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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5)

ngo2002 2011. 4. 18. 08:57

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19.가야산 불꽃바위 아래가 십승지다(5)
입력시간 : 2010. 04.05. 00:00


대장경 판전 과학적 우수성 '세계 으뜸'

숱한 어려움 이겨낸 온전한 모습에 감탄

오랑캐 물리칠 국민의 힘 불력에서 찾아

불심으로 나라 지킨 넓은 바다와 같은 산

이미 죽어버린 느티나무는 1천20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광복되던 해에 수명을 다했다. 지금은 밑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전해주고 있었다. 죽어서도 끝까지 해인사를 지켜주는 상징으로 남아있는 고사목이 고마울 뿐이다.

비석거리로 나오자 부도전에 가득 서있는 부도들이 쓸쓸하게 보였다. 성철스님의 사리탑은 쑥 색의 대리석을 다듬어서 둥근 원처럼 만들어 그 안에 사각형의 단을 세 겹으로 쌓은 다음 탑신을 올렸다. 가장 밑에는 둥근 원형의 돌을 둘로 쪼갠 바닥이 아래로, 그 위에는 굽은 곡선끼리 부딪치게 했으며 가장 상단에는 둥근 원형의 돌을 올린 탑의 구성이 신비롭기만 하다.

둥근 공은 불교의 상징 마크로 온 우주를 의미하며, 금세기 최고의 큰 스님 사리탑답게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했다. 산문 입구의 기다란 길옆에 서있는 참나무 숲은 나무에서 뿜어내는 상큼한 공기로 산행 길의 피곤함을 씻어내 주기에 충분했다.

가야산에서 최고로 오래된 노각나무는 굵은 가지를 덮고 있는 껍질이 벗겨진 곳을 드러내며 견디어 온 세월을 자랑했고 길게 뻗은 가지의 다래나무는 열매가 보이지 않아 섭섭하기만 했다.

영지에 고인 물은 어찌나 깨끗한지 나지막한 폭포가 이중으로 높게 보였고 연못의 가장자리에 쌓은 석축 위의 철쭉꽃이 수면에 떠올라 가볍게 하늘거리는 모습이 예쁘기만 하다. 그림자로 보는 연못이기에 영지의 둑에 올라선 나는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물위에 떠오른 나를 주시하자 내가 나인지 물속의 그림자가 나인지 혼돈이 일어났다.

나는 커다란 돌에 쓴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을 보면서 그 쪽으로 걸어갔다. 판전(국보 52호)은 큰 법당 뒤편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 부처님 머리 위로 높은 곳에 서있었다. 대장경 판전은 목조 건물로 남북으로 길게 마주보며 규모가 동일한 건축물이다. 단층의 목조 기와집으로 오랜 세월동안 팔만대장경을 변함없이 보존하고 있는 과학적인 목구조물이다.

건물의 끝 쪽에는 작은 건물이 들어섬으로서 전체적으로는 ‘입구□자’ 모양으로 보인다. 바닥에는 통풍구가 있어서 습기를 막을 수 있었고 벽은 상·하단으로 위단의 창을 크게 만들어 환기가 잘되게 처리한 솜씨가 일품이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낸 대장경 판전의 온전한 모습에 보는 이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구조의 과학적 우수성에 경의를 표한다. 그래서 1995년 12월 유엔이 정한 유네스코UNESCO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해인사를 일컬어 법보종찰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려대장경 곧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불리는 무상법보를 모시고 있는 까닭이다. 대장경은 고려시대(1011년, 1236년)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대장경 판에 쓰이는 나무는 여기서 가까운 섬 지방에서 벌목해온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를 주로 썼다.

나무는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소금물에 삶았다가 그늘에 말린 것을 사용했다. 벌레가 먹거나 뒤틀림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대장경을 만드는데 들인 정성과 한 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엄정한 자세는 오늘의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도 없거니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 오랑캐의 침입으로 혼란한 와중에 오로지 경판을 새겨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창과 칼을 들고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보무도 당당히 전선에 나서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고려 건국초기 국가 경영의 기초 이념을 불교로 삼았기 때문에 전 국민의 일치된 힘을 모아 불력佛力에서 찾으려한 것이다.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크고 또 간절했던 것이다. 세계 정신사의 산맥에 우뚝 솟아난 거대한 봉우리라 하겠다.

홍류동 계곡의 붉은 단풍이 없는 초여름의 시원한 물줄기 녹류동을 따라 가는 내 가슴은 부풀어 오르며 뿌듯하기만 하다.

가야산은 철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눈 쌓인 한겨울을 택해서 성산을 찾았다. 가야산은 법보종찰 해인사를 품에 앉고 있는 영남 제일의 명산이다. 이틀 전에 내린 눈은 대설大雪치를 톡톡히 해서인지 가야산 골마다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이젠이라도 준비할 걸’ 하고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山 자체의 생김새가 소머리 같다고 해서 일명 ‘우두산’이라고도 불리는 가야산은 격조와 품위로 본다면 예로부터 으뜸이다.

“山은 천하에 절승하고 지덕은 해동海東에서 제일이다.”

뿐만 아니라 숱하게 굴곡 된 한국의 역사 속에 단 한 번도 전란戰難를 입지 않은 명산중의 명산이며 십승지의 으뜸이라 하겠다. 한길 산악회원들과 함께 내린 백운동 집단 시설지에서 10km에 이르는 5시간의 산행을 시작했다. 버스 속의 한 의자에 같이 앉았던 황사장과 나는 등산화 줄을 조인 후 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든 발자국을 밟으며 걸어야만 했다. 미끄럽고 질척거렸지만 멀리 보이는 정상이 가깝게만 느껴졌다. 눈길에서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가는 낭패다. 보폭을 평소보다 약간 좁게 하고 발가락에 체중을 실어야 한다.

가야산은 불심으로 나라를 지킨 넓은 바다와 같은 산이다. 산위까지도 평범한 육산肉山처럼 보여 동네 뒷산 같은 포근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팔부 능선쯤에서부터 시작되는 기암괴석과 암릉들의 절묘한 모습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금년 봄 오월에 꽃순이와 함께 정상에 오를 때는 까마귀와 까치, 부엉이, 꾀꼬리들을 볼 수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는데 모처럼 쌓인 서설로 단한 마리의 날 짐승도 볼 수 없어서 짜납기만 하다.

앞서간 산행자가 만든 발자국을 살피며 눈길을 걷자니 주변을 조망할 여유가 없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았다가는 넘어지기 때문이다. 숨을 쌕쌕거리며 한 시간쯤 올라가자 서성재에 도착했다. 배낭에서 감을 꺼내 먹었더니 갈증해소에는 그만이다. 앞서가던 선두가 보이지 않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금세 녹으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바스락, 우지직”

산길이 조금씩 경사가 급해지며 가빠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막힌 길을 쳐다만 볼 뿐 갈 수가 없었다. 바위 사이의 눈길이 미끄러워서 심한 정체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워 시간대에 차가 막힌다는 말은 들었지만 산길에서 정체구간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철사다리 구간은 등산화에 얼어붙은 눈을 털어 낼 수 있어서 안심이다. 사다리 길을 꼬불거리며 대여섯 개쯤 돌아가자 미끄러운 바위길이 다시 나타났다. 양손으로 붙잡고 기듯이 걸어야만 했다.

손이 시리고 간질거렸다. 보폭을 좁혀서 천천히 올라가야만 한다. 이마에서는 긴장된 탓인지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눈 속의 구슬 땀, 묘한 앙상블이다. 저 만치에 칠불봉(1,433m)이 보였다. 산의 능선 따라 암릉 사이의 샛길은 앞선 자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한참씩을 기다리며 순서대로 가야만 했다.

좁은 눈길에서 추월은 위험하다. 손바닥에 마른침을 바르며 암벽 타기 하듯 기어오른 바윗길, 앞선 자가 오도 가도 못하고 고목에 매미가 매달린 듯 위험했다. 얼른 다가가 팔을 들어 앞사람의 발을 받쳐 주었다. 그때서야 겨우 길이 터졌다. 위험한 고비를 넘긴 이름 모를 산행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했다.

“뭘요, 함께 하는 것이 산행山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