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6도까지 떨어지는 등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보인 3일 오전, 함학주씨가 난방이 되지 않는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집에서 전기장판에 의지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구리/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2013 기획 격차사회를 넘어
밀려난 삶의 공간 ② 갈매마을 철거촌
도시개발 현장의 철거가 꼭 노후 건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린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도 송두리째 밀어버린다. 주거 환경의 ‘개선’이 목적이지만, 그곳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의 삶은 끝없이 추락한다. 밀려난 이들이 흘러들어가는 곳은 머지않아 또 ‘주거 환경 개선’의 이름으로 철거된다. 지금부터 꼭 4년 전 서울 용산 4구역에서 그랬듯,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이들이 갈 곳은 ‘망루’뿐이다. <한겨레>는 신년기획 ‘격차사회를 넘어-밀려난 삶의 공간’의 두번째 공간으로 보금자리주택을 짓기 위해 다른 이의 보금자리를 빼앗고 있는 경기도 구리시 갈매마을을 찾았다.
15년전 철거촌서 내쫓겨온 함씨막다른 삶의 터전, 또 헐릴 위기
“남 보금자리 위해 내 보금자리 뺏나”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해 12월18일, ‘대선 한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추운 겨울날 누런 황토밭의 갈매마을을 덥히고 있는 것은 일찌감치 지는 겨울 해뿐이었다. 마을 앞에 들어선 거대한 갈매역은 찰나의 온기마저 가로막는 듯했다. 갈매역은 갈매마을의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누군가의 보금자리주택을 짓기 위해 다른 이의 보금자리를 빼앗고 있는 경기 구리시 갈매동. 마을에 들어서도 한동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닐하우스에서 떨어져 나온 비닐들만 어지럽게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미 철거돼 폐허가 된 집들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미 보상금을 챙겨 나간 빈집에 마련된 철거민대책위원회 사무실에는 주민 예닐곱명이 둘러앉아 불안한 대화를 속삭였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사무실은 싸늘한 냉기로 가득했다. “(다른 사람들) 보금자리를 만들자면서 우리 보금자리를 뺏는 게 말이 됩니까?” 이들의 하소연은 어둠이 깊숙이 내려앉을 때까지 이어졌다. 인근 남양주시 별내면에 살다 1998년 철거 굴착기를 피해 이 마을로 흘러들어온 함학주(56)씨는 또다시 내쫓길 처지가 됐다. 그는 얼마 전 “2월28일까지 집을 비우라”는 계고장을 받았다. 발신자인 엘에이치(LH)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는 함씨가 머무는 무허가 주택과 창고를 합해 ‘28만원’을 보상비로 책정했다. “어디로 가라는 말입니까.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으라고 하는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집으로 기자를 안내한 함씨의 거칠고 큰 주먹이 너덜너덜한 창고 문짝을 내리쳤다. 이곳에서의 15년 삶, 피와 땀이 밴 창고의 문짝이 ‘삐걱’ 하고 울었다. 함씨의 창고 안은 어두웠다. 그 흔한 전등조차 없다. 매캐한 먼지 냄새는 코를 찔렀다. “이놈은 내가 설비일 할 때 장만했던 절단기요. 이건 농사일하면서 샀던 손수레고.” 창고를 안내하면서 연장들을 설명하는 눈빛은 꼭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그것이었다. 삽, 노루발장도리, 해머, 절단기, 용접기…. 각종 연장들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농사용 도구는 물론이고 상하수도 수리나 보일러 시공 같은 ‘설비일’을 하기 위해 샀던 연장들까지 보관해두는 장소다. 15년 전 갈매동에 정착할 때 가족들과 함께 손수 지은 이 창고는 함씨에게 삶과 노동의 오랜 보금자리다.
남양주 별내면서 쫓겨나
98년 갈매동에 터 잡았더니
이번엔 보금자리 사업에 또…
무허가 이유 ‘푼돈 보상금’ ■ 갈 곳이 없는 연장과 농기구들 함씨의 창고 한켠엔 설비일 때 쓰던 연장 외에 농기구가 더해졌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연장들은 녹이 슬고 켜켜이 먼지가 쌓여갔다. 이때부터 이가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다. 풍치였다. “스트레스 탓이었던 거 같다”고 함씨는 말했다. 몇년 안 가 이가 모두 빠졌다. 돈이 없어 무허가 시술로 틀니를 맞췄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함씨를 더욱 궁지로 내모는 일이 벌어졌다. 2009년 갈매마을이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된 것이다. 토지가 수용되면서 지주는 보상을 받았지만 세입자들은 마을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해 초,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엘에이치공사가 보낸 감정평가사들이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더니 집과 창고를 둘러보고 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보상금이 책정됐다는 서류가 날아왔다. 감정평가액 ‘28만원’.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세들어 살던 집과 창고가 ‘무허가 건물’이라는 게 이유였다. 기가 막혀 집 근처 보금자리지구 시공사 사무실에 달려가 읍소했다. “이 돈(28만원)으로 나 살 집 하나 얻어주소.” 그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원래 살던 고향에서도 아파트 짓는다며 쫓겨났는데 또 이런 일을 당한다니 꿈만 같소. 이 돈으로 개집이나 살 수 있겠소?” 같은 집에 세들어 살던 두 가구는 “더 못 버티겠다”며 마을을 떠났다. 함씨는 앞이 막막하다. 최근에 목수일을 배워 근근이 먹고살았는데, 겨울에는 일감도 떨어져 방 안에 박혀 있는 날이 더 많다. 방은 냉골이다. 아침마다 ‘한보따리’씩 먹어야 하는 혈압·위장·심장·관절약도 고역이다. 평생 노동만 해온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이제 다음달 말을 지나 굴착기가 들이닥치고 창고가 철거되면 함씨의 연장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엘에이치공사는 연장을 옮길 이사 비용은 대주겠다고 했다. “옮길 데가 어디 있을까?”라며 그가 연장을 어루만졌다. 그렇다고 연장을 버릴 수도 없다.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죽기 살기로 버티겠다는 생각이지만 만약 또 쫓겨난다면 지금보다 더 북쪽의 남양주시 진접읍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서울과 가까운 갈매마을보다 부동산 가격이 조금이나마 싸다. “그나마 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다행이오.” 한숨 섞인 담배 연기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수도요금 없고 농업용 전기…
돈 없어 비닐하우스에 살아
입주권커녕 보상금 한푼 없어 ■ 삶에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든 곳 ‘갈매’ 갈매마을은 차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불과 10여분 거리다. 청량리에서 망우로를 따라가다 47번 국도로 접어들면, 오른쪽으로 정돈되지 않은 비닐하우스와 창고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인적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인근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황량한 풍경이다. ‘갈매’는 주변 산이 칡과 매화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풍수지리상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지형, 즉 ‘갈마음수형’에서 동네 이름이 생겼다고 믿고 있다. 목마른 말들이 모이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갈매동 사람들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수도권과 인접한 지역 특성상 서울 사람들이 먹을 채소 등을 키웠다. 육류 소비가 늘면서 닭과 돼지를 기르는 축사도 들어섰다. 1980년대가 되자 축사는 창고로 바뀌었다. 서울 변두리의 가내수공업 공장들은 값싼 창고 부지를 찾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갈매마을엔 ‘창고임대’라고 쓰인 광고 전단지가 마을 벽을 덮고 있다. 노동자들도 함께 정착했다. 갈 곳 없는 소작농들은 창고가 들어서고 남은 ‘쪽땅’에 밭농사를 짓기 위해 하나둘씩 모였다. 서울에서 더는 살기 어려워진 빈민들도 뿌리를 내렸다. 갈매 철거민 대책위원회 조기용(57) 위원장도 80년대 이곳에 정착했다. 조 위원장의 집은 수십년째 무허가 비닐하우스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그는 서울 용두동의 전선을 만드는 회사에 취업해 기숙사 생활을 하던 도중 회사가 구리시로 이전하면서 갈매에 정착했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산 이유는 간단하다. “지하수를 쓰니 수도요금도 안 나오고, 전기는 농업용을 쓰니 일반 가정용의 절반 가격 정도 돼요.” 한마디로 생활비가 일반 주택보다 훨씬 덜 든다는 이유였다.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건설일을 하면서, 각종 연장과 기자재 등을 보관할 창고까지 필요해져 일반 주택을 짓고 살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삶의 팍팍함이 비닐하우스를 떠나지 못하게 했지만 슬하의 3남매를 출가시킬 정도로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 이 비닐하우스는 헐린다. 보상금은 단 한푼도 없다. 아파트 입주권도 나오지 않는다.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평생을 살아온 곳에서 돈 한푼 못 받고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서 잠이 안 옵니다.” 마을을 안내하던 조 위원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LPG 배달업 이기현씨
갈매동 유일 가스배달업소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던 삶
보금자리탓 한순간에 ‘물거품’ ■ ‘보금자리’에 빼앗긴 보금자리 2015년이면 갈매마을은 인구 3만여명의 거대 신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2011년 거주인구 3200여명에 불과한 이곳이 10배 넘는 규모의 도시로 성장하는 것은 ‘보금자리주택사업’ 때문이다. 보금자리주택사업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친서민 정책으로 포장된 공약이다.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85% 안팎)으로 아파트를 공급해 중산층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고, 최저소득층을 위한 영구임대주택을 건설해 서민 주거 안정을 꾀하는 게 목적이다. 정부는 2018년까지 총 150만호를 건설할 계획으로 지금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갈매동도 2015년까지 총 143만4000㎡(43만4000평) 터에 1만여호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주거 환경이 비약적으로 개선된다지만, 정작 보금자리사업 때문에 오히려 지금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이들이 생겼다. 삶에 목말라 갈매마을로 흘러들어온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다. 철거민 2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이곳에 정착하는 순간 이들의 주거 수준은 이미 ‘한단계’ 내려앉은 상태였다.(그래프 참조) 자가는 전세로, 전세는 월세로, 월세는 무허가로, 주거가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제는 다시 ‘한단계’ 추락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대선 뒤인 지난해 12월21일, 다시 찾아간 갈매동은 더욱 풀이 죽어 있었다. 한 철거민은 “박근혜 후보가 당선됐으니 보금자리사업에 더 속도를 낼 게 아니냐”고 말했다. 남은 20여가구 대책회의
2월까지 ‘강제 퇴거’ 계고장
주민 5명 영업방해 고소당해
“이 추위에 나가 죽으라는거냐”
LH “100% 만족할 수 없다” ■ 중산층도 바닥으로 내몰려 철거로 삶터에서 배제당하는 게 빈곤층만은 아니다.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졸지에 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기현(53)씨는 평생 모은 재산을 한꺼번에 날릴 판이다. 이씨는 현재 갈매마을에서 액화천연가스(LPG) 배달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가정생활에 엘피지가 필수다. 마을 인근 식당들도 그의 고객이다. 전남 영암이 고향인 그는 1988년 올림픽이 끝난 뒤 경기도 부천에서 가스 배달일을 시작했다. 당시 창업비용이 4500만원 정도 들었다. 그곳에서 현재의 부인을 만나 가정도 꾸렸다. 탄탄한 기반을 닦은 이씨는 2000년대 초반 ‘목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경기도 시흥으로 자리를 옮겨 가게를 확장했다. 4억원의 권리금도 지불했다. 막상 가게를 옮기고 보니 예상보다 매출이 시원찮았는데, 몇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집을 내놓아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권리금도 못 건질 상황이 되자 결국 이씨는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2005년 갈매마을로 들어왔다. 권리금은 역시 4억원이었다. 살 집과 가스보관소를 겸해 월세 120만원짜리 주택을 마련했다. 갈매동에 단 하나 있는 가스배달 업소였기 때문에 매출은 시흥 때보다 나았다. 그렇게 안정적인 삶이 지속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이씨는 다시 막다른 벽에 부닥쳤다.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선정되면서 나온 보상금이 고작 3200만원이다. 이 가운데 영업보상비가 2000만원이고, 1200만원은 가스통 등을 운반할 때 발생할 이사비용이다. 권리금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우리 가족이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며 이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3200만원으로는 다른 곳에서 개업할 꿈도 꿀 수 없다. 서울 시내는 이미 권리금이 10억원에 육박한다. “보상금은 필요 없어요. 단지 가스 배달일을 계속할 수 있는 공간만 마련해주면 좋겠어요.” 이씨의 표정은 절박했다. ■ 갈가리 찢겨진 마을 지주들은 3.3㎡당 400만~600만원가량의 보상비를 받고 마을을 떠났다.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재산권 행사를 못하던 일부 지주들은 많게는 수십억원의 ‘떼돈’을 벌었다. 하지만 개발제한구역의 특성상 상당수 건물들이 무허가여서 세들어 사는 이들은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 갈매동은 빈집과 철거로 텅 빈 공터, 그리고 버티고 있는 60여가구의 집들이 섞여 있는 유령마을이 됐다. 1년에 한번 마을 가운데 있는 굿당에 모여 안녕과 평화를 빌며 잔치를 벌이던 주민들은 갈가리 찢기고 흩어졌다. 대대로 마을에서 살아온 안규식(73)씨는 “원래는 사람들끼리 사이가 좋았는데 보금자리지구로 지정되고 보상 절차가 시작되면서 서로 데면데면해졌다”고 말했다. 남아 있는 주민들에겐 새해 벽두부터 ‘오는 2월28일까지 집을 비우지 않으면 강제 퇴거조처하겠다’는 엘에이치공사의 계고장이 날아들었다. 대책위원회 소속 주민 5명은 이미 시공사한테서 영업방해 등으로 고소를 당했다. 지난 3일 저녁, 20여가구가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추운 날 나가 죽으라는 거냐.” 주민들의 절망은 분노로 바뀌고 있다. 함학주씨는 계고장을 받고 “가슴이 벌렁거린다”며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창고에 차라리 날 묻어달라고 하시오. 광화문 앞에서 1인시위라도 하고 싶은데 효과가 있겠소?” 지난 4일 마지막으로 찾은 함씨의 창고는 얼어붙은 보일러가 터져 바닥이 빙판이 돼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매정해.” 평생 고된 일로 여유살 한 점 없이 말라붙은 함씨는 창고를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국토해양부 집계를 보면, 2011년 한해에만 전국에서 7만6000여호의 집이 철거로 사라졌다. 2013년 1월 현재 주택환경개선사업, 주택재개발사업, 주택재건축사업, 도시환경정비사업 등의 명목으로 전국 2100여개 구역에서 철거가 진행중이거나 계획중이다. 누군가는 또 빈손으로 쫓겨나야 할 운명이다. 구리/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