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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2) ‘아이폰 인문학’[인문학 열풍, 명과 암]“우리도 잡스처럼” 대기업 앞다퉈 ‘돈 되는’ 인문·공학 융복합 추구

ngo2002 2013. 8. 21. 09:48

[인문학 열풍, 명과 암]“우리도 잡스처럼” 대기업 앞다퉈 ‘돈 되는’ 인문·공학 융복합 추구

ㆍ(2) ‘아이폰 인문학’

지금 한국 사회의 인문학 바람을 일으키는 한 축은 대기업이다. 1990년대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인 기업인들은 철학과 역사를 학습했는데 그중 한 명이 노자다. 노자는 2000년대 여러 최고경영자와 경제연구소장이 언급한 인물이다. 기업인들이 무소유 가르침을 좇은 건 아니다. 그들이 파고든 건 무위자연 사상을 응용한 리더십과 경영이었다. 기업인들은 또 15~18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을 사실상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의 사회적 공헌과 예술인 지원에도 주목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4년부터 운영한 월례조찬 특강의 이름은 ‘메디치21’이었다. 그림, 역사, 문화를 배우는 이 프로그램에 매달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여러 대학이 최고경영자 과정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서울대 인문대의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 프로그램인 ‘아드 폰테스’(Ad Fontes·‘원천으로’란 뜻의 라틴어)의 인기가 높았다. 아드 폰테스는 지금 13기를 모집 중이다. CEO를 위한 인문학 읽기 같은 강좌나 비슷한 내용을 담은 책들은 꾸준히 나온다. 직원과 고객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연도 지속적으로 열린다.

이 같은 기업 주도의 인문학은 ‘아이폰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최근 들어 기업들은 경영, 기술개발, 신입사원 공채 등 여러 부문에서 인문학과 공학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여기에는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영향이 크다. 잡스는 신제품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기술과 교양과정, 인문학의 교차로에 애플이 있다”고 말했다. 잡스가 리드대 철학과를 중퇴한 사실도 회자됐다. 인문학총연합회가 지난 4월 개최한 ‘한국의 인문 진흥을 위한 학술토론회’에서 언급된 인물 중 하나가 잡스였다. 아이폰 인문학의 핵심은 잡스가 추구하고 실현했던 융복합이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 신제품 아이패드 발표회 자리에서 “애플의 기술은 인문학(Humanities), 교양과정(liberal arts)과 결합되어 있다”고 밝혔다. 잡스의 기술과 인문 융합은 기업의 인문학 바람을 일으켰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경영·기술개발·채용 현장 적용…‘인문 면접’ 특강도 생겨
“성찰 없는 실용 인문학 좇다간 순수 인문학 몰락” 비판도


아이폰 인문학은 신입사원 채용에도 등장했다. 삼성그룹은 올 상반기 ‘삼성 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라는 신입사원 공채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소프트웨어 교육과정을 수료한 인문학 전공자들을 엔지니어로 뽑는 것이다. 포스코는 2009년부터 포스코 스칼라십을 운영하고 있다. 기술계의 경우 회사에서 지정한 문학·사회·철학·경영, 사무계는 인문·예술·경영 등 ‘통섭과목’을 일정학점 이상 수강한, 즉 인문학과 공학을 함께 교육받은 학생들을 선발하는 전형이다. 다른 기업들도 신입사원 채용 때 인문학적 소양을 확인하기로 했다. 이런 추세 때문에 최근 ‘인문 면접’을 위한 사설 특강까지 생겨났다.

아이폰 인문학은 정부, 지방자치단체, 대학으로도 이어진다. 한국연구재단이 선정하는 인문도시와 인문강좌사업에 뽑힌 동양대는 전통선비문화와 현대 인문학의 융합으로 영주시의 도시 브랜드 가치와 성장 동력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인문학 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는 칠곡군도 지역 인문학을 미래 성장동력의 자원으로 보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인문’을 내세운 도시 또는 마을 사업은 융복합 개념과 성장의 패러다임이 함께 녹아있다. 내용을 뜯어보면 예전 생태도시(마을), 스토리텔링 마을, 역사문화마을 만들기 같은 지역 특화 사업의 구조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문학자들 중에는 아이폰 인문학과 인문과 기술의 융복합에 호응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의 인문 진흥을 위한 학술토론회’ 때도 잡스가 강조하는 인문 융합을 실현하려면 인문진흥의 법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부정적 시각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인문학과 공학의 융복합이라는 개념이 인문학의 몰락을 보여준다. 이전의 학제간 연구보다 퇴행한 듯하다”고 말했다. “기능적인 관점에서, 순수 인문학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나온 융복합은 그저 공학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인문학을 뜻할 뿐”이라고 말했다.

기업발 인문학 바람을 두고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는 “지금 벌어지는 현상은 나쁘게 보면 ‘호들갑’이다. 인문학을 이용하고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까지 떠밀려온 현실을 반영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런 식으로라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 것을 무조건 마다하고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정치권력이든, 자본권력이든 끊임없이 인문학을 장신구로 사용하는 데 말려들지 않고 인문학자들이 자기 중심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는 “최근 한국 사회의 아이폰 인문학이 뜻하는 바는 인문학도 돈이 된다는 것”이라며 “아이폰을 만들자는 인문학이 아니라 아이폰을 성찰하는 인문학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입력 : 2013-08-19 22:18:19수정 : 2013-08-19 22: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