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12) 구조적 원인 뭔가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약자들인 ‘을’의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필연적 결과”라고 말했다. 대기업 본사의 불공정행위가 누적돼 대리점주와 가맹점주들의 생계유지가 곤란한 수준에까지 이르면서 ‘갑’의 횡포에 대해 ‘을’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대기업만 혜택을 누리는 등 한국 사회의 양극화가 고착화되고,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진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검찰 등 정부 기관이 ‘갑’의 횡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것도 ‘을’의 분노를 키운 원인이다.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이 3대 편의점 전반으로 확산된 가운데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편의점 출입문에 “저희 점포에서는 남양유업 제품을 취급하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다. | 연합뉴스
(1) 저성장 시대 점주들 집중 타격
신현한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저성장과 고령사회를 ‘을’의 분노가 분출한 근본 원인이라고 말한다. 신 교수는 “고도성장을 이어가던 한국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으로 돌아서고, 여기에 고령화까지 심화되면서 위기를 느낀 기업들이 영업비용을 줄이는 과정에서 ‘을’로 지칭되는 가맹점주와 대리점주들에게 강도 높은 압박을 가해왔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과거에도 본사의 불공정행위 등은 있었지만 가맹점주들의 자살처럼 극단적인 일이 없었던 것은 유통 채널이 단일해 소비자들이 대리점에서만 물건을 구매해야 했고, ‘갑’과 ‘을’이 함께 성장해 나눠 먹을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현재는 대형할인점, 온라인 구매 사이트 등 다양한 유통 채널이 등장해 경쟁이 심해져 ‘갑’과 ‘을’이 모두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2) 중산층 몰락, 패자부활 없는 사회갑을 논쟁이 경제민주화의 연장선이라는 분석도 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이헌욱 변호사는 “경쟁에서 승리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조류가 한국을 지배한 지난 10여년간 몇몇 강자와 기득권자들만 자기 몫을 찾고 권리를 강화해 기회균등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서민들은 자기 몫을 뺏기면서 몰락하고 있고, 패자가 되면 부활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며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은 대기업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돼 있고 대기업이 아니면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상황”이라며 “대기업도 근로자·하청업체·대리점·가맹점주 등에게 과실을 나누지 않고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전통적으로 큰 불만이 없었던 유산계층인 자영업자들까지 못 살겠다고 나오는 현상은 사회 양극화와 갑과 을의 불공정거래가 극에 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 기조 때문에 내수 회복이 더뎌졌다”면서 “내수의 중심을 이루는 유통시장은 ‘갑을관계’로 짜여져 있는데, 이 과정에서 특히 ‘을’에게 전가되는 고통이 더욱 커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지난해 선거 때 이른바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부상하면서, ‘을’의 고통이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는 불공정한 것이라는 인식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3) 잘못된 관행 방치해 문제 키워관계 당국이 갑의 횡포를 막는 제대로 된 조치를 하지 않아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김남근 변호사는 “남양유업도 이미 2006년 공정위로부터 불공정행위에 대한 시정명령을 받은 적이 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다시 문제가 불거진 것”이라며 “시정명령으로 회사가 문을 닫는 것도 아니고, 큰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회사는 잘못을 관행적으로 반복해왔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공정위 가맹유통과 직원이 총 10명인데, 5명은 17만여개의 프랜차이즈를 담당하고 나머지 5명은 수만개의 납품업체와 입점업체를 담당한다”며 “행정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사도 하지 않고 전화로만 민원을 처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지방에 공정위 지방청을 만들고, 행정력이 뒷받침되는 검찰과 경찰이 민생문제 수사에도 나서야 한다”며 “여러 행정기관에서 함께 불공정행위를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검찰은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을 들어 불공정행위를 자체 수사하지 않지만 이미 1996년부터 검찰의 고발요청권 제도가 있었다”며 “검찰이 수사를 한 뒤 공정위에 고발 요청을 하면 되는데도 검찰은 그저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라는 소극적 태도를 취한 것도 문제를 키운 하나의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이철호 가맹거래사는 “정보량, 자본 등 모든 면에서 본사보다 열세인 가맹점주와 대리점주들을 본사가 종속 관계로 인식해 착취하려는 태도가 문제”라며 “본사가 착취하려고 하면 가맹점 주인인 ‘을’들은 대항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 거래사는 이어 “본사들이 성장 위주의 정책만을 내세우며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가맹점과 대리점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다보니 ‘을’들의 분노가 분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순봉 기자 gabgu@kyunghyang.com>
[갑의 횡포 을의 눈물]한국, 공생의식 없이 관련 법률만 많아
ㆍ선진국의 법제와 실상전문가들은 한국이 해외 선진국들에 비해 ‘갑을 관계’ 관련 법률은 가장 많지만 ‘을’을 보호하는 데는 가장 미흡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공정거래법이나 가맹사업법, 하도급법 등이 불공정 거래에서 ‘을’을 보호하는 법들이다. 반면 독일·미국·영국 등은 공정거래법 하나로 대부분의 불공정 거래를 처벌한다. 일본은 공정거래법에 하도급법이 추가로 더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과 독일은 가맹점주나 대리접주들이 단체를 구성할 수 있어 본사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계약관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갑’이 ‘을’에게 불공정행위를 했을 때 피해액의 수십배에서 수백배를 배상토록 하고 있다. 기업과 관계 당국이 ‘갑’과 ‘을’이 함께 성장해야 하는 관계로 인식하고 배려하는 문화에서도 한국과 선진국의 차이가 크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은 ‘을’의 분노를 한국보다 먼저 경험했다. 2009년 6월 일본 공정거래위원회가 편의점 가맹본사인 ‘일본 세븐일레븐’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시정조치를 했다. 당시 본사와 가맹점 사업자 사이의 프랜차이즈 계약을 둘러싼 분쟁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당시 이 문제를 새로운 법 제정 등으로 해결하지 않았다. 대신 민간의 자정 노력이 있었다. 일본 세븐일레븐은 본사와 가맹점 간의 불공정 거래와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맹 절차를 13단계로 세분화했다. 3차례의 면접과 선배 점주와의 만남, 점포에서 판매활동 체험과 교육, 경영상담 등의 단계를 거쳐 점주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철호 가맹거래사는 “일본에서는 개점까지 3~6개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점주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한 뒤 가맹 계약을 체결한다”며 “반면에 한국의 편의점은 2011~2012년쯤에는 짧게는 1주 만에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고, 많은 문제점이 제기된 현재도 길어야 1~2개월 안에 개점해 점주가 충분한 정보를 갖기 어렵고 ‘갑’에게 유리한 계약이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김남근 변호사는 “중소기업 강국으로 알려진 대만·일본·독일 등은 중소기업, 대리점주, 가맹점주 등의 협동조합 가입률이 80%가 넘지만 한국은 2~3%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한국에서는 중소기업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대기업과 납품 단가를 협상하면 공정거래법상 담합 행위에 해당돼 형사처벌을 받는 실정”이라며 “외국은 이 같은 제재가 없기 때문에 프랜차이즈나 중소기업들이 조합을 결성해 대기업과 대등하게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영미법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며 “본사의 고의적인 불법행위로 가맹점 등에 손실이 발생하면 수십·수백배의 배상을 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징벌적 손해배상 덕분에 집단소송제도 활성화돼 있다”며 “영국과 미국의 사법부는 사후적으로 강한 배상을 하도록 해 불공정 행위를 사전에 막겠다는 접근”이라고 말했다. 이건묵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한국은 독과점적인 시장구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갑’을 만들어내는데, 이 같은 형태는 해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조사관은 “미국·독일·영국 등의 선진국은 공정위와 같은 감시당국들이 친중소기업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기업들이 ‘을’과 계약을 할 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며 “이들은 시장 친화적인 경쟁을 하지 않는 경우 제재를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한국은 독과점이 너무 강하고 시장 질서가 왜곡돼 있어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순봉 기자 gabgu@kyunghyang.com>
입력 : 2013-06-11 22:29:19ㅣ수정 : 2013-06-11 22: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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