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귀중한것

[내 인생 마지막 편지](50) 전경린 - 내 상상 속의 K씨께

ngo2002 2012. 8. 28. 11:21

[내 인생 마지막 편지](50) 전경린 - 내 상상 속의 K씨께

K씨, 당신이 나에게 첫 편지를 쓴 것은 30여년 전이었어요.

그보다 먼저, 내게 음악을 보냈고요.

그것은 당신이 직접 만든 일곱 개의 시디였어요. 그 울림을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풀려나오는 일곱 타래의 음악, 흘러내리는 일곱 강물의 음악, 눈과 비와 안개와 꽃잎이 쏟아지는 일곱 계절의 음악, 반짝이는 광휘 속에서 운행하는 일곱 행성의 음악….

그때 나는 음악 없는 기간을 지나고 있었어요. 가구를 모두 치운 것 같은 빈방에서 오직 문장들을 생각하고 문장을 쓰고 문장을 읽었지요. 바스라질듯 메마르고 팍팍하고 지독히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잔인하게 나를 정화하듯이요.

별 기대도 없이 첫 시디를 오디오에 걸고 소파에 앉았을 때, 오랫동안 폐쇄시킨 방문 앞으로 음악이 범람하듯 밀어닥쳤어요. 은어 떼가 돌아올 때 강물이 그런 느낌일까요. 떼 지어 회귀하는 것들의 냄새가 났어요. 포기하고 체념했던 것들이 꿈틀거리며 깨어나는 잔인한 4월의 후각, 그건 생명의 냄새지요. 그 순간 이후로 오늘까지 나는 매일매일 음악 속에서 숨을 쉬어왔어요.

그 전에는 어떻게 그런 적막 속에서 살았을까요. 뜨거운 자갈길에 바퀴가 푹푹 빠지는 쇠수레를 홀로 끌고 온 사람처럼, 어떻게 자신에게 그렇게도 가혹했을까요.

그 뒤 당신의 편지가 왔을 때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답장을 썼어요. 우린 아직 만난 적이 없고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어요. 나는 음악을 담보로 당신을 신뢰하기로 했지요. 한동안 홀린 사람처럼 매일 편지를 기다리고 매일 편지를 썼어요.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것은 타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나를 건지는 일이었으니까요. 기나긴 표류를 끝내고 내가 천천히 나의 방안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폐쇄된 방의 열쇠를 오래전에 강물에 던졌는데, 어떻게 내 손에 다시 돌아왔을까요. 나는 그게 내내 신비로웠어요.

30년이란, 실은 말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지요.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 세월 동안 당신은 내게 음악 시디를 만들어서 주었고, 우린 아직도 편지를 주고받고 있어요. 몇 번인가 위기도 있었지요. 그때마다 당신은 양보했어요. 무어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관계를 끝까지 규정하지 않은 채 우리는 새로운 단어들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어요. 당신은, 사랑이 아니어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무수한 단어가 있다고 말했지요. 단어의 가능성이 무한히 있는 한 관계의 가능성도 무한하다고요. 사랑은 우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무수한 나뭇잎 중 한 장일 뿐이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요즘 나는 새벽마다 계곡을 오르는데, 오늘은 계곡 중간에 있는 절 대웅전에 들어갔어요. 부처님께 절을 하고 아침의 어둑한 그늘에 앉아서 시간을 좀 보냈지요. 당신 생각이 났어요. 봉인이라는 단어와 함께요. 우리 사이의 일은 순간순간 모두 봉인될 거라고 당신은 말했지요.

당신은 지금 내 위층에 살고 있어요. 우리는 당신이 사회에서 완전히 은퇴한 10년 전부터 한집에서 생활해 왔지요. 당신은 내 이웃이고 운전수이고 정원사이고 나보다 부엌일을 더 좋아하는 요리사이고 간호사이고 때로는 내가 보살펴야 할 머리카락이 새하얀 아이지요. 무엇보다 당신은 나의 음악이에요. 오늘 내가 계곡에서 돌아왔을 때 당신은 키스 재럿이 말년에 연주한 즉흥 연주곡을 틀어놓고 낡은 앞치마를 두르고 내 주방에서 아침밥을 차리고 있었어요. 자비의 음률 속으로 연주자의 신음소리가 어렴풋이 섞여들고 창가에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팔꽃이 보랏빛 눈을 열고 안을 엿보고 있더군요. 그때 충동적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이렇게 편지에 쓰고 싶어서요. 내 편지를 당신이 자랑스러워하고 몇 번이나 되읽는다는 것을 알거든요.

“K씨, 계획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주어서 감사해요. 우리가 어떤 사이든 상관없이 오직 단둘만이 도달한 이 절대 지점을 나는 믿어요. 영원히 봉인한다 해도 사람은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거죠. 누구하고든, 어떤 관계로든, 어떤 단어로든.”

2042년 칠월 마지막 날, J가 보냄

<전경린 | 소설가>


 

입력 : 2012-08-27 21:10:54수정 : 2012-08-27 21: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