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이근우 기자의 경제학으로 세상읽기] 머피의 법칙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

ngo2002 2013. 6. 28. 15:31

[이근우 기자의 경제학으로 세상읽기] 머피의 법칙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
기사입력 2013.04.29 13:40:02

#장면1. 수영장에 가면 왜 기가 죽을까. 저질 체력 보충해 보겠다고 새벽 정기권을 끊어 동네 수영장에 다닌 지 벌써 3년째. 제 딴엔 열심히 팔다리를 젓고 있는데 아들딸 시집장가 다 보낸 아주머니, 아저씨들과 물속에서 자꾸만 부딪힌다. 내가 빨라서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느려서 어르신들 운동하는데 걸리적 거린다. 끝나고 샤워할 때는 더 기가 죽는다. 몸들은 또 다들 얼마나 좋은지. 주말에 한강에서 MTB 자전거를 열심히 밟으며 달리는데 뒤에서 멀찌감치 따라오던 할아버지가 고철자전거를 철그럭 철그럭거리면서 옆을 쌩 하니 스쳐 지나간다. 어휴. 쪽 팔린 것도 한 두 번이어야지.

<2012년 런던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마이클 펠프스>
#장면2. 세상에는 어찌나 잘난 놈들만 우글우글한 건지. 청담동 카페 골목엔 멋진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소개팅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어쩜 하나같이 꼭 저런지. 대학 동창들은 벌써 기사 딸린 자가용 타고 다니는데 난 아직도 차장 나부랭이고 월급도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받는다. 직장에서 후배나 동기들은 어쩜 재주도 그렇게 많은지 상사한테 총애를 듬뿍 받건만 난 오늘도 결제 서류 들고 들어갔다가 깨졌다. 더 열 받는 건 트위터, 페이스북, 카톡을 암만 열심히 하고, 저녁에 친구, 선후배를 만나서 네트워크를 다져도 내 친구들은 왜 나보다 친구가 많은 것일까.

"에이. 운이 나쁠 때도 있고 그렇지, 세상 뭐 별 거 있어!" 라고 나름 위안도 해보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다. 세상에 나쁜 일은 왜 나한테만 벌어질까. 하지만 걱정들 마시라. 세상만사 새옹지마. 나쁜 일이 있다가 좋은 일도 있는 법이고. 불운도 착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자그마한 불행을 의미하는 머피의 법칙을 얘기할 때 흔히들 버터 바른 식빵을 예로 든다. 빵을 먹다가 보면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버터를 바른 쪽이 바닥으로 떨어져 먹을 수도 없고, 바닥도 더럽히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머피의 법칙을 테스트하기 위해 한 방송에서는 사람들에게 버터 바른 빵을 공중으로 던지는 실험을 300번 되풀이하게 했다. 그 결과 버터를 바른쪽이 바닥을 향하는 경우가 152번, 안 바른 쪽이 바닥을 향하는 경우가 148번으로 거의 1대1의 확률을 보였다.

통계적으로 버터 바른 쪽으로 떨어질 확률이 반이고, 버터가 안 발린 쪽으로 떨어질 확률이 반이다. 분명이 버터를 바른 쪽으로 빵이 바닥에 떨어질 확률은 50%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떨어뜨릴 때마다 버터 발린 쪽으로 엎어진다면 나에겐 머피의 법칙이 작동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 같은 판단에는 함정이 존재한다.

우선 곰곰이 생각해보자. 빵은 언제 바닥에 떨어지는지. 공중에 높이 던져진 빵이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다가 땅에 `착`하고 붙는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빵이 땅에 떨어지는 경우는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상황에서 벌어진다. 불과 1미터 높이도 안 되는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이 마치 공중으로 팽그르르 던져 올려진 500원짜리 동전 마냥 꼭 절반의 확률로 떨어질 정도로 충분히 공중에서 회전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접시에서 떨어지면서 충분히 회전을 못하고 버터 바른 윗면이 뒤집힌 채 그대로 떨어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무조건 확률 50%라고 우기긴 힘든 상황이 아닐까.

수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해 뜨기 전 새벽부터 일어나 멀리서 차를 몰고 삼삼오오 수영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길에서 마주치는, 운동과 담을 쌓은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다. 새벽잠을 마다할 정도로 몸 관리가 철저한 매니아들이다. 수영장 최상급 코스에서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길거리에서 보통 마주치는 `평균`적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들이다. 내가 수영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내 몸매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떤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평균적이 아닌 매니아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더 많이 계산에 집어넣어야 한다.

거꾸로 3년 동안 수영장에서 갈고 닦은 몸으로 서울 여의도 증권사 본사 꼭대기 층에 있는 직원 전용 휘트니스 센터를 간다고 생각해봐라. 24시간을 쪼개서 일해도 바빠서 허덕대는 엘리트 증권사 직원들 입장에서 한가롭게 식스팩 복근을 가꾸고 있는 회원들이 얼마나 존재할까. 아마도 휘트니스 강사와 시큐리티 직원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증권사 휘트니스 센터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이제는 나를 쳐다볼 것이다.

통계학적으론 이처럼 평균을 낼 때 모집단에 포함된 표본, 또는 경우의 수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생겨나는 착각들을 샘플 편향(smapling bias)이라고 부른다. 얼핏 보면 머피의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실망할 필요가 없다. 평균이 부르는 착각이랄까. 평균을 왜곡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랑 똑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살아가니까 말이다.

<영화 친구(2001)>
이 같은 샘플 편향의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친구 패러독스(friendship paradox)이다. 친구 패러독스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친구가 보유한 친구의 숫자보다 더 적은 수의 친구를 갖고 있으며 또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수학적으로도 증명된다. 그럼 왜 내 주위 사람들은 나보다 친구가 많을까. 대다수 내 주변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숫자의 친구를 갖고 있다. 하지만 `마당발` 친구 1명의 존재가 평균값을 올린다. 가상공간인 트위터도 마찬가지다. 트위터 친구들 가운데 팔로워 숫자는 대부분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160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진 이외수 씨를 생각해보라. 이외수 씨를 트위터 친구에 포함시키는 순간 내 트윗 친구들의 평균 팔로워 숫자는 확 증강된다.

친구 패러독스를 다른 각도에서 한번 보자. 대학에서 2개 과목을 가르치는 김 교수가 있다. 한 클래스는 개론 수업으로 신입생 90명이 대상이다. 또 다른 클래스는 심화학습 코스로 상급생 10명이 대상이다. 그렇다면 김 교수의 수업을 듣는 과목당 학생은 몇 명이나 될까. 대학 당국더러 김 교수가 과목당 몇 명의 학생을 가르치냐고 묻는다면 과목당 평균 50명이라며 학급당 학생 과밀도가 높지 않다고 할 것이다. 김 교수도 동의할 것이다. 단순 평균의 개념을 계산하면 (90+10)/2 = 50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선 다르다. 100명의 학생 가운데 90명은 정원이 90명이나 되는 큰 클래스에서 수업을 듣는다. 단지 10명만이 클래스 사이즈가 10명인 수업을 들을 뿐이다. 100명의 학생 가운데 90명이 클래스 크기가 90명인 수업을 듣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강의를 듣는 클래스 크기가 평균 50명짜리라는 주장에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평균값은 단순평균인 50명이 아니라 적어도 90명에 좀더 가까운 숫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가중평균의 개념이 등장한다. 학생들에게 1인 1표씩 줘서 투표를 하는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자. "클래스 크기가 얼마입니까"라고 묻는다면 90명은 90이요, 10명은 10이요 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반응의 합은 (90*90) + (10*10) = 8200이 된다. 8200을 전체 학생수 100으로 나눈 값, 82명이 가중평균이 된다. 학생 입장에서 클래스 평균 크기가 얼마냐는 물음에 대해 답을 한다면 50명보다 82명이 더 맞지 않을까.

경제학에선 기본적으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들은 아프리카 사바나의 거친 초원과 북유럽 일대를 덮친 빙하기를 수십 만 년에 거쳐 살아남아야 했다. 그런 원시인들의 입장에서 주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관계, 다시 말해 패턴(pattern)을 인식하는 능력을 익히고 또 물려주는 게 필수적이었다. 당장 저기 30미터 앞 바위 위에 초록빛깔로 어른거리는 게 맛있는 개구리인지 그냥 나뭇잎일지 분석하고 있을 틈이 없다. 일단 덮치고 봐야 한다. 숲 저편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내 목숨을 노리는 맹수인지 아닌지 따질 틈도 없다. 무조건 도망치고 봐야 한다. 징크스라는 것도 이 같은 패턴화의 한 현상이다.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에 우리 뇌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직관(直觀)의 영역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치밀하게 따져보고 숙고해야 하는 문제를 직관, 감(感) 이런 것으로 풀려고 하다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란 얘기다.

[이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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