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창간 66주년 특집]5대 제안 - 집은 ‘사는 곳’이다

ngo2002 2013. 1. 31. 10:47

[창간 66주년 특집]5대 제안 - 집은 ‘사는 곳’이다

ㆍ[사회계약 다시 쓰자 Ⅱ]

회사원 박모씨(40)가 청소년기를 보낸 집은 다락방이 있는 단칸집이었다. 박씨의 부모는 번듯한 2층짜리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박씨는 좁은 단칸집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전세금을 끼고 대출을 받아 산 집이어서 실제 살 수가 없는 ‘내 집’이었던 것이다.

박씨 가족은 비좁은 집에 살면서 매달 대출이자를 내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지만 집값이 오를 것이란 희망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좋은 집에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꿈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은 집뿐이라고 단단히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산산조각났다. ‘IMF(국제통화기금)’라는 당시로는 이름도 생소한 단어 앞에 무너져 내렸다. 집값은 곤두박질치고 금리는 치솟았다. 결국 박씨의 부모는 대출이자를 견디지 못하고 헐값에 집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판 돈은 대출금을 갚고 나니 온데간데없었다. 박씨 부모가 한평생을 쏟아부은 집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부의 증식 수단, 신분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주거권의 왜곡이 심각해졌다.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판자촌 너머로 한국 사회에서 1%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타워팰리스 단지가 들어서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부동산 불패신화가 지배해 온 사회
너도나도 불로소득 좇아 ‘청춘을 저당’


▲ ‘몇 동 몇 호’만 기억하는 유목민으로
집으로 돈 버는 시대 사실상 막 내려
이제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자


박씨는 2005년 3억원을 들여 서울 상도동의 한 아파트를 샀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그만한 ‘거금’을 모으기는 힘들지만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약혼녀까지 은행에서 돈을 빌려 겨우 집을 장만했다. 매달 100만원이 넘는 이자를 내야 했지만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다들 집은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집값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는 시기였고, 집으로 돈을 벌지 못하면 자기만 바보가 될 것이란 조바심이 퍼져가던 때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앞에 박씨도 무릎을 꿇었다. ‘부동산 불패 신화’가 깨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더니, ‘하우스푸어’라는 신조어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차’ 싶어 뒤늦게 아파트를 내놓았지만 찾는 이가 없었다. 거래가 끊기다 보니 시세를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동안 은행에 갖다바친 이자만 해도 1억원은 족히 될 성싶었다. 한마디로 부동산 때문에 2대에 걸쳐 수난을 당한 셈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단순히 거주 공간이 아니다. 부를 창출하는 수단이자 신분을 규정하는 소유욕의 결정체다. 올해 초 피델리티자산운용이 발간한 <은퇴백서>를 보면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태어난 700여만명의 베이비붐 세대들은 자산의 74%가량을 부동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집값 등락에 따라 재산의 크기가 좌우되는 것이다.

집에 대한 소유욕이 커진 것과 별개로 소유를 현실화시키기는 더 어려워졌다. 소유한 주택에서 거주하는 비율인 자가점유율은 1970년 71.7%였지만 2010년에는 54.2%로 떨어졌다.

주택보급률이 2008년부터 이미 100%를 넘어섰고 인구 1000명당 주택 수가 2005년 279가구에서 2010년 302가구로 8.6% 증가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주택을 소유한 가구 비율인 자가보유율은 60.3%에서 61.3%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집이 늘어나는 만큼 소유자가 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택을 여러 채 가진 다주택자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집이 ‘사는 곳’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한 지금도 한국의 집값은 평범한 직장인이 소득을 모아 살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 6월 기준 국민은행 조사 자료를 보면 평균 소득 대비 평균 집값(PIR)은 서울 지역의 경우 10.2배에 이른다.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0년 이상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는 결과다. 생활비 등 필수적인 지출을 감안하면 사실상 서울에서 집 사기는 요원한 일이 됐다.

이처럼 비싼 집값을 떠받쳐온 것은 금융권 대출이라는 지렛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가계부채는 922조원에 이른다. 연체율은 8월 말 6년 만에 1%를 넘기는 등 적색신호가 켜진 상황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2010년 기준 하우스푸어 수는 157만가구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부분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아파트를 가진 30~40대 중산층 가구다.

주택 구입이 줄면서 전·월세 시장은 최근 몇 년 새 ‘대란’이라 불릴 정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민은행 조사 결과 지난달 전국 전셋값 지수는 2005년 말에 비해 40% 이상 치솟았다. 그런가 하면 월세 비중은 커지고 있다. 한국인구학회가 올해 초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00년 12.6%이던 월세 비율이 2010년 20.1%로 올라섰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의 주택 시장은 최근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집을 사고팔아 돈 버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자는 자취를 감췄고 오피스텔이나 도시형생활주택 같은 임대수익형 부동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집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으면 미래의 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게 만든다. 강남이라는 이유로 낡고 비좁은 재건축 아파트에 살면서 대출이자 때문에 소비를 줄여야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투자나 투기는 원하는 결과만을 가져오진 않는다. 앞서 박씨 가족처럼 실패했을 경우 현재와 미래까지 몽땅 허비하는 셈이 된다.

집에 대한 투자는 한정된 자원을 통해 불로소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땅은 노동의 결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부동산을 선점해 재테크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누릴 가치를 빼앗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 모두 집에 대한 인식과 철학을 바꿔야 한다. 이 사무처장은 “유럽은 우리처럼 집에 집착하기보다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데 삶의 초점을 맞춘다”면서 “집을 사서 돈을 벌겠다는 집착을 버리면 훨씬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공급하는 장기전세주택 ‘시프트’의 경우 내놓을 때마다 높은 경쟁률을 보이며 마감된다. 이명박 정부처럼 소수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보금자리주택을 분양하는 방식이 아니라, 양질의 장기임대주택 공급을 늘리고, 불로소득을 적절히 환수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중견 건축가 승효상씨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집이 허물어진다고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희희낙락하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유목민이 돼가는 거죠. 팔고 좋은 데로 가고 싶으니까 가풍을 만들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몇 동 몇 호 숫자로만 기억을 했던, 어릴 적에 자기 공간이 없었던 애들이 크면 귀소할 곳이 전혀 없는 거죠. 이런 문제가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병석에 있던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예전에 살았던 제주도 집에 돌아가면서 평안을 얻는다. 그 집은 남녀 주인공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꿈을 상징하기도 한다. 집은 ‘사는 곳’이다. 집에 대한 순수한 가치를 깨닫는 일이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삶을 찾아가는 한 갈래 길이 될 것이다.

<박철응 기자 hero@kyunghyang.com>


 

입력 : 2012-10-05 21:27:48수정 : 2012-10-05 21:2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