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45. 찰진 갯벌이 승지가 됐다 (4)옥녀봉 아래 반계골 |
입력시간 : 2011. 04.18.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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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 집필지
울창한 소나무와 절벽의 낙조 장관
호남·만금평야, 서해 끝없이 펼쳐져
흐르는 강물이 없는데도 불리는 이름만으로 강이라 하는 하얀 거짓말 같은 강이 있다. 강 아닌 채석강은 해안의 절벽으로 수많은 책을 쌓아둔 것 같아서 붙여진 해식단애의 석벽을 일컫는다.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일대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7천만년의 세월이 빚어낸 자연의 걸작품으로 서해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해넘이를 볼 수 있는 명소이기도하다. 해가 서해바다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은 영롱한 색채를 띤 노을빛을 받아 기기묘묘한 절벽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울려 천혜의 명승지로 불려오는 십승지의 부안은 삼박자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해안선이 있고 물산이 풍부해서 살기 좋은 고장이다. 조선말기 정읍의 고부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일어선 동학농민군들이 관군에 밀리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모진 목숨을 이어야 할 그들은 각각 지리산과 변산 속으로 몸을 피해야만 했다. 세상이 안정을 되찾고 서로 다시 만난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만큼 부안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아마도 부안의 후한 인심을 두고나온 말인가 싶다.
부안에서는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실학사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1612~1673)의 유허지가 내변산 능가산의 옥녀봉(432.7m)을 중심으로 반계골짜기 아래 보안면 우동리에 있다.
반계골짜기는 유형원이'반계수록'을 집필하며 20여년의 세월을 연구했고 마지막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그의 실사구시사상과 이념, 국가건설의 구상, 토지문제, 관리의 등용문제, 군대문제 등을 부안에서 싹틔우고 발전시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반도 땅은 해양세력을 가진 사람들의 십승지였다. 부안에 관한 택리지의 내용도 재미있다.
노령산맥 한 줄기가 북쪽에서 부안으로 와서 서해가운데에 쑥 들어갔다. 서쪽, 남쪽, 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커다란 구렁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변산이라고 했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 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리었다.
골 바깥의 해안가에서는 모두 소금을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의 집이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다. 주민이 산에 오르면 땔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을 굽는 것을 업으로 한다.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풍족하다. 다만 샘물이 좋지 않다. 위에 말한 여러 산은 큰 것은 도회로 할 만하고 작은 것은 높은 사람과 도인들이 숨어살만한 곳이라고 말했다.
정감록은 아홉 번째의 십승지는 변산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변산은 울창한 소나무와 서해의 절벽이 낙조(落照)와 함께 장관을 이루며 조선팔경의 하나이다. 변산의 동쪽으로는 만금평야가 끝없이 펼쳐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보여주는 호남평야도 여기서 조금 옆 동진강가에 질펀하게 퍼졌다.
서쪽으로는 망망대해가 하늘과 이어지면서 수평선을 그려낸다. 지평선과 수평선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많은 땅이라 하겠다. 풍부한 토지는 천부(天府)라고 불렀는데 변산이 바로 하늘이 내린 땅이었던 것이다.
변산은 바다 속으로 뾰쪽이 삐져나온 부분이 있어서 세곡을 싣고 한양으로 가던 배들이 애를 먹었는데 그곳에는 어김없이 해적이 나타나 오가는 배를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변산을 제외한 다른 십승지에서는 한결 같이 깊은 산속에 자리해서 관군의 공격이 있더라도 도망치는 코스가 따로 있고 또 다른 승지로 찾아가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변산반도에서는 강한 공격이 있다면 바다에 빠지거나 배를 타고 먼 곳으로 피해야만 살아난다. 변산에서는 수군이 없다면 독안에 빠진 시궁창생쥐가 되고 만다. 그래서 탐라의 재해권이 필요했던 것이다.
삼남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물은 낙동강, 섬진강, 금강 등의 수로를 따라 항구로 운반했고 이는 다시 세곡선(稅穀船)에 실어 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갔다. 모든 배는 변산반도 앞바다를 돌아가야만 한다.
약탈한 물품을 처분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곳으로 변산을 택했던 것이다. 결국 변산은 산적이나 해적의 본거지가 되었으니 십승지였다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실학의 비조(鼻祖)이며 호가 반계인 유형원 선생은 학문이란 실제의 경험이 최고선이며 이론이 아닌 실천이고 천학이 아닌 박학이라고 했다. 학문우선의 학파보다 글 선비가 아닌 행동하는 실학이 존대 받아야 한다. 이론이 아닌 분배며 실용이고 공존공생을 주창했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부안의 보안면 우동리이다. 우동리는 능가산 옥녀봉(해발 327m)아래의 길지중의 길지에 자리한 십승지의 땅에 속한 마을이다. 옥녀봉을 중심으로 계곡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마을이 우동리였다. 그가 살았던 반계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항상 쌀독이 차서 넘쳐서 인심까지 넉넉했다.
마을 앞 들판을 적셔준 골짜기의 물은 줄포 항을 끼고 옆으로 흘러간다. 풍년이 이어지며 잘사는 마을로 탈바꿈되면서 십승지의 마을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게 증명되었다. 바다와 가까워 갯벌에 깔린 각종 조개는 주워 담는 자가 임자였고 산에 들어가면 땔감이 풍부했다.
마을의 중심은 골짜기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물길이 반계 골이다. 그래서 선생의 호도 반계(磻溪)라고 했다. 반계에서 조금 더 아래에는 맑은 물을 품고 있는 우동저수지가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그림자로 수면 속에 드리운다. 반계서당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짜임새가 있으며 좌청룡우백호의 어디한곳 흠잡을 곳이 없는 전형적인 풍수마을이다.
실학만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주장했던 반계는 앉은뱅이 까끔 말리듯이 말만 앞세우는 학문이란 시대에 맞지 않아 불필요하다고 했다. 직접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것이 학문이며 최고의 선으로 본 것이다. 위대한 선생은 실학의 창시자였다.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으로 이어지는 실학파의 원조였고 중농주의를 주장했다. 보장된 벼슬길을 마다하고 가족 모두와 함께 보안의 반계골짜기로 들어온 그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며 평생 동안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낸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줄포 인터체인지는 반계를 찾아가는 대문이자 현관이다. 윤기 나는 들판을 달리다보면 보안면 소재지가 나오고 곰소 항으로 방향을 바꿔 달리면 반계선생의 체취가 묻어난 곳에 이른다. 식욕을 끌어주는 젓갈냄새의 비릿한 냄새가 진해질 때쯤이면 반계서당에 도착한다. 시대를 앞서가던 선각자 반계 유형원은 지금도 반계골짜기를 지키며 승지를 지켜주고 있다. 그가 있어서 능가산이 국립공원이고 반도의 자랑이다.
오늘날 도시인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이 대개의 경우 개인주의, 이기주의, 금전만능주의, 관능과 쾌락주의에 빠져있다. 이들에게 살기 좋은 삶터나 발복지의 땅은 안중에 없다. 별장이나 휴양지라면 모를까 명소라는 곳은 좋은 삶터와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부안의 변산 지역이 십승지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아직은 이용할만한 것들이 산과 바다에 남아 있어서이다. 가난을 벗어나 개인적인 욕망을 채워줄 것들이 지천에 깔려있어서 흥미를 끈다. 노력한 만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본 것이다. 거대한 신천지 새만금의 또렷한 지평선이 우리들을 부른다. 그곳이 진정한 유토피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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