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명리

9.어머니의 산 지리산(2)

ngo2002 2011. 4. 18. 09:38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9.어머니의 산 지리산(2)


2009년 12월 28일 00시 00분 입력


산속 습지는 수 없이 많은 생명의 탯자리

선비샘에 얽힌 서글픈 사연 연민의 정

'세석평전' 야생 동식물 오아시스 역할

이른 새벽 벽소령의 푸른 달빛을 받아가며 더 높은 곳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다. 조용한 산길에 칼바람 소리는 등산복의 나풀거리는 소리와 함께 귀청을 후비며 매섭게 들려온다. 시들다만 억새 평원을 지나 구릉지의 움푹 들어간 자리에는 선비 샘(1천500m)이 있었다. 얼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샘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내림을 증명한다.

아침식사 대신 배가 부를 때까지 샘물을 마셨다. 샘터 위에는 초라한 묘 하나가 외롭게 자리 잡았다. 이곳의 무덤과 선비 샘에 얽힌 서글픈 사연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연민의 정과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옛날 덕평 아랫마을에 이李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화전민의 자손으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가난에 쪼들리며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천하고 박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배우지 못해서 무식한데다 인상마저 못 생겨서 그 인품이 몹시 초라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선비 대접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는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나면서 평생염원을 담아 유언을 남긴다.

“아들아!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상덕평 샘터 위에 묻도록 하여라.”

효성스런 아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했다. 그로부터 해마다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이곳을 지날 때면 꼭 샘터에서 물을 떠 마시게 된다. 샘터의 물을 떠올릴 때마다 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격이 되었으니 결국 노인의 한이었던 선비대접을 무덤 속에서 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후일 동네 사람들은 노인의 불우했던 생전을 위로해 주기 위한 소박한 인정으로 이 샘을 선비 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영신봉(1651m)을 넘으면서 아침식사 대용으로 걷기를 계속하면서 빵을 먹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흰 눈 쌓인 등산로 주변의 사스래 나무줄기에는 하얀 껍질이 반쯤 벗겨진 채 나풀거린다. 창백한 줄기가 더 슬프게 보였다. 세석평전에는 지리산으로 돌아온 구상나무가 평전주변을 채웠지만 가지마다 눈을 뒤집어쓰고 튼튼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세석평전(1천600m)에서 저절로 이루어진'식생천이'라 하겠다. 올챙이가 개구리로 자라듯, 걷지도 못한 아기가 어른이 되듯, 자연도 주변 환경에 따라 적응해가며 변해간다.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어디에서든지 독특한 지형과 특성에 맞춰 나감은 고귀한 우리의 자연이 참으로 역동적이라 하겠다. 저마다 다른 풀과 나무들이 질긴 생명을 무심하게 스스로 이어가는 분주한 삶의 틈바구니에서 우뚝 선 구상나무가 자랑스럽다.

세석평전은 이름 그대로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았다. 철쭉 군락지는 너무 넓어서 여기가 고산지대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세석 자연 관찰로를 따라 가자 발바닥이 빠지는 물구덩이로 질척거렸다. 높기만 한 세석평전에 자리 잡은 습지인 것이다. 보기에는 평범한 풀밭 같지만 등산화가 발목까지 빠져 진구렁 속에서 질척거린다.

두꺼운 이탄층은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있어서 발목까지 빠진다. 수만 년 전 지리산이 생겨나고 침식되는 과정에서 경사가 급한 산에 평탄한 지형이 생겨났다. 이곳으로 오랜 세월동안 계속적으로 물이 고여 들면서 작은 습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곳은 목마른 야생 동물들에게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마실 물을 제공해 주고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 갈 수 있는 터전으로 생명의 원천이 되어준다. 세석평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1천400―1천714m) 넓은 고원으로 그 주위거리가 12km나 된다고 한다.

산속의 습지는 수많은 생명을 있게 해준 탯자리였다. 습지가 있어서 종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있고 우리인간도 풍요로운 삶을 갖게 해준다. 최근에는 람사르 총회가 창원에서 열리면서 습지의 중요성을 또 한 번 일깨워준다.

물이 모여 늪지를 만들고 그곳을 못자리로 지리산이 생긴 태초부터 생명체가 꿈틀댔던 곳이다.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물이 고여서 산속 늪지가 되었다. 지리산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들을 조화롭게 가꿔가며 지금까지 내려왔다. 종의 다양성이 풍부한 곳으로 의미가 큰 곳이라 하겠다.

상층의 황량한 초원지대에는 지보초, 좁쌀풀, 산새풀 등 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중간쯤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어 자리한 관목지대이며, 하층에는 구상나무와 물참나무 즉 상록수와 활엽수가 공생하는 자연분포를 이루고 있었다.

촛대를 세운 듯 뾰족한 암봉이 촛대봉(1703m)이다. 바위 길은 미끄러짐을 조심해야한다. 천왕봉 가는 길은 이제 선택이 아니다. 자신과의 투쟁이다. 자연 속에서 인내력의 한계점을 발견하는 신성한 의식이라 하겠다. 산이 산다움은 지리산에서 할 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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