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명리

Ⅰ.살아있는 신들의 주거지 계룡산

ngo2002 2011. 4. 18. 09:28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Ⅰ.살아있는 신들의 주거지 계룡산


 

2009년 09월 14일 00시 00분 입력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는 정감록이 예언한 풍수적 길지라는 십승지와 '택리지'에서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지적한 곳을 말한다. 소설가 윤영근씨는 지난 2008년 1월부터 8월까지 계룡산을 포함한 이들 십승지와 가거지 곳곳을 둘러봤다. 본보는 윤씨의 집필로 '십승지와 가거지'를 연재한다.<편집자주>



다가올 새 세상의 중심…만물의 탯자리 되는 형국

지리산에서 시작한 산맥이

거꾸로 반원을 그리며

700리를 북상해서

다시 남하한 형국

꿈을 담고 기 넘치는 곳

Ⅰ. 살아있는 신들의 주거지 계룡산

수많은 신神들이 살고 있다는 계룡산은 어떤 산일까? 도道를 통하려면 계룡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불세출의 영웅 정 도령이 나타날 것이라는 계룡산은 신도안이 있어서 모든 이의 가슴속에 앙금으로 가라앉아있는 유토피아다. 주변에서 용하다는 점쟁이는 계룡산에서 도를 닦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소문을 뿌려댄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당가득 손님들로 와글거린다. 그만큼 계룡산은 모두의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는 꿈을 담고 있으며 기氣가 넘쳐나는 곳이라고 하겠다. 계룡산을 찾아가는 길은 이른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 백양사역을 지나 노령터널을 지나자 덜 깬 잠으로 부족한 수면을 채우려는 듯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피곤할 때나 졸릴 때는 ‘토막 잠’이 좋은 방법이다. 잠깐 눈을 감고 그대로 자는 것이다. 자고 나면 훨씬 편해지고 가뿐해진다. 나도 모르는 새에 든 단잠으로 기차는 어느새 익산의 논 가운데에 이르렀다. 만경강으로 흘러가는 익산천의 동쪽 산 위로 수줍은 듯 뾰쪽이 내민 아침 해가 붉은 빛으로 모든 것들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일출日出의 모습은 어디서 보아도 장관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행운이었다. 달리고 있는 기차 속 푹신한 의자에 앉은 채로 일출의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과분하고 호사스런 사치에 넘친 여행길이었다. 쳐다본 태양은 더 밝고 노란 황금빛이다. 산 능선을 넘어오면서 모습을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보여주는 태양이 오늘 하루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 이제 새 아침 새날이다. 논바닥에 쏟아진 아침 해는 수증기를 뿜어내며 물안개로 하얀 김을 뿜어 올린다. 회색으로 짙은 안개가 땅바닥을 덮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동경의 시간대와 같은 표준시를 쓰고 있다. 일본과 우리는 30분의 시간차가 나는 데도 일제의 잔재를 버리지 못하고 식민지 지배 당시의 구습을 그대로 쓰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일본이 낮 12시일 때 우리는 실제로 11시 30분이라야 옳다. 시간에 맞추어 바른 시간 표기가 되어야할 것이다. 어느 덧 기차는 논산에 도착했다. 한국의 모든 남자들이면 한 번쯤은 거쳐 가는 논산 신병훈련소가 있는 한국군인 양성의 요람처인 것이다. 논산역에서 서쪽방면에 새롭게 만든 고속도로가 거대한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경부 고속국도와 호남선의 병목구간인 대전 회덕분기점을 피하기 위해서 천안에서 논산까지 새롭게 완공한 호남고속국도라 하겠다. 이제 호남고속도로는 굳이 대전을 경유해서 서울로 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오늘의 답사 코스인 신도안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天皇峯(845m)을 중심으로 15개의 봉우리와 7개의 깊고 깊은 골짜기를 아우르고 있는 명산이다. 계룡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무학 대사가 이 산의 형상을 보고 닭[鷄]의 벼슬을 쓰고 있는 용龍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계룡산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충남 계룡시, 공주시,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으며 해마다 200만 명의 국내외 탐방객이 찾아오는 명소라고 한다.
며칠 전 TV에서는 계룡산에 반해 평생을 계룡산 속에서 살며 창작활동을 해온 화가는 산의 모습이 사람의 얼굴과 같다고 주장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보아진다. 원래 산이란 보는 위치와 그 날의 일기에 따라 모습이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먼 곳에서 바라본 산을 인간의 얼굴에 비교한 화가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반짝이고 재미난다. 계룡산은 산태극 수태극의 조화로운 길지라고도 부른다. 지리산에서 시작한 산맥이 거꾸로 반원을 그리며 700리를 북상해서 다시 남하한 형국으로 산 태극을 이뤘다. 물길은 다시 계룡산을 싸고돌며 금강의 지류가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 합류하면서 수태 극을 이룬다. 그런 기운은 산으로 전달되어 계룡산의 주능선이 태극모양으로 잡히는데 태극은 바로 만물의 탯자리가 되는 형상이고 다가올 새 세상의 중심이 될 곳이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신라오악 가운데 하나로 백제 때 이미 계룡의 이름이 바다건너 당나라까지 알려졌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한국의 으뜸가는 명산임에 틀림이 없다.
육군 제2훈련소가 있는 논산 북쪽의 계룡산을 뒤로하고 계룡대가 들어섬으로써 국가를 지키는 군인의 보금자리로 계룡시에는 삼군본부가 터 잡았다. 육해공군본부가 신도안에 자리한 것이다. 국가의 균형발전이라는 시각에서 건국60년의 역사에 맞게 지방분권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계룡대는 온갖 신흥종교가 난무하던 지역이었는데 이곳을 정비하고 역사를 다시 썼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것이다. 계룡대의 건설로 군인가족이 유입되고 인근도시기반시설이 확충되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성장 동력의 탄력을 받았다. 지상군 페스티벌, 국방퍼레이드 등은 도시성장의 기본이 될 것이다. 신도안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치룬 셈이다. 계룡대 인근의 신도안에는 흩어져있는 주춧돌들이 짓다만 궁성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그곳은 계룡산의 남쪽으로 특히 풍수지리설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좌우로 산줄기가 길게 뻗어내려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또렷하게 만들어준다. 그것도 산줄기가 겹으로 포개져서 힘차고 기가 넘쳤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신령스런 땅인 것이다. 늘어나는 인구로 성장가도를 달리며 새로운 신도시로 자리매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계룡대 앞의 골프장 옆 주차장에 들어찬 승용차가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모습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넓은 골프장 잔디는 찬 겨울이어서인지 염색을 한 듯 갈색으로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보였다. 계룡산과 함께 계룡시는 신도안新都安을 가운데에 보듬고 자리했다. 두마면 일대로 계룡산의 남쪽을 아늑하게 차지하고 자리 잡은 곳이다. 이곳은 계룡산에서 뻗어 내린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직경 4㎞ 정도의 소분지로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풍수쟁이들의 마음을 뺏을만한 곳이라 하겠다. 신도안에서 ‘신도’란 새로 마련되는 수도란 뜻인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를 건국한 후 왕도를 여기에 정한 후부터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다.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500년이라는 긴 세월의 왕국을 지탱해온 이성계의 밝은 혜안에 놀랄 뿐이다. 새로운 국가의 통치기반을 다지면서 1393년 2월에 새로운 도읍지 다듬기의 대역사를 시작했다가 12월에 중지했던 데서 유래하며, 지금도 그 때 운반해온 축대석, 초석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당시 대공사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물길이 없다 해서 짓다만 궁성자리의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커다란 주춧돌이 곳곳에 남아있다. 석재는 너무 컸다. 맨손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 공사 당시에 가져다 놓았다는 94개의 엄청나게 큰 돌이 시내 정장리, 부남리, 석계리에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있었다. 신도안은 병화를 면할 수 있는 곳이라는 예언과 더불어 정감록의 정씨 도읍설 또는 풍수지리설 등에 의해 수많은 유사종교의 집합체들이 모여 들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도를 통하고 신도안에 모인 온갖 토속종교와 무속인은 정화란 이름으로 이미 정리한 다음이었지만 오늘날에도 그 흔적만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정감록에서 이곳을 십승지, 즉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고 했는데 이런 도참사상으로 인해 신흥종교나 유사종교가 성행되었다. 혹세무민의 마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으로 믿는다. 오늘날에도 대권후보 물망에 떠오르고 있는 정씨 성의 정치인이 가끔 인구에 회자되고 있음은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아무튼 남한의 복판에 자리한 계룡산과 함께 신도시 계룡이 크게 융성하기를 바랄뿐이다. 계룡산의 일주는 신원사에서 출발하면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계룡산 국립공원 등산 안내지도를 편 나는 등반 코스Climbing Course를 살폈다. 잔설이 잔뜩 쌓여 있어서 편한 길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모처럼의 기회인만큼 5시간이 소요되는 동화사로 가는 일주코스를 택했다. 하지만 오늘은 하얗게 쌓인 눈으로 인해 한 시간정도가 더 걸릴 것으로 예상하며, 차분하고 사고 없는 답사 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신원사⇒고왕암⇒연천봉고개⇒관음봉⇒자연성능⇒삼불봉⇒남매탑⇒동학사에 도착하는 긴 코스이다. 거리는 7.4Km이라지만 눈길이라서 조금 더 먼 거리로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먼저 나는 신원사의 대웅전 모습이 초라할 정도로 소박한 면이 마음에 와 닿았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창건되었으며 대웅전에는 아미타여래와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조선시대에 많이 이용되던 다포 식으로 외관을 꾸몄으며 바깥의 모습은 간략하지만 정갈스럽고 부드러웠다. 기둥머리에는 안팎으로 안초공을 꽂아 궁궐 건축양식을 따른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계룡산의 남쪽에 위치한 절로 이곳에는 조선시대 3악 중의 하나인 중악단이 대웅전 동편에 네모반듯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성계가 창업개국의 야망을 품고, 기도처로 삼았던 곳이라고 한다. 계룡산의 산신에게 제사지내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중악단이 지금까지 남아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원사에서 출발한 산행이 시작되는 곳에 소림원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암자 앞으로 흐르는 계곡의 밑바닥은 커다란 너럭바위로 흙이나 모래가 없어서인지 물이 유리알처럼 맑았다. 물 흐르는 소리도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온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금룡암은 개울물 옆에 바짝 다가가 지어져 있었다. 용은 물속에서 헤엄치며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양지바른 곳에는 보광원이 있었고 50분쯤 비탈길을 올라가자 고왕암이 극락교를 건너는 곳에 있었다. 아직 덜 녹은 눈이 쌓인 곳은 미끄럽고 위험하다. 그늘진 곳에 쌓인 눈은 반들거리며 얼어붙어 있어서 더 두렵고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는 손에 장갑을 끼고 넘어지면 바로 짚어야 구르지 않는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것은 금물이다. 작은 실수라도 한다면 엉덩방아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등산길 사이의 죽은 나무 가지에는 껍질이 벗겨진 것으로 보아 딱따구리가 여러 마리 살고 있을 진데 아직 내 눈에는 보이질 않는다. 계룡산은 크게 높지도 않고 평범한 산인데도 골이 깊어서인지 계곡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도치샘(440m)에 이르러서 폭포수를 양손에 모아 땀에 젖은 얼굴을 씻었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으며 기분이 한결 새로워졌다. 비탈이 가파르고 어려운 곳에는 밧줄을 묶어 놓아 손으로 잡고 갈 수 있게 해 두었으며 철제 계단을 놓아 걸 수 있게 한 배려가 고마웠다. 연천봉(685m)능선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문필봉을 옆으로 돌아가자 군데군데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점이 보였다.
“여기는 문필봉 5호 지점입니다.” 눈길, 미끄럼 길 주의라고 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계룡 8경중의 하나인 연천봉 낙조를 보려면 해질 무렵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산길이 오래 걸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낙조가 아니더라도 계룡산의 주능선에서 문필봉으로 이어져 내려오며 볼록 솟아오른 연청봉은 잎이 떨어진 가지의 수목에 가리는 옷깃을 제치며 우뚝 서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북쪽으로 보이는 고층 아파트 건물이 공주시가지로서 안개 사이사이로 어렴풋이 보였으며 저 멀리 아득하게 백마강이 은빛을 반짝이는데 띄엄띄엄 보여 관심 있게 보아야만 강물임을 알 수 있었다. 비닐하우스의 지붕에서 반사하는 흰빛은 백마강 물빛과 같았으나 강물은 그래도 유장하고 묵직해서 도도히 흐르기 때문에 눈여겨본다면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청산(淸山) 윤영근씨는 해남 출생으로 소설 '하멜은 살아있다' '단종평전''신 열하일기' 등을 펴냈다. 현재 나주관내 초등학교에 재직 중이며 한 신문에 소설 '표해록'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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