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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7)- 고려가 존재했던 역사 속으로

ngo2002 2011. 4. 18. 09:00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21.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7)- 고려가 존재했던 역사 속으로
입력시간 : 2010. 04.19. 00:00


인쇄·출판기술 끌어올린 위대한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은 민족의식의 총체적 결합

오랑캐 침략 막으려 16년 동안 간경사업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는 화엄종의 대찰로서 불보사찰의 통도사, 승보사찰의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인 법보사찰로 꼽힌다. 먼저 ‘팔만대장경’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2540년 전 석가모니는 고대 인도의 작은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 나와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석가모니는 49년 동안을 입산수도하여 도를 깨쳤다. 스스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포교활동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부처님 말씀을 남겼다. 대장경이란 불교의 교리를 종합 편찬한 위대한 바이블이다. 해인사를 일러 법보종찰이라 함은 고려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는 무상법보를 모시고 있는 까닭이다.

고려 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대장경의 장경판 수가 팔만 여장에 이르는 데에서 비롯되었지만 불교에서 많은 것을 가리킬 때 팔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쓰기도 한다.

인도의 불교(소승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불경의 번역 사업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왔다. 잘 발달하지 못한 인쇄술은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써둔 장경의 보관도 큰 문제였다. 결국은 목판에 새겨 길이길이 간직하려는 움직임이 대장경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려는 나라의 출발점에서부터 불교를 국가통치의 기본 틀로 정했다.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내세워 모든 국민의 의사를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었고 세계 어디에서고 찾아보기 힘든 긴 세월, 오백여 년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1236-1251년, 16년간)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일반 백성들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하나의 마음으로 뭉쳐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엄청난 돈과 시간이 소모되는 목판 대장경 사업을 국가 최우선 사업으로 해야만 했을까?

그것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며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가난뱅이의 시기에 범국가적인 중요 사업으로 계획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 일부 경솔한 사학자들은 총과 칼을 들고 오랑캐와 맞서 싸우며, 무기를 만들고 칼날을 세워 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주벌판의 풀밭을 뛰어다니며 말을 키우고 이동하며 사는 마구간 출신들의 말발굽은 유럽까지 진출하고 한반도를 순식간에 덮쳤던 것이다. 감당할 재주가 없던 고려는 전선을 구축하고 대항해서 싸워 볼 기회조차 없었으니 어쩌란 말인가?

세찬 북풍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운명의 고려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불심(佛心)에 의한 일체된 국민들의 콘서시움이 필요했으며 쓰러지려는 온 국민들의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대장경의 간경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 잡아 이어가려는 온 국민들의 소망이 간절했고 고려 민족의식의 총체적 결합이라는 데서 빛나는 사업이었다.

세계역사에서 볼 때도 철저한 비폭력적인 ‘저항’으로 이겨낸 사례가 어디에서고 볼 수 없음은 고려인의 긍지요 자부심이라 하겠다. 대륙의 야심만만한 정복자들은 불심 하나로 똘똘 뭉쳐있는 고려를 그냥 놔두지 못했고 무려 7차례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이북의 성을 함락시키고 수도 개경까지 한달음에 밀고 쳐들어 왔다. 당시 집권 세력은(최이 장군) 수전에 약하다는 몽고군의 약점을 간파하고 왕실을 강화도로 옮겼다. 주민들은 산속과 섬으로 피난시켜 먹을 것을 치워버린 빈집으로 남겨 둔 채 결사 항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도보로만 이동하며 싸운 고려는 말을 타고 번개 같이 이동하는 몽고군에게는 전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고려 조정은 변변한 대응한번 못해보고 수도였던 개경을 위시한 전 국토가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되는 비극적 상황을 맞고 만다.

1232년의 몽고 군 두 번째의 침입!

무자비한 외적의 침입으로 위대한 민족의 문화유산들이 하나하나씩 잿더미가 되어버린 역사의 뼈아픈 슬픔을 또 한 번 기록하는 해가 되고 만다. 온 국민의 염원과 피와 땀이 서린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대장경 경판은 팔공산의 부인사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끝없이 넓기만 한 대륙의 초원에서 양떼 치기에 불과했던 오랑캐들이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대장경의 의미를 알 턱이 없었고 몽고군의 살례탑 군사들의 불길 질에 순식간에 처참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고려국민의 분노와 허탈함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망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분통을 덜어준 것은 같은 해 수원 처인성 싸움에서 승병대장 김윤후가 화살하나로 적장 살례탑의 왼쪽 눈을 꿰뚫어 사살해 버린 통쾌함이라 하겠다.

그 후로도 포악한 몽고군은 7차례나 침략 질을 계속했고 국토는 몽고군의 말발굽에 유린되었으며 처참한 서민들의 비참함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만다. 결국 고려 조정의 세력가들은 온 국민의 일편단심 숭배해오던 부처님의 힘에 의존해서 꺼져가는 짚불을 살리려고 했다. 고종은 16년 동안 만든 부처님의 말씀을 목판에 새겨 오늘날 해인사의 수다라장과 법보전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던 것이다.

양쪽길이(78cm, 24cm)와 폭(3cm 두께)을 맞춰 톱질을 한 후 자귀로 다듬은 후 대패로 곱게 다듬는다. 이제까지의 공정으로 경판을 새길 준비를 마친 다음 수기대사가 엄밀하고 정성스럽게 교정한 판하본을 받아다가 경판에 붙인다.

인쇄할 때 글자가 바로 찍히도록 하기 위해서 글자가 쓰인 면이 판자 쪽에 가도록 뒤집어 붙인다. 위에 다시 한 번 더 풀칠해서 말린다. 완전히 마르면 하얗게 되어 판하본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경판을 새기기 직전에 식물성 기름을 얇게 바르면 잘 보이게 되므로 바로 경판 새김에 들어간다.

팔만대장경 판에 새겨진 글자의 모양을 보면 수많은 경판의 글씨체가 마치 한사람이 새긴 것처럼 거의 동일하다. 글자를 새기는데도 엄청난 노력과 인원이 필요하겠지만 글씨를 구양순체로 쓴 정성도 엄청나다.

일정기간 동안 필체교정교육을 받은 자들이 썼다고 추정된다. 글씨가 하도 아름다워 조선의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도 이 글씨를 보고 감탄했다.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실수는 있게 마련이고 잘못 새길 수 있다. 잘못 판각한 글자는 ‘口’자로 오려내고 새로 넣는다. 치밀한 짜 맞춤으로 웬만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고쳐 쓴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글자 새김이 완료되면 옻칠을 했다. 옻칠은 여러 가지 안료를 섞어 표면을 아름답게 해주고 방습성과 함께 썩지 않고 벌레가 침입하지 못하는 우수한 도장 재료이다. 대장경을 만드는데 들인 정성과 한 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 갈 수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끝 간 데 없는 정성의 결정체라 하겠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일본은 끈질긴 집념으로 180차례나 대장경을 빌려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임진왜란이란 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의 수많은 도공을 강제로 일본으로 끌고 갔지만, 팔만대장경을 훔쳐 가기위한 일본의 무력도발이라 해야 옳다. 766년 간 역사의 부침을 버텨온 대장경이 장할뿐더러 신비롭다.

팔만대장경은 분명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한 봉우리이기도 할뿐더러, 아울러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기술을 끌어올린 위대한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경판은 글자를 새겨 넣은 부분과 양쪽 가장자리가 서로 맞닿아 글자가 마멸되는 것을 방지하고, 인쇄할 때의 취급편의를 위해 마구리를 붙이고 구리로 만든 판으로 고정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경판은 무려 8만1천258장이나 된다. 경판에 새겨진 글자 수가 23행 14자이므로 한 면에 322자이고 양면을 합하면 644자가 새겨져 있는 편이다. 대장경 전체로 보면 5천2백여 만자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 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오직 인력에 의한 대업을 이룬 고려인들은 신이 선택한 특출한 재능 인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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