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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길]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거늘

ngo2002 2012. 12. 7. 09:46

[신정일의 길]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거늘

전쟁터에 나간 전사는 총이나 칼을 잃어버리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시력이 약해져서 글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절망, 그런 슬픔이 또 어디에 있을까?

괴로움도 즐거움도 다 책 속에만 있는데, 눈앞에 있는 책의 글자가 안 보인다면, 평생을 책만 읽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얼마나 당혹스럽고 세상 사는 재미가 없어지겠는가? 그 시력의 중요성을 글로 남긴 사람이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시력이 약화되어, 자기가 쓴 글이나 남이 쓴 글을 읽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읽지 못한다’는 것은 문자 이상의 뜻을 갖고 있다. 밀턴 같은 천재는 눈이 안 보여도 위대한 작품을 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 자신만 하더라도 남이 쓴 글이나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내 눈으로 봐야 사고가 수월하게 진행되어 나가지, 남의 말을 듣고 무엇을 이해할 때 사고는 거기서 크게 멀리 나가지 못한다. 나는 눈을 통해 몽상하고 철학한다.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손으로 교정할 수 있다. 귀로 들을 때 그 교정은 그리 쉽지 않다.”

<책 읽기의 괴로움>에 실린 글이다. 평생을 공부만 하다가 세상을 하직한 김현 선생의 글을 보면 ‘책을 못 보는 서러움’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훗날 <행복한 책 읽기>를 펴냈다.

내 생각도 그분과 다르지 않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자 행복이라면 보고 싶은 책을 시도때도 없이 보며 살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부럽다고 말한다.

왜 부럽냐고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정년도 없고 명퇴도 없잖아요.” 그때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 대신 나는 월급도 없고, 연금도 없으며 오로지 정직하게 한 자 한 자 쓴 원고료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눈이 나빠지고 기억력이 감퇴되면 그게 바로 정년이요, 명예퇴직이다. 눈이 나빠지면 책 읽기는 고사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도 잘 안 보일 테니 얼마나 갑갑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아직은 나에게 세상 도처에 즐거운 일이 수두룩한 것 같다. 눈이 잘 보이는 것도, 귀가 잘 들리는 것도, 냄새를 잘 맡는 것도, 특히 말을 할 수 있는 것과 다리가 튼튼해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도 하나 하나가 다 행복이다. 그 행복을 더 먼데서 찾다보니 세상은 항상 불만족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펼쳐진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이 순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입력 : 2012-12-06 21:02:43수정 : 2012-12-06 21: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