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명리

4.길지에 입지한 천년고찰 마곡사(上)

ngo2002 2011. 4. 18. 09:32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4.길지에 입지한 천년고찰 마곡사(上)


2009년 10월 19일 00시 00분 입력


계룡산에서 공주와 함께 가장 뛰어난 사찰 터라는 마곡사를 빼놓고는 십승지를 말할 수 없다. 사진은 마곡사 전경.
전 국토 불바다 6·25 때도 '병화' 안입어

"정감록·택리지에서 전쟁과 배고픔을 피할 수 있는 안심되는 자리"

공주 마곡천과 유구천 중간지점 자리

피난과 보신의 땅으로 더할 나위없어

정감록이 참위설(讖緯說)의 일종이라면 십승지 설은 풍수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풍수사상은 주로 돌아가신 부모의 묘소를 잡는 음택(陰宅)풍수를 근간으로 명당자리차지하기에 주력했다. 오늘날에도 풍수지리라 함은 조상 묏자리를 명당에 잡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를 기대한다. 음덕의 힘으로 로또 복권에라도 당첨되기를 바라는 우매한 생각에 젖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십승지는 이와는 달리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공간을 결정하는 양기풍수로 보아야한다. 우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을 기본 축으로 확 터진 전망과 함께 산형을 살핀다. 흙의 색깔이 친근해야하며 수리가 있어서 매일 쓰는 물이 편하고 이익이 생겨 부자가 되어야 하며 바닷물에 너무 가깝지 않아야 한다. 조수가 일어나 파도가 치는 곳보다는 강가를 선호했고 계곡물이 있는 곳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기풍수와 음택풍수는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서로 떨어져 따로 따로 발전해온 것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양기풍수도 근본적으로는 음택풍수에서 파생되었다. 결국 양기풍수는 장풍득수의 원리가 음택풍수와 한 뿌리였던 것이다.

당장 집을 짓고 살아가야할 현실을 타파해야했던 점에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양기풍수는 밖으로 드러난 물리적인 현상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더 떨어졌다. 개인이 사는 집보다는 도량이며 수도처인 사찰의 자리는 어떻게 잡았을까?

도선 국사는 이론이 뛰어난 선승으로 나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 혜철(惠哲)의 후계자였다. 도선의 풍수는 사찰 터를 잡는데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나라의 도읍지를 잡는 데까지 힘이 뻗쳤다. 태조 왕건은 도선이 지정한 장소 이외에는 어떤 곳에도 절을 짓지 못하게 했다.

전 국토를 손바닥 안에 넣고 눈금 살피 듯 샅샅이 알고 있던 도선은 사찰건립의 장소를 잡아주었고 그가 점지한 사찰 터는 길지중의 길지였다. 도선사상의 중심은 인간본위의 자연이용을 제일로 보았다.

주변을 허물거나 삽질을 해서 새롭게 고치기를 거부한 것이다. 자연과 산천을 거스르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이용했던 것이다. 근대 서구의 경우처럼 문화가 자연에 상반되거나 구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자연이 도와주고 합일한다는 것이 자연미학의 기본으로 도선의 주장이었다.

명산을 따라 명찰이 자리했지만 어느 한곳이라도 자연을 거스르고 스님만을 위한 사찰 건축물은 어디에도 없다. 지역의 산과 흐르는 물에 따라 자리 잡은 것이 지금까지 전해오는 오늘날 한국의 사찰이다.

도선의 철학은 한국불교와 민간사상사에 던진 화두였고 그가 밝힌 찬란한 빛은 국토산천의 깨달음이었다. 자연 속에서 찾아낸 선(禪)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명당자리를 보려면 굳이 멀리 가볼 필요가 없다.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사찰이 가장 뛰어난 명당자리에 있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계룡산에서 공주와 함께 가장 뛰어난 사찰 터라는 마곡사를 빼놓고는 십승지를 말할 수 없다. 심산유곡의 깊은 골에 자리한 대부분의 사찰이 어디 한곳이라도 명당 터 아닌 곳이 있을까만 마곡사는 특히 정감록이나 택리지에서 전쟁과 배고픔을 피할 수 있는 안심되는 자리라고 말했다.

공주의 마곡천과 유구천의 중간지점에 마곡사가 자리했다.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면 아무도 찾아오지 못할 정도로 꼭꼭 숨어든 땅이 마곡이다. 안전한 피난처요 십승지의 땅이라서 6.25전쟁 때에는 전국토가 불바다가 되었지만 조금도 병화를 입지 않은 곳이 마곡이다.

일단 들어오면 넓게 펼쳐진 들판과 넘치는 물로 논농사나 밭농사가 잘되는 옥토가 집 앞에 있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어떤 땅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마곡사를 찾아가 보아야 한다.

정감록이나 다른 예언서에서도 공주의 유곡읍, 사곡면사이의 일대를 십승지의 땅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공주의 서북쪽에 치우쳐 있으며 북쪽으로는 아산, 천안이고 서쪽으로는 예산에 접해있다. 남으로는 청양이며 동으로 공주와 접해 있는 곳이다.

이곳은 북쪽으로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이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덕유산 일대에서 발원한 금강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북고남저의 지형을 이룬다.

부근의 산들은 높지 않고 작은 봉의 산들이 연이어 있어서 산악지대라 해도 산세가 웅장하거나 험하지 않고 계곡도 깊지 않아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 지역은 작은 산과 풍부한 냇물로 논과 밭이 같이 어울려 적당하게 발달되어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을 이루고 있다. 감결에서는 유구와 마곡 두 물 사이가 200리에 이를 만큼 넓어서 많은 인구가 살만한 곳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인심이 풍성하고 넉넉해서 산과 하천, 들판이 조화롭게 어울려 유토피아의 도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합천가야 지역도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서 국면이 넓지만 이곳만은 못하다. 십승지중에 가장 넓은 곳은 역시 유구, 마곡지역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그래서 양택의 조건이 크고 활달한 편이다.

이곳은 피난과 보신의 땅으로는 더할 나위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주지역에서 십승지로는 계룡산일대도 빼놓지 않는다. 감결이나 다른 예언서에서 계룡산 일대가 명당 터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계룡산에서 개국하면 변씨 정승과 배씨 장수가 일등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과 우가가 수족과 같이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계룡산 남쪽 바깥 네 고을이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전할 곳이라고 했다. 유구와 마곡사이의 물길은 그 사이가 200리에 이르므로 피난할 만한 장소라고 소개했다.

계룡산 밑에 도읍을 할 만한 땅이 있다고 '삼한산림비기'에서 말하고 있다. 태백산 밑에 있는 나라가 왕성해지면서 강국을 세우고 주변의 나라들을 합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금성과 목성을 가진 사람이 서쪽에서 나타나 구기자 나무덤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금빛 나는 뱀을 보더라도 놀라서 잡아 죽이지 말고 그곳에 화려한 궁전을 지으면 천하가 안심되고 나라 안이 오래토록 태평할 것이라고 말했다.

계룡산 주변의 신도안이나 마곡사가 있는 곳은 나라의 치소로서 커다란 자리로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넓은 장소라고 했다. 자잘한 씨족이나 인물이 난을 피할 장소로는 너무 넓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도령이 새롭게 나라를 세우고 통치자로 군림하리라는 말뜻이 강하게 담겨있다. 계룡산은 다른 십승지와는 조금은 다르다. 즉 승지를 넘어 국도로 보아 나라의 도성이 들어설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기존의 집권자들에게는 참으로 위험한 말이었다. 정감록이 금서가 된 빌미를 제공해준 샘이다.

오늘날에도 그 시절의 믿음이 내려오면서 도읍지가 될 것이라는 도참설을 믿고 계룡산의 여기저기에 진을 치고 '나를 따르라'고 주장하는 살아있는 신들의 외침이 무성하다. 계룡산 곳곳에 촛불을 밝히고 징소리를 울리는 자들이 그들이다.

수많은 무속인, 신흥종교지도자, 소위 도를 텄다는 도인, 자기만의 고집스런 수도자들이 계룡산에 머물며 산의 정기를 숭배하며 기를 듬뿍 받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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