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귀중한것

[내 인생 마지막 편지](51) 전상국 - 천국에 계신 유재용 형께

ngo2002 2012. 8. 29. 09:41

[내 인생 마지막 편지](51) 전상국 - 천국에 계신 유재용 형께

2522. 형이 없는 형네 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돌아가신 뒤 처음 듣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형이 그토록 애틋이 사랑하던 정현과 국현의 소식을 듣습니다. 결혼 전부터 선교활동을 함께한 국현이 부부가 미국에서 자신들의 꿈을 펼치는 가운데 며느님이 둘째 애기를 가졌다는군요. 정현이 역시 어렵게 얻은 딸을 키우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정현이 국현이 두 남매를 두신 것처럼 형은 <꼬리달린 사람> <성하> <관계> <누님의 초상> <화신제> <아버지의 강> <한여름 밤의 꿈> 등 일곱 권의 중·단편집과 <성역> <비바람 속으로 떠나가다> <야성의 숲>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 <그들만이 꿈꾸는 세상> <사로잡힌 영혼> 등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이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형은 이 시대의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 큰 작가였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 능청과 시치미가 작품의 깊이, 그 철학의 형상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짐으로써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어떤 높은 경지를 독자에게 안겨주는, 형 특유의 맛깔스러운 작품을 쓰셨지요. 형은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긍지와 위엄을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관되게 자기 길을 걸어온 우리 시대의 존경 받아 마땅한 전업 작가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가을이었습니다. 등단하여 만 10년 동안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하다가 새로이 글쓰기를 시작해 처음으로 쓴 ‘전야’라는 작품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때 형은 제가 사는 상봉동과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둔 면목동에서 코흘리개 아이들 상대의 문방구를 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형과 저는 승패를 초월한 바둑 두기를 즐기는 가운데 깊은 우의를 쌓기 시작했지요. 형과 저는 문학동네의 각종 모임이며 그렇고 그런 자리의 그 허다한 술자리까지 남들 표현대로,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붙어 다녔지요. 사람들은 그 어떤 위엄이나 허세를 보이지 않는 형의 그 진솔함을 좋아했지요. 형은 상대가 누구이든 만나기만 하면 그 특유의 어눌한 말씨로 남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얘기를 누구보다 적나라하게 객관화할 줄 아는, 진정 자신을 낮출 줄 아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형의 그 우스갯소리를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듣고 싶습니다. 필요 이상 엄숙한 장소에서 느닷없이 던져지는 형의 농담 한마디가 그 분위기를 바꿔놓곤 했지요. 지금도 저는 그때 형한테 들은 이른바, 와이담 몇 개를 형이 늘 그러했듯 그 이야기의 출전까지 밝혀가며 써먹곤 하지만 결코 형처럼 사람들을 웃기지는 못합니다. 1980년대 초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형과 제가 경향신문에서 장편소설 연재를 제의 받은 뒤 두 사람이 앞뒤로 이어 소설을 연재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생활이 어려웠던 형으로서는 고정적으로 나오는 원고료가 큰 도움이 된다면서, 대중성이 별로 없는 작품을 연재해준 신문사가 참 고맙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지요. 그때의 그 신문에서 <내 인생 마지막 편지>란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형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편지의 대상을 천국에 계신 형께 전할 소식 하나도 생각났습니다. 형이 2008년 김유정탄생100주년 때 마지막 다녀가신 춘천 실레마을 소식입니다. 경춘선 폐철도를 이용한 강촌과 김유정역을 오가는 레일바이크가 오늘(8월10) 개통되면서 김유정역 광장에 북스테이션 조형물이 세워졌습니다. 책꽂이 형태의 대형 조형물은 김유정 등 29명의 강원도 저명 작가들의 소설책이 세워져 있는데 바로 그곳에 형의 소설 <관계> <비바람 속으로 떠나가다> <사로잡힌 영혼> 등 세 권의 소설책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숱한 절망과 싸울 때 무너지지 않도록 버텨준 것이 바로 소설이었다’는 형의 말씀처럼 형이 쓴 소설이 지금 당신의 고향 강원도 산골 북스테이션 구조물 한가운데 단연 돋보인다는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합니다.<전상국 | 소설가>입력 : 2012-08-28 21:21:44수정 : 2012-08-28 21:2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