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산행,걷기)

29.지리산길<하> 길을 가다 무엇을 보았느냐

ngo2002 2011. 8. 25. 15:00

지리산길<하> 길을 가다 무엇을 보았느냐


입력시간 : 2008. 12.25. 00:00


새악시 볼 같은 홍시 유혹 뒤로하니 '삿갓배미' 펼쳐지고

등구재서 당근 캐는 할머니 "이래뵈도 얼매나 맛있다고"

-장돌배기도 넘고 보부상도 넘고 남원 인월장을 보러가던 함양의 아낙들도 넘던 고개다. 어디 그 뿐이랴. 해가 지면 빨치산이 넘고 해가 뜨면 토벌대가 넘었을 고개다. 생사의 기로에 선 사내들이야 담배 한 모금일망정 어찌 맘 놓고 피웠겠는가. -

다랑이논에 의지해 이어갔을 모진 목숨들이 눈물겨워 고개를 숙이는데 출입금지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고사리 밭이다. 빗질하지 않은 머리칼 같은 고사리들이 다랑이논에서 시들어 말라버린 채 겨울을 나고 있다. 봄철 산나물로 시장에 내다 팔기위한 고사리를 지나가는 우리네가 탐을 내나보다.

마침 주막 하나 있어 쉬어 갈 겸, 짐도 정리할 겸 파전에 동동주 한 잔 걸치고 일어서니 눈앞에 가파른 고갯길이 나를 기다린다.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삼봉산과 백운산 사이의 등구재다. 정상에 오르니 '거북의 등을 닮았다’하여 등구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장돌배기도 넘고 보부상도 넘고 남원 인월장을 보러가던 함양의 아낙들도 넘던 고개다. 어디 그뿐이랴. 해가 지면 빨치산이 넘고 해가 뜨면 토벌대가 넘었을 고개다. 고개를 넘던 남원의 목기장수는 지게를 멈추고 담배 한 모금으로 시름을 달랬겠지만 생사의 기로에 선 사내들이야 담배 한 모금일망정 어찌 맘 놓고 피웠겠는가.

혹시 모르는 일. 최참판댁의 머슴이던 구천이가 별당아씨와 사랑에 빠져 지리산을 떠돌다 이 곳에서 거친 숨을 거둬들이며 잠시 쉬어갔는지 내 어찌 알겠는가.

영원한 노스탤지어 강쇠 형님

등구는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서 변강쇠와 옹녀가 마지막으로 정착해 살던 곳의 지명이기도 하다. 실제(?)의 등구마을은 이 곳에서 족히 1시간 정도는 더 내려가야 하는 창원마을에서 다시 1시간 이상 가야하는 건너편에 따로 있다. 하지만 어디 강쇠 형님과 옹녀 누님이 아무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함께 살았겠는가. 그 보다는 이런 고개마루에서 단 둘이 살면서 사랑을 불태웠다는 설정이 더 나을 성 싶다.

남성들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인 강쇠 형님을 뒤로 하고 등구재를 넘어,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들어서는데 길옆 왼편 산기슭에 감나무 10여 그루가 새악시 볼 같은 홍시꽃을 피운 채 까치 밥상을 차려 놓고 있다. 홍시들의 투명한 붉음이 유리전구에 불을 밝혀 놓은 것처럼 맑다. 상젤리아 거리의 일부를 산골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이 겨울 텅 빈 배로 먹이를 찾을 날짐승 생각으로 맛보고 싶은 간절함을 달래보지만 그래도 홍시의 달콤한 맛은 혀끝에 되살아 난다. 아마도 감나무가 다른 과실수에 비해 유난히도 쉽게 부러지는 것은 까지 밥을 탐내는 인간의 접근을 막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하나를 대신 얻는다.

등구재를 한참 내려오니 몇 가지 음료와 소주, 고사리와 산나물 등을 파는 원두막 같은 간이 점방이 농로 옆에 설치돼 있다. 예전에는 무인가계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무인가계 표시가 보이지 않는다. 추정해볼 뿐이다.

등구재를 넘어도 산비탈을 점령한 다랑이논은 여전하지만 남원쪽 다랑이논이 형이라면 함양쪽은 아우에 비유할 수 있겠다. 좀더 작다. 다랑이논을 '삿갓배미’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 농부가 논을 간 뒤 집에 가려고 삿갓을 벗으니 그 안에 논이 하나 숨어 있었다’라는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선인들의 비유에 미소가 절로 난다.

“내 씻어줄게 함 먹어봐라!”

넉넉한 산골인심이야 어디 가겠는가. 다랑이논의 축대를 바람막이 삼고 볏짚을 의자삼아 점심을 먹은 뒤 등 따숩고 배부른 넉넉함으로 내려오는데 다랑이논에서 할머니 한 분이 호미로 무어인가를 열심히 캐내고 있다. 언 듯 보니 당근 같기는 한데 너무 작다. 어떤 것은 가운데 손가락이요 어떤 것은 새끼손가락이다. ‘무엇을 캐고 계세요?’ 물어보니 당근이 맞기는 맞다.

"이게 이래뵈도 얼매나 맛있다고. 가자. 우리집 가서 내가 씻어줄게. 함 먹어봐라”

들풀에 쓱쓱 문질러서 한 입 베어 먹으니 시원하면서도 달착지근한 게 그 맛이 기특하다. 할머니는 논 둑 풀잎에 대충 흙을 털어내는 폼이나 맛있다는 말이 마음에 드는지 흡족히 웃으며 몇 개를 더 쥐어 주려한다. 누군가에게 나도 저런 넉넉함으로 비추고 싶다.

등구재를 넘어 점심을 먹고 해찰을 부리다 1시간쯤이나 지났을까. 발길이 마을 앞에 멈춘다. 발길이 멈추면서 시간도 함께 멈추는 듯하다. 무너질 듯한 돌담장과 그 너머의 오래된 감나무가 한 겨울 적막 속에서 흐르는 시간마저 정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이다.

키 작은 돌담장 너머로는 곶감들이 주판알을 늘어놓은 듯이 주렁주렁 널려 산바람에 익어가고 감나무는 지천이다. 늙은 느티나무는 당산나무가 되어 마을을 지키고 늙은 감나무는 가목이 되어 집안을 지키는 창원마을이다. ‘등구 마천 큰애기는 곶감 깎기로 다 나가고, 효성 가성 큰애기는 산수 따러 다 나간다’라는 민요가 구전될 정도로 감나무가 많은 동네다.

시간도 멈춰버린 감나무골 창원마을


창원마을에서 내려와 지리산 하봉과 중봉을 바라보며 경치 감탄을 하며 걷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며 시야를 가린다. 지리산길 1구간의 마지막인 금계마을로 향하는 오르막길 차도 왼편에 왠 큰 기와집 한 채가 불쑥 튀어나와 시야를 가린 것이다. 무슨 심사일까. 지리산의 풍경과 기운을 독차지 하겠다는 것일까. 씁쓸한 기분으로 옆을 지나는데 이번에는 맹견 두 마리가 금방이라도 목줄을 끊고 달려들 듯이 사납게 짖어댄다.

맹견인지 광견인지의 쌍짖음이 귓가에서 사라질 즈음 이번에는 왼편 산기슭에서 거대한 채석 작업이 한창이다. 자세히 보니 무슨 거대한 불사 같기도 하다. 시원하게 뚫렸던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내 발만 아플 줄 뻔히 알면서도 돌맹이 하나 힘껏 차 날려 보낸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니 발길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하천이 ‘네 마음이나 먼저 씻으라’며 조용히 타이른다. 멀리는 뱀사골에서, 가까이는 칠선계곡에서 흘러드는 물이 서로 만나 이룬 금계마을 앞 엄천이다. 다랑이논 같은 작은 마음을 이제 그만 버리라는 듯이 겨울 하천은 강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다.

지리산길 1구간의 종착지이자 2구간의 출발선인 금계마을에 닿으니 풍경이고 마음이고 산사모드에서 갑자기 도회모드로 바뀐다. 달리는 차량과 사람들의 소음이 그렇고 즐비한 상점과 간판들이 그렇다. 촌놈, 서울역에 처음 내린 듯 하다. 멈췄던 시간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소, 풀 뜯으며 걷는 듯한 걸음으로 한 발 두 발 옮긴지 4시간쯤이나 됐나보다. 출발지인 남원 매동마을까지 가려면 택시비 1만5천원 정도 감안하면 된다. 지리산길 2구간까지 간다면 금계마을에서 하룻밤 민박을 하며 쉬어가는 게 좋다.

1구간만을 목표로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기운도 남고 시간도 남거들랑 금계마을 앞 의탄교를 건너 자연석 암반안의 수많은 불보살을 뵐 수 있는 서암정사나 서산대사를 뵐 수 있는 벽송사를 다녀 올수도 있다. 벽송사와 서암정사는 같은 방향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사찰내부를 둘러보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돌아오는데 오른편에 있던 천왕봉이 슬그머니 왼편으로 와서는 귀에 대고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글쎄 무엇을 보았더라? 봄날에 다시 와야 할 모양이다. 천왕봉이 빙그레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가는길

대중교통: 남원행 버스 - 인월행 버스 갈아탐(남원터미널-인월간 30분소요) - 매동마을까지 걷거나(9㎞)나 시내버스이용(10분소요)

자가용: 지리산IC - 인월- 인월면 지리산길안내센타(주차)- 매동마을까지 걷거나 시내버스 이용

기타 자세한 사항은 지리산길안내센터 (전화 063-635-0850)나 지리산길 홈페이지(http//www.trail.or.kr)참조

준비물

식수(겨울철에는 많이 필요치 않으며 도중에 주막이나 사찰에 들려 구입가능)

여벌옷(자주 쉬는 경우가 발생하므로 보온을 할 수 있는 여벌 옷 필요)

지도(지리산길안내센터에서 소책자구입가능. 사전에 지리산 지도를 구입해서 보는 것도 도움이 됨)

도시락(도중에 점심을 먹어야 함)

비상약(일반 산행에 비해 부담이 없으나 평소 많이 걷지 않은 사람에게는 4∼5시간이 소요되는 산길이라고 생각하여 비상 약품이 필요함)



사진/ 메인사진으로 어떤지//25-16-사진 3274번

지리산길은 매동마을에서 첫 발을 내 딛을 때부터 1구간 종착지인 금계마을에 이를 때 까지 지리산 두류봉과 하봉- 청왕봉- 제석봉-연하봉 등이 서로 교대해가며 하얀 중절모를 쓴 채 말없이 동행한다. 다랑이논 너머 멀리 지리산 주능선들이 흰눈에 쌓여 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18-16-사진번호 3250

지리산길의 독특한 이정표. 빨간 화살표는 전북 남원에서 경남 함양 방향이고, 검정 화살표는 함양에서 남원 방향을 가리킨다. 화살표가 구부러진 이유는 길이 굽었다는 의미다.

18-16-사진설명 3289

지리산길 1구간 종착지인 금계마을앞에서 바라본 엄천의 의탄교와 지리산길 이정표. 다리를 건너 계곡을 타고 30여분쯤 올라가면 암벽속에 불상을 조각한 서암정사와 서산대사가 수도 정진한 벽송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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