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귀중한것

[내 인생 마지막 편지](52) 탁현민 - 재수 좋은 날… 신영복 선생님께

ngo2002 2012. 9. 10. 10:17

[내 인생 마지막 편지](52) 탁현민 - 재수 좋은 날… 신영복 선생님께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날이 떠오릅니다.

공인 문제아였던 제가, 담배를 피우다 하루에 세 번 걸린 날이었었죠. 저는 교무실 한쪽에서 모눈종이에 반성문을 쓰며 머리를 쥐어박히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 세상엔 이렇게 재수 없는 날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습니다.

그날, 오가는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렇게 있다가 문득 국어선생님 책상에 꽂혀 있는 한 권의 책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바로 선생님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을 보며 감옥이나 학교나 비슷하겠거니 하는 생각과 그 안에서의 사색이라면 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는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날은 제 생에 가장 재수 좋은 날이었습니다.

책에는 자신을 가둔 곳에 대한 분노나 갇혀 있는 마음의 불편함이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책에는 감옥이라는 그 살벌한 공간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참선수도의 도량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선생님은 오히려 감옥 밖에 사람들보다 자유롭게 혹은 더 넓게 세상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모습은 학교가 감옥이고 그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18살짜리 문제아에게 무척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몸의 구속이 마음의 구속과 무관하다는 사실. 나를 가두는 것은 학교나 감옥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감옥 밖에 사람들이 때로는 더욱 갇혀 살고 있다는 말씀에서 그제야 내 삶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다만 책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을 직접 뵙겠다는 열망으로 저는 선생님이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는 성공회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과의 인연은 제가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졸업을 하고 무대를 연출하고 행사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면서 때로는 어설픈, 때로는 부담스러운 자리에도 제자의 부탁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은 나와주셨습니다. 다만 나와주신 것뿐 아니라 잊고 있었던 것들을 알려주시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선생님 앞에서는 많이 듣고 적게 깨우치는 미련한 학생이 됩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즈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은 당대에는 없어요. 옛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모범이 된다는 것이 옳은 것만은 아니에요. 부단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적인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는 (스승은) 그저 참고할 만할 뿐이에요.”

선생님의 말씀은, 사표가 되기를 부담스러워 하시는 마음, 어쩌면 가히 멘토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한 이 불안의 시대에, 결국 그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생님.

제 삶에 마지막 편지를 꼭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무엇인가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게 된 것은 저의 노력과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겠지만, 그 안에 뭔가 쓸 만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선생님께 배웠거나, 혹은 배우려 노력했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공부란 생명이 존재하는 형식이에요.”

삶 속에서 무엇이든 깨달으려 노력하는 것. 그래야만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어쩌면 그 순간이 제 삶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 편지를 선생님께 쓸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탁현민 | 공연연출가>


 

입력 : 2012-09-09 21:53:17수정 : 2012-09-09 21:5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