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로시티-슬로푸드- 이젠 슬로로드다 입력시간 : 2009. 07.10. 00:00
"팍팍한 도심과 업무에 찌든 일터에서 잠시나마 탈출하고 싶다." "그러면 어디로, 아니 어떤 길로…" 모처럼 만에 일상 탈출이니 만큼 굽이굽이 돌아 시원한 계곡이나 넓은 들판에서 한 숨을 돌릴 수 있고 풀 냄새, 흙 냄새 물씬 나는 한적한 옛 시골길은 어떨까. 화순에서 능주가는 옛 길이나 담양·창평에서 곡성·구례 가는 길, 나주에서 무안·함평·목포 가는 길, 광주에서 영광 가는 길 등 갈래갈래 전라도 남도땅에서 옛 정취를 만끼할 수 있는 슬로로드(Slow Road)는 무진장 많다. 경운기 타고가는 아저씨, 아가씨 볼처럼 잘 익은 복숭아를 쌓아놓고 파는 아줌마, 시골장터에서 만난 국밥집 아줌마와 뻥튀기 아저씨, 개울가에서 떠드는 아이들 목소리. 가는 곳마다 추억이 떠오르고 정이 넘쳐난다. 그래서 올 여름 휴가철에는 조급함을 벗어던지고 느리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나만의 길로 일상탈출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슬로푸드에서 슬로시티, 이제는 슬로로드가 대세라면 정겨운 옛길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듯 싶다. 슬로시티 창시자 이탈리아 사투르니니 전 시장은 '슬로(Slow)는 불편함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순리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지난 1999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슬로시티 운동은 속도 지향적 삶에 반기를 든 것이고, 패스트 푸드에 기초한 패스트 라이프에 반대해 시작된 운동이다. 슬로푸드와 슬로시티에 이어 역시 슬로로드도 속도에 반기를 든 것이고 빠른 세상살이에 발상의 전환을 꿈꾸는 것이다. 전통과 생태 등 느림의 철학이 바탕이니 남도 땅에서 슬로시티로 지정된 신안 증도와 완도 청산도, 장흥 장평·유치, 담양 창평도 이제는 슬로로드로 가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경제적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조급함이 우선이고 느림은 지탄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KTX가 등장하면서 통일호 완행열차 추억이 사라졌고,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국도·지방도 옛길을 찾는 사람이 줄어 문을 닫는 식당들이 늘고 있다. 생계를 위협받는 주민들은 도로에까지 나와 좌판을 깔았다. 광주에서 화순 능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나 도로 주변에는 요즘 한창 제철인 복숭아 좌판이 줄을 서고 있다. 어린시절 유독 좋아했던 복숭아를 보니 옛 기억이 떠오른다. 저녁이 오면 가족들은 모닥불 피우듯 보리짚(속살에 들어가 애간장을 태웠던)을 모기향 삼아 옹기종기 편상에 올라 어머니의 선물(?)을 기다린다. 다름아닌 벌레가 먹거나 상처가 난 볼품없는 복숭아다. 단맛을 쫓는 벌레의 속성상 볼품보다는 맛나는 최고품을 찾다보니 어두컴컴한 저녁에만 복숭아를 먹었다. 잘 뚫린 고속도로가 볼품이라면 옛 정취가 묻어나는 시골길이 최고품이 아닐까. 시골길은 덜거덕 덜거덕 삐그덕 삐그덕 달구지가 가던 길이고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논밭 일을 끝낸 뒤 해질녁 핑경소리 들으며 소를 끌고 가던 추억의 길이다. 키우던 집돼지들이 마을 밖으로 뛰쳐나와 동네 어른 아이들 모두가 돼지잡기 소동을 벌였던 곳도 마을 어귀부터 시작된 시골길이다. 새로 뚫린 고속도로에 밀려 '변방 도시의 섬'으로 전락한 오래된 읍내가 시골길 신세지만 아직도 도시의 때묻지 않은 추억과 정이 넘쳐나는 곳이다. 먼 훗날 시골길 주변 농촌마을에서 계단식 경작이나 그림을 그리는 농부, 정육점 앞에서 마당판이 펼쳐져 외지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풋풋한 사람냄새 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이른 아침부터 7월의 뜨거운 햇살이 방안까지 치고 들어왔다. "오늘이 취재 가는 날인데, 이를 어쩌나…." '젊음의 계절'이라는 여름이 찾아오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깊은 계곡이나 바다를 찾아 휴가를 떠난다. 휴가 첫날 아침부터 부랴부랴 준비물을 챙기면서 휘파람을 불지만 도로를 나서자 마자 '극심한 정체'로 인해 고통의 시간이 시작된다. 유명 피서지로 가는 고속도로에는 차들로 이미 주차장이 되고 가족들은 자동차 안에서 지쳐버린다. 그러나 오직 하나, 국도나 지방도를 타면 너무나 한적한 옛날 시골길로 이어져 마음마저 편해진다. 취재진이 슬로로드 대상지로 찾아간 곳은 화순읍에서 능주 읍내까지 가는 2차선 옛 도로. 새로운 4차선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화순-능주간 옛 도로는 흔한 세 자릿수의 지방도로 번호마저 없다. 장날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그 길은 지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소통이 뜸한 시골길로 변해가고 있었다. 능주 마을로 이어진 길을 천천히 달려본다. 풀이 우거진 냇가 강물에 잠시 앉아 '혹시 물고기라도 있나'하고 안을 들여다본다. 초등학교 때다. 무더운 한여름 친구들끼리 소꼴을 망태기에 한가득 채우고 나면 장난기가 발동한다. 서로의 눈치를 살필 것도 없이 입은 옷을 몽땅 벗어던지고 냇가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물고기, 우렁이, 조개를 잡고 물장구 치며 한참을 놀다보면 어느새 하늘에는 저녁놀이 올라온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분다. 오랜만에 한가한 도로를 도란거리며 걷는 기분도 좋다. 가로수 사이사이로 하얀 들국화가 길동무를 한다. 길 위에서 내려다 본 철길은 또 다른 느낌이다. 마음이 넉넉해진다. 나도 모르게 학창시절 즐겨 부르던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 가 생각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오늘, 나그네가 걷는 이 길은 몇 십 년의 시간을 훌쩍 거슬러 가는 느낌을 받는다. 가는 길에 굽이굽이 돌아가는 영산강 물줄기가 그렇고, 막걸리에 김치 등 새참을 준비해가는 아낙네의 풍경도 그러하다. 만약 멈춰선 철길에 열차가 달린다면, 이곳은 분명 60년대의 한 복판이다. 다시 길을 따라 천천히 달려본다. 아주 작은 마을을 지난다. 만수리 마을이다. 아직은 조금 이른 시기인 것 같지만 한 농민이 구슬땀을 흘리며 복숭아를 수확하는 모습이 들어온다. "벌써 복숭아가 나오네요" "조생종이 나오고 있제, 8월 중순이나 돼야 더 맛있는 복숭아를 맛볼 수 있을꺼여. 그때 꼭 다시 오드라고…." 이 마을은 화순의 대표적인 복숭아 마을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고 있는 명소가 됐다. 길을 가다보면 화순 5일장의 모습도 보인다.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마음속이 아련해진다. 장날 아침의 풍경. 장보러 가는 이들의 행렬이 길다랗게 이어지고 있다. 장바구니를 들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아낙들, 자전거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 지팡이를 짚고 가는 할머니…. 한 눈에 봐도 모두들 장에 가는 길이다. 어린 시절 장날 가는 길은 가장 기쁜 날이다. 늘상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갔던 장날에는 옷이나 신발이 선물로 들어오고, 맛있는 자장면도 덤이었다. 그렇게 들어온 신발은 이부자리 속에서도 만지작 만지작 하다 잠이 들곤 했다. 오늘이 그런 장날이다.
화순 5일장도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풍경을 가졌다. 수십여개의 천막이 모여 있다. 50∼60년대 정취가 묻어나는, 옛날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그런 화순장의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장날은 특별하다. 생의 터전을 그곳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만남과 소통의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국밥집에서 모처럼의 안부 인사와 함께 누구 자식놈 장가가는 소식, 농사철 얘기까지 다양하다. 뻥튀기 아저씨를 찾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결근이다. 아련한 어린시절 흔적이 살아있는 화순장의 풍경과 기억도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다.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조만간 새롭게 변화를 시도한단다. 아마도 모두 허물어지고 그 위엔 새로운 것들이 사뿐히 들어설 것이다. 날이 어둑해지자 더욱 조용해진 능주간 도로 한복판에서 한 노인이 자전거에 몸을 기대며 쉬고 있다. 사회에서 찌든 현대사람들의 모습에서는 볼 수 없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옛 정취와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화순읍∼능주 읍내 가는 도로. 아직도 여운이 남아 한참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뚱띵이 아줌마, 여기 막걸리 하나 더 줘요"
화순장에서는 '금성식당'이라는 이름보다 '뚱띵이집'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 주인공은 화순장터에서 30년이 넘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복순(58·여)씨.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살이 많이 빠졌지만, 얼굴과 몸이 '동글동글'한 모습에서 단골 손님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장터에서 가장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은 밥집이다. 5일마다 열리는 화순 장날이라 그런지 몰라도 김 씨의 식당안에는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인사를 주고 받으며 막걸리 잔이 돌아가고 있었다. 김 씨는 "옛날에는 좁은 입구에 까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찼던 식당이다"며 "항상 신선하고 새로운 식재료로 정성껏 만들고, 편히 먹고 갈 수 있다는 점이 비결같다"고 말했다. 이 식당은 홍어탕이 주메뉴로 밀려드는 손님에 김 씨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였다. 홍어탕은 1인당 5천원을 받고 있다. 밥값이 싸다고 맛이 떨어진다면 큰 오산이다. 홍어탕을 시키면 돼지고기 수육과 해산물도 듬뿍 들어간다. 여기에다 주인아주머니의 인심과 손맛까지 더해져 장날 외에도 손님들이 넘쳐난다. 김 씨는 "30년이 넘게 식당을 운영하면서 단골손님들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어서 좋다고들 한다"며 "우리집은 시골 양반들이 부담없이 막걸리라도 한잔 하고 갈 수 있는 곳이다"고 말했다. 행여나 시장 현대화 바람을 타고 내년 이맘 때 김 씨의 식당이 변해버릴까 하는 걱정도 되지만 시장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는 대신 풍경과 기억까지 사라지지 않은 모습을 기대해 본다. 주변 볼거리 능주향교 능주향교는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창건되었다고 능주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면 원래는 능성향교로 있었다가 인조 10년(1632) 능주목 승격 후 능주향교로 개칭한 것 같다. 선조 30년(1597)에 이르러 정유재란의 병화로 소실되었으며 선조 33년(1600) 능성현령 하응도가 증건하였으나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 3년(1611) 동국오현의 문묘종사가 결정되어 전국의 향교에 이들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이에 능주향교에서는 5현의 위패를 봉안할 동무와 서무를 현령 윤수의 주관하에 건립되었으며 이전의 향교 규모를 점차 확충했다.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 유허비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능성에 귀양을 왔던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을 추모코자 세운것이 적려유허비이다.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말한다. 이 적려유허비는 능성현 당시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만 갖추었고 귀두도 형상만 다듬었다. 비문은 의정부우찬겸성균관제주세자이사 송시열이 짓고 전서(篆書)는 충청도관찰사 겸 수군절도사 순찰사 민유중이, 글씨는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이 썼으며 현종8년(1667) 4월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건립했다. 영벽정 영벽정은 계절에 따라 변모되는 연주산의 경치를 맑은 지석강 물에 투영돼 운치있게 바라볼 수 있다해 붙여진 이름으로 능주팔경(영벽상천(映碧賞泉)중 하나이다. 2층의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이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l488~l545)의 제영, 신증동국여지승(148I~1531신증), 김종직 (1431~1492)의 시로 보아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 10년(l632)에 능주목사 정연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개수했다고 전해지고 고종 9년(1872) 화재로 소실돼 이듬해 고종 l0년(l873) 목사 한치조가 중건했다. 삼충각 삼충각은 선조26년(1593) 진주성 제2차 혈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최경회(1532~1593)선생과 문홍헌(1539~1593) 그리고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으로 해남 달량포에서 전사한 조현 등 3인의 충절을 표창하기 위해 명정된 것을 숙종 11년(1685)에 관민에 의해 건립된 3동의 정려건물이다. 전면을 향하여 좌측건물이 최경회 선생의 정려이며 가운데가 조현의 정려, 오른쪽이 문홍헌의 정려이다. 정려란 본래 충신, 효자, 열녀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하는데 오늘날 대개 본 삼충각과 같이 각(閣)으로 존재하고 있다. 강동준 · 박지훈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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