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마지막 편지](47) 이병률 - 나의 시에게, 허수경 시인에게
나는 지금 막 시에게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습니다. 시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마음 한쪽 편이 가득 채워지는 건 먼 곳에 있는 한 시인의 존재 덕분입니다. 이 편지는 그리하여 독일에 있는 당신에게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시에게 당부할 것이 있었고, 야단칠 것이 있어서 같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다음 같이, 다시, 태어나자는 편지를 쓸 참이었습니다. 선배 생각이 달려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시를 생각하면 그리 되었습니다. 불편하게 당신을 시로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시 이야기를 물어봐준 사람이 당신이고, 내 시를 고백한 사람이 당신뿐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여 나의 모든 안부는 당신의 안부이기도 하겠습니다.
선배는 긴 집 공사를 다 마쳤는지요. 나 역시도 공사 중입니다. 불안을 공사 중이라고 해야 할까요.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아도 영원히 시인이라는 말을 어느 좋아하는 선배 시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언젠가부터 그 말이 제일 불편한 말이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그 말처럼 ‘없어 보이는’ 말은, 빈곤해 보이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를 써도 시인이 될 수 없는 세상에 사는 것만 같아 나의 그 불안은 여전합니다. 나의 이 공사에도 참여하시지요. 우리는 사람으로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시로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으로 만났다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이 말에 선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릴 거라 생각하니 저의 생각이 더 맞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너무도 어두운 길 위에서 만난 것입니다. 게다가 멀리서 도착하는 바닷바람에 추웠고 서로의 체온 따위는 아무 쓸모없는 그런 겨울 길 위에서였습니다. 잔가지가 잔바람에 몇 번 출렁하던 그 밤. 나에게 시를 버리고 멀리까지 가라는 말. 그리고 사력을 다해 다시 시에게 돌아오라는 말. 그로부터 그 말은 지금까지 내 동맥을 따라 흐릅니다. 겨울이면 얼어 붙었다 봄이 되면 흐르고 여름이 되어 꽃을 피우고 가을에 익습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드랬습니다. 나를, 시인으로서 증명할 증거는 바로 그 말에 있었습니다.
선배는 요즘 무슨 힘으로 지내고 있습니까. 어떤 불티가 몸에 붙었습니까.
나는 최근 우연히 마주친 미술을 전공하는 어느 대학생의 모습에서 꼭 그맘때 제가 지녔던 미열 같은 것을 대면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꼭 그맘때처럼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얼른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마 돌아갈 수 없어서 돌이킬 수 없어서겠지요. 또 얼마 전 먼 여행 중에 만났던 캐나다 퀘벡 시티의 어느 골목의 그 자상함도 당분간은 저를 오래 붙들겠지요. 마치 그 골목은 저 스스로가 사람처럼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골목이던지 마음의 병을 옮아왔습니다. 당신의 생에서 어느 한번 길을 잃는다면 이곳에서 길을 잃어 달라, 나지막이 내게 당부해오던 골목이었습니다. 그쯤이라면 언제 돌아갈 수 있겠지요.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저 역시도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그렇기에 나의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것을 밀어올리고 익숙한 것을 튕기는 것. 익숙한 것을 껴안고 낯선 것을 털어내는 것. 그렇게 뒹구는 것이 결국은 내 시의 얼굴이 육체에 몸 비비는 방식일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만이라도 내 시를 당신의 시로 씻어주십시오.
이곳은 열망조차도 촘촘히 시드는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구름은 마음대로 일었다 가라앉고 마음도 구름처럼 향방을 잃은 계절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잠시 나침반과 슬리핑백을 내려놓고 폭포를 만나고 싶어집니다. 그 폭포의 힘을 맞아 내가 잘 가라앉기를 바랍니다. 그 폭포는 당신과 함께 맞겠습니다. 선배, 그 폭포 아래서 조금 울어요. 시를 지키는 삶을 살자고 소리치며 엄살하는 내 입을 틀어막아 주세요. 그러다 서로의 따귀를 어루만져야겠습니다.
우리는 비록 멀리 있지만 우리는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닿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만날 수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지는 것처럼, 당신은 멀리에 있으므로 당신은 나에게 시(詩)입니다.
<이병률 | 시인>
선배는 요즘 무슨 힘으로 지내고 있습니까. 어떤 불티가 몸에 붙었습니까.
나는 최근 우연히 마주친 미술을 전공하는 어느 대학생의 모습에서 꼭 그맘때 제가 지녔던 미열 같은 것을 대면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꼭 그맘때처럼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얼른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마 돌아갈 수 없어서 돌이킬 수 없어서겠지요. 또 얼마 전 먼 여행 중에 만났던 캐나다 퀘벡 시티의 어느 골목의 그 자상함도 당분간은 저를 오래 붙들겠지요. 마치 그 골목은 저 스스로가 사람처럼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골목이던지 마음의 병을 옮아왔습니다. 당신의 생에서 어느 한번 길을 잃는다면 이곳에서 길을 잃어 달라, 나지막이 내게 당부해오던 골목이었습니다. 그쯤이라면 언제 돌아갈 수 있겠지요.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저 역시도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그렇기에 나의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것을 밀어올리고 익숙한 것을 튕기는 것. 익숙한 것을 껴안고 낯선 것을 털어내는 것. 그렇게 뒹구는 것이 결국은 내 시의 얼굴이 육체에 몸 비비는 방식일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만이라도 내 시를 당신의 시로 씻어주십시오.
이곳은 열망조차도 촘촘히 시드는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구름은 마음대로 일었다 가라앉고 마음도 구름처럼 향방을 잃은 계절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잠시 나침반과 슬리핑백을 내려놓고 폭포를 만나고 싶어집니다. 그 폭포의 힘을 맞아 내가 잘 가라앉기를 바랍니다. 그 폭포는 당신과 함께 맞겠습니다. 선배, 그 폭포 아래서 조금 울어요. 시를 지키는 삶을 살자고 소리치며 엄살하는 내 입을 틀어막아 주세요. 그러다 서로의 따귀를 어루만져야겠습니다.
우리는 비록 멀리 있지만 우리는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닿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만날 수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지는 것처럼, 당신은 멀리에 있으므로 당신은 나에게 시(詩)입니다.
<이병률 | 시인>
입력 : 2012-08-20 21:36:16ㅣ수정 : 2012-08-20 23: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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