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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여러 세계 가로지르기

ngo2002 2011. 12. 5. 08:58

[이정우의 철학카페]여러 세계 가로지르기

아침에 일어나서 TV를 본다. 낮에는 열심히 스마트폰을 조작하면서 각종 이미지들을 받아들인다. 저녁에 집에 와서는 비디오를 보거나, 아니면 외출해서 영화를 본다. 일요일에는 집에서 뒹굴면서 영화 보고, TV 보고, 만화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스포츠게임을 본다.
현대인에게 이런 삶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현대인에게 삶이란 항상 무엇인가를 ‘재현’한 것이다. 실제 전쟁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전쟁 장면을 감상한다. 실제 로맨틱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TV 연속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진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으로 싸움을 하고, 진짜 모험을 하기보다는 만화에서 모험을 감상하거나, 스포츠게임을 보면서 짜릿함을 느낀다. 현대인에게 삶이란 실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것을 재-현(re-present)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차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이차, 삼차, 사차, …의 재현적 삶이다.

어린아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실제 기린을 보기 전에 기린 장난감, 기린 그림, 기린의 영상을 보고 자란다. 한참 큰 후에 실제 기린을 보고서, 비로소 말한다. “아! 저게 그 기린이구나!” 꼭 기린 같은 특별한 동물이 아니어도, 일상적인 사물들, 식물들, 동물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지난 세기 말에 활동했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현실을 시뮐라시옹으로 개념화한 바 있다. 모든 것이 본래적 사물들이 아니라 시뮐라시옹(시뮬레이션)으로서 존재하는 세계,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를 이렇게 개념화한 것이다.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지만, 현대사회의 한 특징을 잘 잡아낸 사유라 할 것이다.인간은 항상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바둑의 세계, 학문의 세계, 법의 세계, 스포츠의 세계 등등, 숱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해, ‘세계’는 한 인간의 삶의 선험적 지평을 이룬다(‘선험적 지평’이란 하나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장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과하게 되는 일반적인 세계들(가족의 세계, 학교의 세계, 남자의 경우 군대의 세계, 직장의 세계 등등)이 있고,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살아가게 되는 세계들도 있다. 인간의 삶이란 허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거나, 여러 세계들을 통과하면서 이루어진다.


생각을 좀 넓게 해 보자. 특정한, 구체적인 세계가 아니라 ‘세계’라는 말의 가장 넓은 맥락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인류가 크게 네 종류의 세계를 통과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세계는 인간의 경험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세계(‘세계 1’이라 할 수 있다)이다. 땅과 하늘, 산과 강을 비롯한 자연, 그리고 집, 옷, 음식 등등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세계, ‘현실세계’이다. 두 번째의 세계는 상상세계이다. 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 손오공, 도깨비가 살고 있는 세계 등등이 이 세계이다. 첫 번째 세계가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라면, 두 번째 세계(‘세계 2’)는 신화, 전설, 종교 등이 말하는 세계이고, 고급하게는 형이상학이 추구했던 세계이다. 물론 상상세계란 현대인의 표현이다. 전통 시대의 사람들은 이 세계를 실재하는 세계, ‘초월세계’로 이해했다. 역사학적으로 말해 ‘고중세’에 속하는 시대의 사람들은 이 두 세계, 즉 현실세계와 초월세계 사이에서 살아갔으며, 늘 이 두 세계의 관계를 사유하면서 살아갔다. 근대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세계 3’이 등장했다. 바로 미시세계, 마이크로의 세계가 그것이다. 근대 이후 발달한 자연과학은 우리에게 끝없이 미시로 내려가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세포의 세계, 분자의 세계, 원자의 세계, 미립자 세계 등등.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나노’의 세계는 이런 흐름의 첨단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현대 문명은 이 미시세계에 대한 인식을 테크놀로지로 바꿈으로써 성립한 문명이다. 그러나 이제 제4의 세계, ‘세계 4’가 등장한 듯하다. 가상세계, 가상현실, 가상실재, 사이버월드로 불리는 세계가 그것이다. 이 세계는 한편으로 ‘세계 2’와 통한다. 그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의 모습과 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2’가 형이상학적 아우라를 담고 있다면, 이 세계는 오히려 상상과 오락의 세계라는 모습을 띤다. 또, 다른 한편 이 세계는 미시세계와도 통한다. 다만 미시세계가 ‘원자’의 세계라면 이 세계는 ‘비트’의 세계이다. 양자는 과학기술이라는 세계에 속하기는 하지만, 전자가 물질의 세계인데 비해 후자는 이미지의 세계(따라서 과학의 세계이기보다는 문화의 세계)이다. 이렇게 제4의 세계는 제2의 세계와도 제3의 세계와도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뮐라시옹의 세계는 바로 이 제4의 세계이다. 인간이란 그 본성 속에 재-현의 운명을 타고 났다. 사실 책 자체도 재현의 산물이다. 오늘날의 재현물에 비해 너무나도 고전적이어서 얼핏 재현물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인간은 태초부터 그림이나 글로 자신의 삶을 재현해 왔고, 그것이 곧 ‘인간적 삶’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오늘날의 시뮐라시옹의 세계는 진짜와 가짜의 구분 자체를 아예 무력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극은 고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개념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부담’조차도 없는 듯하다. 그야말로 어이없는 허구들이 판치고 있고, 실재와 허구를 구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 허구들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는 인식론자들을 비롯해 학자들까지도 이런 사태를 기정사실화해서 상대주의, 주관주의, 반(反)실재론이 판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덮어놓고 시대를 부정하면서 고전적인 실재론을 부활시키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존재론적 미덕은 여러 세계들 각각의 의의를 인정하면서(그러나 어디까지나 현실세계를 기본으로 해서) 여러 세계‘들’을 가로지르는 것이리라<이정우 | 철학자 jwlee@assist.ac.kr>입력 : 2011-12-04 20:59:58수정 : 2011-12-04 21: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