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 명과 암]철학·문학 계열 통폐합… 대학 인문학은 고사 위기
ㆍ(3) 학계·출판계 현실
최근의 인문학 열풍을 두고 인문학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정작 인문학의 기초를 다지고, 후속 세대를 양성해야 할 대학의 인문학은 수년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본격적인 인문학 책은 잘 팔리지 않는 출판시장의 현실도 인문학 열풍의 이면을 보여준다.
대학은 인문 학과를 중심으로 폐지나 통폐합이 수년간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남대가 철학과를 폐지하고, 철학상담학과를 신설했다. 이 학교는 독일어문학과 등도 폐지했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학교조직을 신설하거나 통폐합할 때 반드시 구성원의 의견·여론을 듣도록 하는 ‘일방적 학과 통폐합 방지법’을 발의했다. 우 의원실의 2013년 현재 학과통폐합 현황을 보면, 대전의 ㅂ대 국문과는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과’와 합쳐져 한국어 문학과로 통합됐다. 서울 ㅇ대는 유럽문화학부, 예술학부를 없앴다. 이 학교는 국문과도 폐지하려다 학생들의 반발로 취소했다. 충남 ㅋ대, 청주 ㅅ대도 국문과를 폐지하거나 통폐합했다. 부산 ㄷ대는 중어중문, 일어일문학과를 폐과했다. 경기 ㄷ대는 철학과와 사학과를 통합시켰다. 이밖에 10여개 대학이 인문, 예술 쪽 학과를 통폐합했다.
▲ 대학들 취업률 위주 구조조정
대학원은 “유학이 낫다” 장려
학문적 발전·후세대 양성 포기
▲ 서점가 입문서·에세이만 인기
깊이 있는 학술서는 되레 줄어
대학들이 인문 학과를 통폐합하거나 ‘철학상담과’ 같은 실용적으로 들리는 이름의 학과를 신설하는 것은 취업률·입학률 때문이다. 교육부는 취업률 지표 산정 때 인문·예체능 계열을 제외하기로 최근 결정했지만, 정원감축이나 학과 통폐합 등 대학의 구조조정 흐름을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 교육부가 이 같은 구조조정을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의 구조개혁 노력으로 보고 결정사항을 존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다른 학문의 근간인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학원 인문학도 붕괴 지경이다. 대학원은 학문후속세대 양성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인문학 박사가 외국대학 박사보다 많지만, 교수 채용에선 외국 박사 비율이 높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하면 취직도 힘들고, 워낙 고생하다 보니 지도 교수들이 먼저 외국에서 학위를 하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 박사 학위 따 한국에 와서 교수가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연구중심 대학을 이야기하고, 지원도 있었지만 정작 연구중심 대학은 없다. 지금 한국의 대학은 미국 대학원을 먹여 살리는 대학”이라고 말했다.
인문한국(HK) 사업도 시한폭탄이다. 매년 수백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HK 사업은 대학이 박사 학위 소지자를 교수나 연구자로 채용하는 제도다.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 HK 연구교수들은 1~2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하고,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있다. 정년을 보장받은 HK 교수들도 불안해한다. HK 사업 핵심은 한국연구재단이 10년간 HK 교수 인건비를 지원하고, 그 뒤에 대학이 자체 고용하는 게 핵심이다. 대학별로 이르면 2017년부터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이 직접 고용을 회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이미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제도권 인문학 위기 속에서 정부와 대학은 ‘인문학’을 여전히 보조적이고 기능적인 수단으로 여긴다. 미래창조과학부와 교육부, 고용노동부가 지난 6일 발표한 ‘창의인재 육성방안’ 중에는 과학기술 전공자가 인문학 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대학의 융합강좌 개설을 유도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여러 대학들은 실제 공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연구센터도 짓고 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요즘 모두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산업화·실용화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응용이나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우선해야 할 것은 기초 토대 연구”라고 강조한다. 그는 “인문학을 내실 있게 발전시키려면, 인문학 전공자들이 토대를 구축하고, 강화할 수 있도록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판 시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인문학의 쇠락을 보여준다. 교보문고의 올 상반기 인문, 역사·문화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 책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유시민)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주현성) <문명의 배꼽 그리스>(박경철) <총균쇠>(제레드 다이아몬드) <여덟단어>(박웅현) 등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는 올해도 12위에 올랐다. 판매 권수를 보면, 2011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인문은 5~6%대, 역사·문화는 1%대로 꾸준히 상승 중이다.
국내외 파워라이터가 쓴 책, 교양 차원의 인문학 입문서나 인문을 다룬 에세이 종류를 제외한 인문학 책의 판매량은 오히려 줄고 있다. 인문학 출판사 관계자는 “인문학 바람이 분다지만 그 바람에 힘입어 책이 더 팔리는 것 같지는 않다”며 “깊이 있는 인문학 책이나 학술서는 고전한 지가 꽤 됐다”고 말했다. 이 출판사는 고전 시리즈를 초판 2000부를 찍다 최근엔 1500부로 줄였다. 다른 인문 전문 출판사는 초판 1500부를 내다 700부를 찍고 있는 실정이다.
<시리즈 끝>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최근의 인문학 열풍을 두고 인문학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정작 인문학의 기초를 다지고, 후속 세대를 양성해야 할 대학의 인문학은 수년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본격적인 인문학 책은 잘 팔리지 않는 출판시장의 현실도 인문학 열풍의 이면을 보여준다.
대학은 인문 학과를 중심으로 폐지나 통폐합이 수년간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남대가 철학과를 폐지하고, 철학상담학과를 신설했다. 이 학교는 독일어문학과 등도 폐지했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학교조직을 신설하거나 통폐합할 때 반드시 구성원의 의견·여론을 듣도록 하는 ‘일방적 학과 통폐합 방지법’을 발의했다. 우 의원실의 2013년 현재 학과통폐합 현황을 보면, 대전의 ㅂ대 국문과는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과’와 합쳐져 한국어 문학과로 통합됐다. 서울 ㅇ대는 유럽문화학부, 예술학부를 없앴다. 이 학교는 국문과도 폐지하려다 학생들의 반발로 취소했다. 충남 ㅋ대, 청주 ㅅ대도 국문과를 폐지하거나 통폐합했다. 부산 ㄷ대는 중어중문, 일어일문학과를 폐과했다. 경기 ㄷ대는 철학과와 사학과를 통합시켰다. 이밖에 10여개 대학이 인문, 예술 쪽 학과를 통폐합했다.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으나 일부 대학 내 인문 관련 학과가 폐지되는 등 대학 내 기초 인문학은 사실상 고사되고 있어 인문학 열풍의 한계를 드러낸다. 지난 6월 한남대 철학과 졸업·재학생들이 철학과 폐지 철회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 대학들 취업률 위주 구조조정
대학원은 “유학이 낫다” 장려
학문적 발전·후세대 양성 포기
▲ 서점가 입문서·에세이만 인기
깊이 있는 학술서는 되레 줄어
대학들이 인문 학과를 통폐합하거나 ‘철학상담과’ 같은 실용적으로 들리는 이름의 학과를 신설하는 것은 취업률·입학률 때문이다. 교육부는 취업률 지표 산정 때 인문·예체능 계열을 제외하기로 최근 결정했지만, 정원감축이나 학과 통폐합 등 대학의 구조조정 흐름을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 교육부가 이 같은 구조조정을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의 구조개혁 노력으로 보고 결정사항을 존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다른 학문의 근간인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학원 인문학도 붕괴 지경이다. 대학원은 학문후속세대 양성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인문학 박사가 외국대학 박사보다 많지만, 교수 채용에선 외국 박사 비율이 높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하면 취직도 힘들고, 워낙 고생하다 보니 지도 교수들이 먼저 외국에서 학위를 하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 박사 학위 따 한국에 와서 교수가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연구중심 대학을 이야기하고, 지원도 있었지만 정작 연구중심 대학은 없다. 지금 한국의 대학은 미국 대학원을 먹여 살리는 대학”이라고 말했다.
인문한국(HK) 사업도 시한폭탄이다. 매년 수백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HK 사업은 대학이 박사 학위 소지자를 교수나 연구자로 채용하는 제도다.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 HK 연구교수들은 1~2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하고,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있다. 정년을 보장받은 HK 교수들도 불안해한다. HK 사업 핵심은 한국연구재단이 10년간 HK 교수 인건비를 지원하고, 그 뒤에 대학이 자체 고용하는 게 핵심이다. 대학별로 이르면 2017년부터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이 직접 고용을 회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이미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제도권 인문학 위기 속에서 정부와 대학은 ‘인문학’을 여전히 보조적이고 기능적인 수단으로 여긴다. 미래창조과학부와 교육부, 고용노동부가 지난 6일 발표한 ‘창의인재 육성방안’ 중에는 과학기술 전공자가 인문학 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대학의 융합강좌 개설을 유도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여러 대학들은 실제 공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연구센터도 짓고 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요즘 모두가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산업화·실용화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응용이나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우선해야 할 것은 기초 토대 연구”라고 강조한다. 그는 “인문학을 내실 있게 발전시키려면, 인문학 전공자들이 토대를 구축하고, 강화할 수 있도록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판 시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인문학의 쇠락을 보여준다. 교보문고의 올 상반기 인문, 역사·문화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 책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유시민)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주현성) <문명의 배꼽 그리스>(박경철) <총균쇠>(제레드 다이아몬드) <여덟단어>(박웅현) 등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는 올해도 12위에 올랐다. 판매 권수를 보면, 2011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인문은 5~6%대, 역사·문화는 1%대로 꾸준히 상승 중이다.
국내외 파워라이터가 쓴 책, 교양 차원의 인문학 입문서나 인문을 다룬 에세이 종류를 제외한 인문학 책의 판매량은 오히려 줄고 있다. 인문학 출판사 관계자는 “인문학 바람이 분다지만 그 바람에 힘입어 책이 더 팔리는 것 같지는 않다”며 “깊이 있는 인문학 책이나 학술서는 고전한 지가 꽤 됐다”고 말했다. 이 출판사는 고전 시리즈를 초판 2000부를 찍다 최근엔 1500부로 줄였다. 다른 인문 전문 출판사는 초판 1500부를 내다 700부를 찍고 있는 실정이다.
<시리즈 끝>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입력 : 2013-08-20 21:58:16ㅣ수정 : 2013-08-20 21: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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