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20.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6) |
입력시간 : 2010. 04.12. 00:00 |
산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듯한 신비로움
질긴 생명력 가진 소나무 지나 상왕봉
일곱 차례 화재와 병란 이겨낸 팔만대장경
광해군이 스승인 사명대사 추모한 홍제암
어렵사리 올라선 칠불봉!
남쪽으로 매화산 넘어 웅대한 지리산이 짙은 청색으로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산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는 하얀 색의 구름이 띠를 두른 듯 길게 펼쳐져 있었다. 어느새 땀이 식고 찬바람이 매서웠다. 이곳은 경북 성주 땅이다. 산의 능선이 경계지역이다.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은 산줄기나 강으로 경계를 삼아 나눈다. 경남 합천 골의 해인사 찾아가는 길은 암릉 사이의 능선 길로 조심 또 조심!
무조건 조심 뿐이다. 멀리 북쪽으로 넓게 자리 잡아 편하게 보이는 덕유산이 장엄하게 보였다. 바위 틈새에 버티고 선 소나무 한 그루가 질긴 생명력으로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처연하다. 가장 한국적인, 한국인에게 친숙한 나무가 소나무이다. 맨살인 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북풍을 웅크리지도 못하는 소나무가 애처롭기만 하다. 조금씩 다가선 산길의 철제 사다리를 돌아서자, 산의 꼭대기 상왕봉(1천430m)에는 먼저 오른 자들이 힘차게 외치고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되도록 많이 갖는 소유의 역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내 몫을 챙기기 위한 끊임없는 다툼이라 하겠다. 소유욕에는 한정이 없으니 끝이 안 보인다.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넘실댄다. 소유욕은 이해와 함께 개인이나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어제의 맹방들이 자고나면 맞서기도 한다.
미국이 공짜로 주었던 무기로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인을 죽이려 안달이다. 초강대국 미국은 유아독존의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람보 스타일의 힘자랑은 한 순간은 이길지 몰라도 진정한 승자의 웃음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싸우는 일은 거의 없어질 것이다. 주지 못해서 싸운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소유가 소유를 이겨내는 경우라 하겠다. 그렇다!
하산을 서둘렀다. 함께한 산행자들이 소주병을 꺼냈으나 눈길에 위험해서 자신이 없었다. 내가 술을 사양하자 그들도 마시기를 마다하고 걷기를 계속했다. 상왕봉 바로 밑 넓은 잔디밭에서 한길 산악회원들이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선두에 서고 싶던 나는 기회다 싶어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인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날짐승들이 가끔 보여 심심하지 않지만 오늘은 눈 때문인지 등산화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봉천대의 기암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다. 밧줄을 타고 내려 가야한다. 묶여진 밧줄에는 매듭이 있어서 체중을 싣고 천천히 내려갈 수 있었다.
초봄까지 있던 가야산 대피소가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버렸다. 멀쩡한 산허리에 허술한 대피소 건물에서는 볼 때마다 고기 굽는 냄새와 질펀한 낮 술판으로 보기가 민망스럽기만 했었다. 건물이 섰던 자리에는 전나무 5그루가 자리를 잡았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로 보이는 경우라 하겠다. 삼거리 갈림길에 도착한 우리는 토신골 쪽의 푹신푹신한 황토 길로 코스를 잡았다. 걷기가 편해지자 주변을 살펴 볼 수 있는 여유까지 살아났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과 이정 두 대사가 국가의 보호아래 창건한 절이다. 소프트웨어 격인 팔만대장경(국보 32호)과 하드웨어인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국보 52호)은 아직까지 처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한 문화재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키고 가꿔야 할 후손들의 재산이라 하겠다.
토신골 깊숙이 들어 왔을 무렵 무릎 높이의 산죽이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작은 골짜기에는 전 나무처럼 쭉쭉 뻗은 가지가 흰색을 드러내며 보인다.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의 두 손 높이에 소중하게 올려 진 팔만대장경의 재료가 자작나무라고 한다.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수다라장의 가운데를 뚫어놓은 관람창(觀覽窓)이다.
차디찬 겨울의 산 속에 처절하게 서 있는 나무를 불쌍하게 여겨 백색의 날개로 나무의 등걸을 칭칭 둘러싼 것 같은 흰색의 수피를 가진 것이 자작나무이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의연히 맞서서 곱게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한껏 자랑하는 미인의 군상처럼 보였다. 자작나무의 가죽은 눈이 달라붙어 흰 껍질이 된 것이 아니고 숲 속의 이슬을 먹고 고고히 자란 기품을 뽐내듯이 어디에서나 새하얀 수피가 트레이드마크로 얼른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재는 자작나무로 알려져 있으므로 제조 당시의 고려인들은 참 멋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고의 말발굽에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처절함 속에서도 시커먼 먹물을 뒤집어 쓸 경판을 하얀 자작나무로 만들다니 고상하기만 하다.
토신골과 극락골이 만나는 곳까지 내려오자 골짜기의 물이 제법 불어나 제잘 대며 흐르는 물소리가 온 산을 청량한 기운으로 감싸준다. 뒤쳐진 황사장이 피곤해 보여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아름드리 고목이 골짜기 위에 누워서 저절로 만들어진 나무다리가 두 개나 보였다. 마애불 가는 골짜기의 다리로 충분히 역할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지 766년이 지난 오늘,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옛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함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오늘 기어코 그 베일을 벗겨 낼 것이다. 복잡해진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차서인지 쌩 머리가 아파 왔다.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건물의 일종인 경판전은 어떻게 지었기에 일곱 차례의 대 화재와 병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았다.
용탑 선원을 지나자 골이 깊어진 개울에 물소리가 우렁차다. 홍제암 가는 길에는 해인사의 명물 외나무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폭이 10m는 됨직한 개울을 통나무 위로 지나가야 한다. 다행히 안전 난간을 대신해서 밧줄이 손 높이쯤에 묶여 있어서 체중을 의지한 채 지나 갈 수 있었다.
유래야 어떻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에 놓인 외나무다리는 그 풍치만으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먼 옛날로 되돌아 간 듯 운치와 낭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홍제암은 해인사의 서편으로 일주문에서 한 이 백 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로, 특히 사명대사가 결가부좌한 채로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곳에서 은거하던 사명대사는 광해군 2년 77세로 입적하셨는데 왕자시절의 광해군을 가르친 스승이고 밀양이 고향이다.
광해군은 스님의 열반을 애도하고 당신 스승의 비를 세운 후 홍제암으로 모셨다. 스승을 추모한 애틋한 마음에 전국 제일의 비문을 쓰고자 했다. 당시 제일의 문필가로 홍길동전을 썼던 허균이 쓴 사명당의 시비는 문장도 아주 빼어날 뿐만 아니라 대사의 행장이 소상하게 적혀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이 너무나 뛰어난 명문으로 조선의 민족혼이 되살아 날까봐 일본인들이 토막내버린 비석이 홍제암 옆에 쓸쓸히 서 있었지만 본문을 읽어보기에는 두꺼운 돋보기가 있어야만 판독이 될 듯 했다. ‘口’자모양의 한쪽이 터진 홍제 암에는 사명대사의 진영이 보관되어 있지만 굳게 잠긴 자물통으로 인해 볼 수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뽑아낸 사진을 보며 자족해야만 했다.
극락교를 지나 대적광전 옆의 학사대에 도착했다. 최치원이 몸소 심었다는 전나무가 천년이 지난 오늘도 그 푸름을 한껏 간직하고 있었다. 만년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그가 즐겨 찾아와 담론을 즐기고 시문을 지으며 학문을 논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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