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5) 건설 하도급 비리.[갑의 횡포 을의 눈물]‘자재 빼돌리기’ 거부하자 일감 뺏고 공사비도 안줘

ngo2002 2013. 6. 12. 11:16

[갑의 횡포 을의 눈물]‘자재 빼돌리기’ 거부하자 일감 뺏고 공사비도 안줘

ㆍ(5) 건설 하도급 비리

건축용 철골 구조물 제작업체인 ㄱ사는 올해 초 차량용 블랙박스를 100여개 구입해야 했다. 원청업체가 설 명절을 맞아 자사 직원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하청업체인 ㄱ사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ㄱ사는 최근 경영난을 겪고 있어 경비 절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갑’의 요구에는 군소리 없이 응해야 했다.

최근 몇 년 새 이어지는 부동산 불황의 여파도 하청업체들에 떠넘겨지고 있다. ㄱ사는 지난해 부산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 자재를 납품했지만 원청업체로부터 돌아온 것은 현금이 아닌 미분양 아파트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인건비와 원재료비 등을 당장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원청사로부터 받은 미분양 아파트를 3000만원가량 할인해서 겨우 팔았다”면서 “원청사는 어차피 줘야 할 돈을 미분양 해소용으로 써먹었지만 우리는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라고 말했다.

건설업은 ‘갑의 횡포’가 만연한 대표적인 업종으로 꼽힌다. 지속적으로 공사를 따내지 못하면 기업을 유지할 수 없는 수주 산업의 특성상 구조적으로 원청업체가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된다.

▲ 매년 선물·접대 요구는 기본
미분양 아파트로 대금 결제도


건설산업기본법은 하도급업체의 적정 이익과 권리를 보장하는 표준 하도급 계약서를 쓰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전문건설협회가 지난해 전문건설업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4곳 중 1곳꼴로 변형된 계약서식이나 임의로 작성한 계약서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도급 계약을 맺을 때 금전이나 물품, 용역 제공 등 부당한 요구를 받았다는 응답도 7.8%에 이르렀다. 겉으로는 적정한 공사 금액을 주는 것처럼 해놓고 실제로는 낮은 금액을 지급하는 ‘이중계약’을 강요받았다는 응답도 9.7%에 달했다.

특히 최근에는 건설경기 침체로 공사 물량이 줄어들다 보니 원청업체가 과도한 가격 후려치기를 해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또 과거 부동산 활황기를 거치면서 국내 전문건설업체 수가 4만5000여개에 이를 정도로 과잉 공급 상태라는 점도 불공정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요인이다.

30여년간 건설업을 해온 ㄴ씨는 한 대기업과 1년 넘게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지방의 한 토목공사에 하도급 업체로 참여했는데 원청업체의 현장 직원이 공사 현장의 골재를 불법으로 반출해 판매할 것을 지시했다. ㄴ씨는 거절했고, 대가는 가혹했다. 원청업체는 ㄴ씨에게 공사를 중단하게 했으며, 그때까지 투입한 자재비 등 공사비 15억원가량도 지급하지 않았다. 국토교통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여러 차례 탄원을 했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ㄴ씨는 “공사에 들어갈 때부터 건설산업기본법에서 보장하는 하도급률 82%에 크게 못 미치는 60%로 저가 수주했다”면서 “돈도 남지 않는 상황에서 불법 골재 판매를 했다가는 나중에 징역까지 살 수 있어 거부했더니 아예 회사가 문을 닫을 지경에 처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건설업을 해오면서 외환위기 등 어려운 시절이 많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힘들어도 참아냈다”면서 “하지만 이번에는 불법을 거부했다고 해서 공사비를 못 받고 있으니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공사 현장에서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원청업체들은 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철근과 콘크리트 공사를 하는 중견 건설사 대표 ㄷ씨는 “원청사는 안전사고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고가 나도 산업재해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면서 “지난해에도 원청사가 사고 당사자와 억지로 합의를 해놓고 1억4000만원에 이르는 합의금은 우리한테 내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중소 건설업체들은 건설업계에 대해 오로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입을 모은다. 한 중소 건설업체 관계자는 “거래하고 있는 대기업과의 협력관계가 틀어지면 다른 곳에서 공사를 수주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남는 게 없어도 회사를 계속 운영해 나가려면 견디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입력 : 2013-05-12 22:25:50수정 : 2013-05-12 22:4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