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렬 前일본삼성 사장이 본 이건희 회장
일본을 `가까운 미래`로 생각…품질경영·기술삼성 착안했다 | |
기사입력 2013.05.28 17:20:32 | 최종수정 2013.05.28 17:22:51 |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② ◆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루프트한자 일등석에는 이건희 회장과 삼성 수행원 6명밖에 없었다. 동승한 임원들은 이 회장이 건네준 `후쿠다 보고서`를 읽으며 내내 토론을 벌였다. 이 회장은 삼성 개혁의 고삐를 세게 당겨야겠다는 생각을 단단히 갖고 있었다."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팀장과 일본삼성 사장, 삼성사회봉사단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한 이창렬 전 사장도 1993년 6월 5일 이 회장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수행원 6명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직함은 회장비서실 경영2팀담당 이사. 6년간 일본삼성 사장으로 재직할 때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삼성의 대표적 `일본통`이다.
매일경제는 최근 이 전 사장과 서울 소재 사무실에서 단독 인터뷰를 하고 삼성 신경영 선언 당시의 상황과 이 회장의 일본 행적을 짚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삼성 신경영 선언 당시 역할은.
▶중공업 건설 화학 자동차 등을 담당하는 비서실 임원으로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이 회장과 함께 동승했다.
-비행기 안에서 오간 대화는.
▶이 회장이 후쿠다 보고서를 비행기에서 보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 보고서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비행기에 탔다. 이 회장이 기내식을 마치자마자 동승한 임원들을 불러 답을 구했다. 일부는 비행기 바닥에 앉았으며,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이 회장의 의도는 무엇인가.
▶비단 삼성의 개혁뿐 아니라 일류 회사와 일류 국가로 가자는 생각을 많이 가진 것 같다. 특히 LA와 도쿄를 거치면서 현장을 살피고 일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해보니 이 회장이 알고 있던 삼성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독일로 떠났다.
원래 이 회장은 독일 벤츠 BMW 등 자동차회사를 둘러볼 일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전날 도쿄에서 밤새 토론을 했고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말씀하실 정도로 변혁을 설파한 것이다.
-이 회장에게 일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와세다대에서 공부하면서 배우고 느낀 게 많았다. 이 회장은 일본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한다. 현지 젊은 사람이 못 알아듣는 겸양어도 쓸 정도다. 이 회장은 닛케이 비즈니스, 주간다이아몬드 등 웬만한 일본 경제잡지는 다 봤다. 또한 일본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영화도 많이 봤다. 그러면서 일본의 시대적 상황과 동시대의 한국, 중국, 유럽, 미국까지 비교하는 등 입체적인 사고를 한다. 일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회장은 또 일본과 한국의 산업 격차가 왜 생겼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일본 선진화가 빠르다보니 우리 미래의 한발 빠른 바로미터였지 않았을까.
-신경영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이 회장이 질 위주의 경영을 강조한 데는 오랜 일본 경험이 자양분이 됐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품질이 잘못되면 회사가 망한다는 얘기가 있다. 무선전화기 화형식도 서양식 사고방식으로는 굳이 단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품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 회장이 생각하는 리더의 덕목은 뭔가.
▶이 회장은 다섯 가지 행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知)ㆍ행(行)ㆍ용(用)ㆍ훈(訓)ㆍ평(評)이다. 리더가 되려면 우선 본인이 많이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몸소 실행하고, 주변 사람을 활용하며, 후배에게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고, 자신과 후배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황인혁 기자 / 강계만 기자 / 사진 = 박상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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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회장비서실 팀장과 일본삼성 사장, 삼성사회봉사단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한 이창렬 전 사장도 1993년 6월 5일 이 회장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수행원 6명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직함은 회장비서실 경영2팀담당 이사. 6년간 일본삼성 사장으로 재직할 때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삼성의 대표적 `일본통`이다.
매일경제는 최근 이 전 사장과 서울 소재 사무실에서 단독 인터뷰를 하고 삼성 신경영 선언 당시의 상황과 이 회장의 일본 행적을 짚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삼성 신경영 선언 당시 역할은.
▶중공업 건설 화학 자동차 등을 담당하는 비서실 임원으로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이 회장과 함께 동승했다.
-비행기 안에서 오간 대화는.
▶이 회장이 후쿠다 보고서를 비행기에서 보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 보고서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비행기에 탔다. 이 회장이 기내식을 마치자마자 동승한 임원들을 불러 답을 구했다. 일부는 비행기 바닥에 앉았으며,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이 회장의 의도는 무엇인가.
▶비단 삼성의 개혁뿐 아니라 일류 회사와 일류 국가로 가자는 생각을 많이 가진 것 같다. 특히 LA와 도쿄를 거치면서 현장을 살피고 일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해보니 이 회장이 알고 있던 삼성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독일로 떠났다.
원래 이 회장은 독일 벤츠 BMW 등 자동차회사를 둘러볼 일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전날 도쿄에서 밤새 토론을 했고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말씀하실 정도로 변혁을 설파한 것이다.
-이 회장에게 일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와세다대에서 공부하면서 배우고 느낀 게 많았다. 이 회장은 일본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한다. 현지 젊은 사람이 못 알아듣는 겸양어도 쓸 정도다. 이 회장은 닛케이 비즈니스, 주간다이아몬드 등 웬만한 일본 경제잡지는 다 봤다. 또한 일본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영화도 많이 봤다. 그러면서 일본의 시대적 상황과 동시대의 한국, 중국, 유럽, 미국까지 비교하는 등 입체적인 사고를 한다. 일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회장은 또 일본과 한국의 산업 격차가 왜 생겼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일본 선진화가 빠르다보니 우리 미래의 한발 빠른 바로미터였지 않았을까.
-신경영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이 회장이 질 위주의 경영을 강조한 데는 오랜 일본 경험이 자양분이 됐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품질이 잘못되면 회사가 망한다는 얘기가 있다. 무선전화기 화형식도 서양식 사고방식으로는 굳이 단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품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 회장이 생각하는 리더의 덕목은 뭔가.
▶이 회장은 다섯 가지 행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知)ㆍ행(行)ㆍ용(用)ㆍ훈(訓)ㆍ평(評)이다. 리더가 되려면 우선 본인이 많이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몸소 실행하고, 주변 사람을 활용하며, 후배에게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고, 자신과 후배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황인혁 기자 / 강계만 기자 / 사진 = 박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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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日 그리고 克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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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5.28 17:41:44 | 최종수정 2013.05.28 18:20:07 |
◆ 삼성 신경영 20years later ② ◆
`지일(知日), 그리고 극일(克日).` 이건희 삼성 회장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과제다.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고 초일류기업 행군을 시작한 이 회장에게 일본 극복하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이 회장은 신경영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지일`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도쿄에 가장 우수한 사람을 보내라. 일본 기술자도 데려와라. 앞선 나라에서 앞선 모든 걸 얻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신경영 선언 이후 일본 전자매장이 밀집해 있는 도쿄 아키하바라는 삼성 임원들의 필수 견학 코스가 됐다"며 "일본을 배우고 우리 현실을 똑똑히 직시하라는 게 이 회장의 뜻"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지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만날 1등 쫓아가 봐야 2등, 3등밖에 못한다. 월반(越班)을 해야 한다"고 임직원들을 자극했다. 그 돌파의 힘은 변화ㆍ혁신에 대한 갈망과 삼성 특유의 스피드 경영에서 나왔다는 게 삼성 안팎의 평가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위 임원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자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그 시기를 삼성은 놓치지 않았다. 삼성의 대응이 일본보다 한발 빨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TV의 절대강자였던 일본 소니는 `트리니트론`이라는 독창적인 브라운관 TV로 세계를 제패했지만 평면 LCD TV로 패러다임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삼성에 시장 주도권을 빼앗겼다.
반면 이건희 회장의 1993년 LA 회의 이후 TV 사업에 고심을 거듭했던 삼성은 2006년 보르도 TV로 일본 업체를 결국 극복해냈다.
[황인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지일(知日), 그리고 극일(克日).` 이건희 삼성 회장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과제다.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고 초일류기업 행군을 시작한 이 회장에게 일본 극복하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이 회장은 신경영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지일`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도쿄에 가장 우수한 사람을 보내라. 일본 기술자도 데려와라. 앞선 나라에서 앞선 모든 걸 얻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신경영 선언 이후 일본 전자매장이 밀집해 있는 도쿄 아키하바라는 삼성 임원들의 필수 견학 코스가 됐다"며 "일본을 배우고 우리 현실을 똑똑히 직시하라는 게 이 회장의 뜻"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지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만날 1등 쫓아가 봐야 2등, 3등밖에 못한다. 월반(越班)을 해야 한다"고 임직원들을 자극했다. 그 돌파의 힘은 변화ㆍ혁신에 대한 갈망과 삼성 특유의 스피드 경영에서 나왔다는 게 삼성 안팎의 평가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위 임원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자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그 시기를 삼성은 놓치지 않았다. 삼성의 대응이 일본보다 한발 빨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TV의 절대강자였던 일본 소니는 `트리니트론`이라는 독창적인 브라운관 TV로 세계를 제패했지만 평면 LCD TV로 패러다임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삼성에 시장 주도권을 빼앗겼다.
반면 이건희 회장의 1993년 LA 회의 이후 TV 사업에 고심을 거듭했던 삼성은 2006년 보르도 TV로 일본 업체를 결국 극복해냈다.
[황인혁 기자]
• 삼성, 미래 내다본 투자…`세계 1위` 줄줄이 탈환 |
• 日역사 비디오 수십번 본 이건희…결국 100년기업 샤프 `접수` |
• 이창렬 前일본삼성 사장이 본 이건희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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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미래 내다본 투자…`세계 1위` 줄줄이 탈환
반도체·평판TV·2차전지 | |
기사입력 2013.05.28 17:17:17 | 최종수정 2013.05.28 22:0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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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평판 TV, 2차전지…. 한때 일본이 세계 시장을 제패했던 분야다. 하지만 한국 전자업체들은 이들 분야에서 일본 기업들을 상당한 차이로 앞지르고 있다.
1983년 이병철 회장이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발표하자 일본은 비웃었다. 하지만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해 일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64M D램은 삼성전자의 극일(克日) 1호 제품으로 기록됐다. 당시 개발팀장은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2004년 4월 일본 최고 전자업체 소니는 삼성전자와 손잡고 LCD 합작사를 만들었다. 일본 언론은 충격 일색이었다. 일본이 최고라고 믿던 LCD 분야에서 소니가 삼성에 먼저 합작을 요청했기 때문. 또 한번의 추월은 2006년에 일어났다. 삼성전자는 아날로그 TV 시대를 군림하던 소니를 추월하고 글로벌 TV 시장 1위에 올랐다. 화질, 디자인 모든 면에서 소니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9년 3분기엔 일본 재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주요 전자업체 9개사의 영업이익을 합친 금액(1519억엔)이 삼성전자 영업이익(3260억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 오네다 노부유키 당시 소니 부사장은 "삼성전자에 패한 이유는 제품 경쟁력 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일본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삼성전자를 공부했다.
[이경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983년 이병철 회장이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발표하자 일본은 비웃었다. 하지만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해 일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64M D램은 삼성전자의 극일(克日) 1호 제품으로 기록됐다. 당시 개발팀장은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2004년 4월 일본 최고 전자업체 소니는 삼성전자와 손잡고 LCD 합작사를 만들었다. 일본 언론은 충격 일색이었다. 일본이 최고라고 믿던 LCD 분야에서 소니가 삼성에 먼저 합작을 요청했기 때문. 또 한번의 추월은 2006년에 일어났다. 삼성전자는 아날로그 TV 시대를 군림하던 소니를 추월하고 글로벌 TV 시장 1위에 올랐다. 화질, 디자인 모든 면에서 소니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9년 3분기엔 일본 재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주요 전자업체 9개사의 영업이익을 합친 금액(1519억엔)이 삼성전자 영업이익(3260억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 오네다 노부유키 당시 소니 부사장은 "삼성전자에 패한 이유는 제품 경쟁력 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일본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삼성전자를 공부했다.
[이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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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역사 비디오 수십번 본 이건희…결국日 TV·반도체 제쳐
93년 삼성회의 열린 오쿠라호텔서 본 신경영 임직원 200명 불러 밤낮없이 회의 또 회의…산요전기 前회장 "日 관찰하는 매서운 눈" | |
기사입력 2013.05.28 17:18:20 | 최종수정 2013.05.28 22: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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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李회장 "신경영이란…" 1993년 7월 일본 뉴오타니호텔에서 열린 오사카 회의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경영의 의미와 과제를 임직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해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한 이 회장은 베를린, 로잔, 런던을 거쳐 서울로 들어온 뒤 일본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를 거치는 68일 일정의 신경영 여행을 이어갔다. <사진 제공=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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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중심에 위치한 미나토구는 일본 경제와 금융의 산실이다. 도쿄타워, 롯폰기, 도쿄역과 왕궁 등도 인접해 있어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미나토구 도라노몬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다보면 1962년 설립된 오쿠라호텔이 등장한다. 전통 양식의 본관 건물과 최근 신설한 남쪽 별관이 운치 있게 이어져 있다.
이곳은 삼성과 유독 인연이 깊다. 삼성이 호텔신라를 세우면서 이곳을 벤치마킹했고,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체류 중 자주 묵던 장소였다.
이 회장이 1993년 6월 4일 삼성전자 임직원 10여 명과 함께 기술개발 대책회의를 연 장소도 바로 오쿠라호텔이었다. 신경영 선언이 있기 사흘 전 모임으로 이날 무거운 분위기 속에 회의를 마친 이 회장은 일본인 고문들을 별도로 불러 새벽 5시까지 격정 토론을 벌였다.
이건희 회장은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이후 200명의 임직원들을 도쿄로 다시 불러 회의와 특강을 이어갔다. 당시 회의장 이름은 아케보노(曙). 일본어로 `새벽`이라는 뜻이다.
오쿠라호텔에서 만난 도야마 무네야스 씨는 20년 전 회의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20년 전 삼성 임직원들의 숙박과 안내를 담당한 매니저였다.
그는 "2박3일 동안 많은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본 대기업도 하기 힘든 대규모 모임을 해외에서 개최한 게 인상적이었다. 당시 삼성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앞으로 크게 될 회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 회장과 임직원들이 밤낮을 잊고 회의에 몰두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일본은 이건희 회장에게 있어 오랜 벗이자 스승이자 경쟁자였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 이병철 선대 회장은 삼남 이건희를 일본 도쿄로 유학 보냈다. 이때가 1953년 열두 살 때였다. 그후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와세다대로 진학한 그는 일본을 통해 사물을 보고 느끼고 터득할 기회가 많았다.
삼성과 전자제품 합작사인 `삼성산요`를 건립하는 등 깊은 인연을 가진 이우에 사토시 당시 산요전기 회장은 일본을 관찰하는 이 회장의 매서운 눈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한국은 금속제 식기를 쓰기 때문에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지만 도자기를 쓰는 일본에는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생활문화가 형성됐다. 여기서부터 제조에 대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이 회장의 말을 듣고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1993년 신경영을 외친 이 회장은 삼성 임원들에게 일본 기업들의 벤치마킹을 자주 지시했다. 특히 일본 전자업체들의 선진 제품은 삼성이 배우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회장은 1993년 7월 중순에 열린 오사카 회의에서 이러한 말도 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모든 면에서 일본에 비해 선진국이던 우리가 왜 여러 면에서 (일본에) 뒤지고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는 이어 "나는 일본에 있을 때 일본 역사를 알기 위해 비디오테이프 45개 분량을 수십 번 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30회 이상, 도요토미 히데요시 10회 이상, 오다 노부나가는 5~6회 봤다"며 `지일(知日)`을 재차 강조했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직후인 1993년 9월 삼성 관리본부장들을 일본에 보내 여러 복합화 시설을 둘러보도록 했다. 이에 당시 안복현 제일모직 관리본부장, 김순택 삼성전관 관리본부장 등 20여 명이 무려 26박27일 일정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들은 후쿠오카돔, NEC 본사, 복합휴양지 시가이야 등 10여 개 복합시설을 둘러보면서 여러 시설을 한데 합친 건물이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지 직접 체험했다.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은 "이 회장은 끊임없이 일본 기술 동향을 체크하며 안목을 키웠다"며 "1990년대 초 일본 도시바 공장을 이 회장과 함께 방문한 뒤 헬리콥터로 이동할 때 이 회장이 쉴 새 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반도체 사업의 글로벌화와 해외 투자를 강조한 게 기억에 선하다"고 말했다. 삼성은 일본을 면밀히 벤치마킹했지만 동경 대상으로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양에서 질 경영으로 전환하고 국제화와 복합화, 정보화를 한 방향으로 힘 있게 추진하면서 끝내 일본을 극복할 발판을 마련했다.
최근 일본 100년 기업 샤프가 삼성전자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은 것은 세계 전자업계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디지털 패러다임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읽은 삼성이 LCD와 OLED 시장에서 세계 선두권으로 올라서면서 일어난 지각변동이었다.
[도쿄 = 이경진 기자 / 서울 = 황인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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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구 도라노몬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다보면 1962년 설립된 오쿠라호텔이 등장한다. 전통 양식의 본관 건물과 최근 신설한 남쪽 별관이 운치 있게 이어져 있다.
이곳은 삼성과 유독 인연이 깊다. 삼성이 호텔신라를 세우면서 이곳을 벤치마킹했고,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체류 중 자주 묵던 장소였다.
이 회장이 1993년 6월 4일 삼성전자 임직원 10여 명과 함께 기술개발 대책회의를 연 장소도 바로 오쿠라호텔이었다. 신경영 선언이 있기 사흘 전 모임으로 이날 무거운 분위기 속에 회의를 마친 이 회장은 일본인 고문들을 별도로 불러 새벽 5시까지 격정 토론을 벌였다.
이건희 회장은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이후 200명의 임직원들을 도쿄로 다시 불러 회의와 특강을 이어갔다. 당시 회의장 이름은 아케보노(曙). 일본어로 `새벽`이라는 뜻이다.
오쿠라호텔에서 만난 도야마 무네야스 씨는 20년 전 회의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20년 전 삼성 임직원들의 숙박과 안내를 담당한 매니저였다.
그는 "2박3일 동안 많은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본 대기업도 하기 힘든 대규모 모임을 해외에서 개최한 게 인상적이었다. 당시 삼성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앞으로 크게 될 회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 회장과 임직원들이 밤낮을 잊고 회의에 몰두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일본은 이건희 회장에게 있어 오랜 벗이자 스승이자 경쟁자였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 이병철 선대 회장은 삼남 이건희를 일본 도쿄로 유학 보냈다. 이때가 1953년 열두 살 때였다. 그후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와세다대로 진학한 그는 일본을 통해 사물을 보고 느끼고 터득할 기회가 많았다.
삼성과 전자제품 합작사인 `삼성산요`를 건립하는 등 깊은 인연을 가진 이우에 사토시 당시 산요전기 회장은 일본을 관찰하는 이 회장의 매서운 눈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한국은 금속제 식기를 쓰기 때문에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지만 도자기를 쓰는 일본에는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생활문화가 형성됐다. 여기서부터 제조에 대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이 회장의 말을 듣고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1993년 신경영을 외친 이 회장은 삼성 임원들에게 일본 기업들의 벤치마킹을 자주 지시했다. 특히 일본 전자업체들의 선진 제품은 삼성이 배우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회장은 1993년 7월 중순에 열린 오사카 회의에서 이러한 말도 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모든 면에서 일본에 비해 선진국이던 우리가 왜 여러 면에서 (일본에) 뒤지고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는 이어 "나는 일본에 있을 때 일본 역사를 알기 위해 비디오테이프 45개 분량을 수십 번 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30회 이상, 도요토미 히데요시 10회 이상, 오다 노부나가는 5~6회 봤다"며 `지일(知日)`을 재차 강조했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직후인 1993년 9월 삼성 관리본부장들을 일본에 보내 여러 복합화 시설을 둘러보도록 했다. 이에 당시 안복현 제일모직 관리본부장, 김순택 삼성전관 관리본부장 등 20여 명이 무려 26박27일 일정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들은 후쿠오카돔, NEC 본사, 복합휴양지 시가이야 등 10여 개 복합시설을 둘러보면서 여러 시설을 한데 합친 건물이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지 직접 체험했다.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은 "이 회장은 끊임없이 일본 기술 동향을 체크하며 안목을 키웠다"며 "1990년대 초 일본 도시바 공장을 이 회장과 함께 방문한 뒤 헬리콥터로 이동할 때 이 회장이 쉴 새 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반도체 사업의 글로벌화와 해외 투자를 강조한 게 기억에 선하다"고 말했다. 삼성은 일본을 면밀히 벤치마킹했지만 동경 대상으로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양에서 질 경영으로 전환하고 국제화와 복합화, 정보화를 한 방향으로 힘 있게 추진하면서 끝내 일본을 극복할 발판을 마련했다.
최근 일본 100년 기업 샤프가 삼성전자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은 것은 세계 전자업계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디지털 패러다임의 변화를 발 빠르게 읽은 삼성이 LCD와 OLED 시장에서 세계 선두권으로 올라서면서 일어난 지각변동이었다.
[도쿄 = 이경진 기자 / 서울 = 황인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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