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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언가가 예찬한 길지 중의 길지 경북 예천 금당실

ngo2002 2011. 4. 18. 09:02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23. 예언가가 예찬한 길지 중의 길지 경북 예천 금당실
입력시간 : 2010. 05.10. 00:00


조선시대의 풍수지리학자들은 조선팔도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을 최고의 산으로 여겼다. 특히 쓸 만한 마을 터로는 양백(태백, 소백)간을 으뜸으로 여겼다.
연꽃 피어나는 부처님 자리 '발복지'

임금님 수레 들어오면 승지 될 수 없다 단서

십승지 말 믿고 사람들 몰려 이북사람 주류

日 혈처에 쇠말뚝 국운번성 막기 위한 만행

호가 격암(格庵)인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조선중기 명종 때의 뛰어난 예언자로 풍수, 천문, 복서, 상법의 비결에 도통하여 그가 한 예언은 신통방통하게 잘도 들어맞았다고 한다. 그는 예천의 금당실을 길지중의 길지라고 극찬했다. 물론 정감록의 감결에서도 다섯 번째의 십승지로 금당실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알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단서를 붙였다. 이곳에 임금님의 수레가 닥치면 십승지로 쓸 수 없게 된다고 한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며 숨어 살만한 곳으로 십승지를 비롯한 피난처를 설명한 비결서 ‘남격암 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서라 하겠다.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로 해석이 가능한 문구다. 금당실을 십승지이기는 하나 지세가 깊지 않고 드러난 곳으로서 병란이 직접 들어오지 못하고 집안 대대로 평온을 누릴 수 있는데 만약에 임금님의 수레가 들어오면 승지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에 의문이 든다.

임금의 행차는 요란하고 수선스럽다. 또 많은 수행인원이 뒤따른다. 임금님의 어가가 가는 곳에는 조정의 중요대신들이 줄줄이 따르고 임금을 호위하는 당대최고의 칼잡이들로 조직된 금위병이 움직인다.

오늘날에도 청와대의 대통령 지방나들이에는 번거롭고 많은 문제들이 발생된다. 경호상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때 야기되는 문제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몇 해 전에는 아예 지방청와대를 나라 안 곳곳에 호화롭게 지어 두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학자들은 조선팔도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을 최고의 산으로 여겼다. 특히 쓸 만한 마을 터로는 양백(태백, 소백)간을 으뜸으로 여겼다. 정감록에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양백간의 남쪽을 향한 사이에 십승지가 집중되어있는 것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한번 들어가면 본인이 스스로 나오기 전에는 찾을 수 없다는 산이 태백산이다. 그만큼 산이 크며 우거지고 넉넉해서 살만하며 그곳은 화전민의 터전이었다. 대대로 화전을 붙이며 가난하게 살아온 자도 있었지만 일부는 도망쳐 나온 노비나 죄를 지어 발붙일 곳이 없는 현상금이 붙은 지명수배자들이 컴컴한 곳을 찾아 숨어들기도 했다.

소백산의 남쪽에 자리한 금당실은 한강이 있는 한양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물론 조선건국초기에 쿠데타에 성공한 이성계가 이곳을 도읍지로 삼고자 어려차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벌써 그 무렵에도 이곳은 잘 사는 곳이었고 제법 인물이 나는 지역이었다는 말인데 그런 곳을 승지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역설이다.

그런데도 여러 문헌에서는 금당실을 십승지의 반열에 빠지지 않고 올려둔다. 이곳은 물산이 풍부해서 제법 살만한 곳이었다. 애당초에는 십승지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래서 임금님의 수레가 닥치기 전까지는 승지지만 행여나 나라님이 오시면 그럴 수 없다는 두루뭉술한 단서를 붙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십승지라는 말을 믿고 외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난한 집안을 정리해서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발복지라는 말만 믿고 대책 없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맨손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이들은 대부분 이북사람들이 주류를 이뤘다. 산의 중턱을 깎아 동네를 만들었다. 원류동의 허리 골과 선동의 성내와 성주 골에 들어가서 화전을 일구며 언젠가는 ‘쨍’하고 볕들 날을 기다리며 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숨을 죽이며 참아왔다.

감결에서는 금당실로 되어있고 남사고의 십승지에서는 금당동으로 기록되어있는데 과연 그곳은 오늘날의 정확한 지명으로 어디를 말할까? 찾으려는 그곳은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지금의 금곡동(金谷洞)을 가리킨다. 상금곡동 안에 있는 금당실이다. 금곡동을 금당곡이나 금곡이라고 부르는데 같은 장소를 이르는 서로 다른 말이다.

금당(金堂)이란 일반적으로 지형이 웅덩이처럼 움푹 들어간 자리로 물이 고이고 예쁜 연꽃이 피는 연화부수형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금당(金塘)은 연꽃이 피어나는 부처님의 자리로 아름다운 연못을 뜻하며 신성하고 깨끗한 곳으로서 부처님이 상주한 곳을 상징적으로 금당이라고 부른다.

예천군지에 따르면 금당실은 풍수가 좋아서 큰 인물이 날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꺼져가는 조선을 붙들어 잡아준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훼방을 놓았다고 한다. 그는 금당실 북쪽에 있는 주산에 쇠말뚝을 박고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인물이 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명나라 장군이 조선을 시기하며 쇠말뚝을 박았다는 소문은 널리 퍼진 이야기다.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조선을 구하기 위해 구원 군으로 나타난 명나라 장수가 조선의 애국심에 가득 찬 피 끓는 젊은이들을 보고 놀랐다.

“조선에는 어째서 그리도 용감한 젊은이들이 많은가?”

자세하게 알아본즉 조선의 산수와 풍수가 너무 좋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낸 그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으음, 이는 필시 명나라의 앞날에도 걸림돌이 될 염려가 있다. 이들이 자라서 나중에는 명나라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애당초에 어린 싹부터 지워버려야 후환이 없어질 것이다….’

이여송은 참모로 데리고 다니던 부하장군 중에 풍수지리에도 능통한 두사충(杜思忠)을 시켜서 다시는 조선에 인물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방책을 세웠다. 그는 먼저 금당실의 진산으로 올라갔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쇠말뚝을 꽂았다. 일일이 손으로 쪼아 너부죽한 구멍을 냈다. 그런 다음 뜨거운 쇳물을 녹여 부었다. 혈맥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난 다음 임진왜란 이후부터 이곳에서는 인물다운 인물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은 실제로 북한산 백운대나 나라 안 곳곳을 찾아다니며 쓸 만한 혈처에는 쇠막대를 꽂았다. 나라 안 중요도시의 진산(鎭山)과 마을의 주산을 뭉개버린 것이다.

강철로 특별히 주문한 쇠말뚝을 박아 국운번성을 막고 일본에 아양 떨며 복종하는 자들만 모아 들였다.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벼대는 소인배가 소리를 내는 세상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산위의 봉우리마다 구멍을 파서 그곳에 쇳물을 붓고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쳐서 덧씌웠다. 바위산에는 전기 드릴을 동원해서 구멍을 뚫었다. 강철 말뚝을 억지로 박았다. 무서운 궤책이었다.

당시에 일본에는 풍수사상이 퍼지지 않았다. 그런 일본이 어떻게 했기에 조선의 전국에 걸쳐 용맥(龍脈)이란 용맥은 모조리 찾아내서 철주를 내리 꽂았을까?

그것은 조선 안에서 설익은 풍수쟁이들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에 빌붙어 나라의 정기를 팔아먹은 더러운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의 반민족적 행위는 끝없이 이어졌다. 얄팍한 권력을 등에 업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호위 호식하는 정상모리배도 생겨났다.

한말의 관료 풍수사들이었던 자들은 민비의 묏자리, 고종과 마지막 왕 순종의 왕릉을 잡아준 자들로 조선 총독부 이왕직(李王職)의 재산관리자들이었다. 천하에 몹쓸 매국적인 관리들이라 하겠다.

가증스런 일본은 힘이 약한 나라를 침범한 것도 모자라 식민지로 지배한 나라의 국운을 막아 버리려고 산마다 올라가서 쇠막대를 박았다. 세계침략의 역사 어디에도 없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다. 일본만이 저지를 수 있는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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