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귀중한것

[내 인생 마지막 편지](49) 문정희 - 나의 잠옷 친구에게

ngo2002 2012. 8. 23. 09:51

[내 인생 마지막 편지](49) 문정희 - 나의 잠옷 친구에게

햇살 속에 벌써 가을이 들어있네요. 비애가 문득 스쳐갑니다. 아니, 비애가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원숙씨네 인디애나 집 넓은 마당에는 지금 어떤 꽃들이 피어있는지요. 햇빛 알레르기가 심한 내가 빨간 우산을 쓰고 토마스씨가 모는 지붕 없는 달구지 차에 실려 포도농장으로 와인을 사러 갔던 저녁이 떠오릅니다. 그 차 이름이 ‘모든 지형에서 가는 차(all terrane vehicle)’라고 했지요. 정원 한쪽에 서있던 작고 투박한 차가 골짜기이든 바위 절벽이든 막힘없이 다니는 차라니요. 마치 원숙씨가 세계 구석구석을 막힘없이 다니듯이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함께 만든 재미있는 사건과 경험들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늘 이 편지는 시칠리아의 추억으로 갑니다.

지난 가을 내가 베네치아에 머물 때 뉴욕 슈퍼마켓에서 돌산 갓김치를 사들고 뛰어온 원숙씨의 우정을 누가 감히 흉내나 낼 수 있겠어요. 내가 북부 뉴욕 작가촌에 있을 땐 죄수복 빛깔의 잠옷을 보내주더니 이번에는 특별 면회를 와준 거지요. 글 감옥에서 글 많이 쓰라는 격려, 정말 감동입니다. 누군가는 경제적인 구애가 없기 때문일 거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원숙씨만이 가능한 어떤 특별함입니다. 그 축복을 받는 사람이 나이고요. 탈영병처럼 베네치아를 빠져 나와 원숙씨를 따라 시칠리아로 갔었지요. 팔레르모 공항에 내려 겁도 없이 마피아로 유명한 그 섬을 우리는 렌터카로 휘젓고 다녔습니다. 드디어 아글리젠토 빌라 아테나에 도착해서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큰 환호를 토했지요. 세상에서 본 풍경 중에 단연 최고의 풍경이었습니다. 야자수 숲 건너 언덕에 환영처럼 떠있는 고대 그리스의 신전은 정말이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침 달이 떠오르는 시간, 올리브나무 사이에 누워 밤하늘과 신전을 한없이 바라보았지요. 세상을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것을…. 바쁘게 쫓기며 분노하고 상처입고 살았던 시간들이 덧없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어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원숙씨가 살며시 내 머리에 꽂아 놓은 하얀 레몬꽃의 향기…. 그것을 꽂은 채로 정원을 걸어 식당으로 갔네요. 식당 바닥 한쪽이 유리로 덮여 있었는데 고대 우물터여서 그렇게 보존하고 있다고요. 기원전의 항아리와 파편들이 몸을 반쯤 지상에 드러낸 채 수천년을 증언하고 있었지요. 시칠리아에 살았다는 여성시인 사포가 이 항아리로 물을 길렀을 것 같아 문득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식당 창가 자리에는 보석으로 치장한 노부부가 사자만큼 큰 개를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지요. 은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개에게 떠먹이는 그 부인을 속으로 마구 미워하고 있는데 원숙씨가 거침없이 지배인을 불렀어요. “저분들이 내일 아침에는 몇 시에 아침 식사를 할 것인지 물어봐 주실래요?” 순간 머뭇거리는 지배인에게 원숙씨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그 시간을 피해 아침을 먹고 싶어요.”소피아 로렌의 딸같이 생긴 젊은 처녀가 일하는 바닷가 식당, 디오니소스의 귀가 있는 시라쿠사에서 화가인 김원숙씨가 특별히 발을 멈춘 곳은 부랑자 같은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는 성당이었습니다. 나는 유리가 없는 이상한 안경 하나를 골동품가게에서 사서 쓰고 골목을 돌아다녔고요. 다시 베네치아 공항에서 원숙씨는 인디애나로 가고 나는 리도로 돌아갈 때 원숙씨가 내 가방에 넣어준 잠옷은 물론 지금도 글 쓸 때 입곤 해요. 원숙씨 말처럼 시인의 글 감옥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죄수복이니까요. 써놓고 보니 화려하기만한 편지네요. 하지만 원숙씨가 길러낸 두 입양 자녀들, 고독과 상처와 슬픔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음에 하기로 해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몸으로 보여준 보석 같은 친구 김원숙씨, 마지막이 아니라 마지막처럼 이런 편지를 우리 몇 번이고 쓰고 또 쓰고 살아요.

<문정희 | 시인>


 

입력 : 2012-08-22 21:28:19수정 : 2012-08-22 22:4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