 길은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전개일 뿐이다. 아침 10시에 오르기 시작한 계룡산을 6시간 동안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으나 내가 본 계룡산은 한 부분일 뿐이다. 한반도 남쪽의 중심점에 위치한 계룡이 진정한 신도안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쓸쓸하게 비 내리는 호남선이 아닌 활기차고 패기가 넘치는 고속도로를 향해 서서히 귀가를 서둘렀다.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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