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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퇴계·율곡 이후 400여년 논쟁”

ngo2002 2012. 11. 10. 10:49

[책과 삶]“퇴계·율곡 이후 400여년 논쟁”

ㆍ서로의 존재·가치론 프레임 차이서 비롯된 소통오류
ㆍ‘횡설과 수설’ 이승환 교수

<슈퍼스타K>에서 가수 평가 기준을 두고 두 심사위원의 의견이 부딪쳤다고 가정하자. 심사위원 ‘갑’은 음악성과 신체조건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악성이 음정·박자·리듬 같은 음악원리에 대한 이해라면, 신체조건은 가수 특유의 음색처럼 몸의 자질을 뜻한다. 갑은 잠재력 있는 가수를 뽑기 위해 둘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사위원 ‘을’은 노래 자체가 주는 전체적인 느낌을 평가하면 그만이라고 주장한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56·사진)는 <횡설과 수설>(휴머니스트)에서 두 심사위원의 관점이 곧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퇴계는 ‘리(理)’가 우리 마음속의 도덕적 성향이라면, ‘기(氣)’는 욕구에 충실하려는 성향이라고 말한다. 욕구(기)에만 빠져 도덕(리)에 어긋나서는 곤란하다. 퇴계는 ‘리’와 ‘기’를 대비시켜 가치론적 관계로 파악한 셈이다. 반면 율곡은 ‘기’를 존재를 구성하는 재료로, ‘리’는 존재를 구성하는 원리로 봤다. ‘기’는 눈에 보이지만, ‘리’는 보이지 않게 세상에 깃들어 있다. 율곡은 ‘리’와 ‘기’를 존재론을 해명하는 데 쓴 셈이다.

이 교수는 퇴계의 학설이 ‘리’(도덕)와 ‘기’(욕구)라는 기호를 좌·우에 배치한 ‘횡설(橫說)’이었다면, 율곡의 학설은 ‘리’(원리)가 ‘기’(재료)에 올라타 있는 상·하, 승반(乘伴) 관계인 ‘수설(竪說)’로 본다. 이 같은 구도로 보면 1572년 율곡이 퇴계를 비판한 이래 400년간 지속된 퇴계의 ‘주리파(主理派)’와 율곡의 ‘주기파(主氣派)’ 논쟁이 결국 프레임의 차이에서 비롯된 ‘소통 오류’였음이 드러난다. 가치론이냐 존재론이냐에 따라 ‘리’와 ‘기’의 의미가 도덕성향과 욕구성향에서 원리와 재료로 바뀌는데, 그 중층적인 의미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가 서로의 프레임과 개념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였다면 허탈한 마음을 넘어 학계에 파란이 일 것도 분명하다.

지난 8일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대학 2학년 때 ‘한국철학사’를 들으면서 퇴계·율곡 간의 논쟁이 왜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지 의문을 가졌던 것이 이 책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영국경험론’이나 ‘과학철학’ 강의는 명쾌한 데 비해 ‘한국철학사’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퇴계와 율곡의 이론 차이를 각각 가치와 사실, 당위와 존재로 구분한 그의 이론은 명징하다. “사실과 가치가 미분화됐던 근대 이전에는 당연히 서로 프레임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사실에 입각해 비가 오지 않는 원인을 따지지만, 사실과 가치를 혼동한 옛사람들은 하늘이 노여워했다고 봤지요. 현대학문의 세례를 받은 지금까지도 16~17세기의 학술 수준을 답습해선 안됩니다. 데카르트부터 선대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발전했던 서양철학과 달리, 조선 유학 연구자들은 옛사람의 말을 무조건 숭배하는 태도만을 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명한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도 이 교수의 논의에 입각하면 쉽게 풀린다. 퇴계는 인간의 선한 본성인 사단(仁·義·禮·智)은 도덕성향인 ‘리’에서 비롯되고, 기쁨·슬픔 등 칠정(喜·怒·哀·樂·愛·惡·欲)의 감정은 욕구성향인 ‘기’에서 나온다고 봤다. 반면 존재론에 입각해 ‘리’(원리)가 ‘기’(재료)를 타고 감정으로 실현된다고 생각한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한곳에서 나오는데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묻는다.

이 교수는 ‘주리파’와 ‘주기파’의 구분이 1929년 다카하시 도오루에서 비롯된 ‘식민사관’이라 말했다. 도오루는 주리파와 주기파의 화해 불가가 조선 사상의 분열성·고착성·종속성을 상징한다고 봤다. “사실 조선의 모든 유학자는 ‘주리파’였어요. 퇴계학파나 율곡학파 내에서도 벌어진 논쟁이 많았던 걸 보면 주기와 주리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죠. 프레임 차이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새로운 해석이 “조선 유학이 현대 분석철학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게 한다”고 본다. “특히 율곡학파가 말한 승반의 구조는 현대 심리철학·윤리학·미학에서 사용하는 ‘수반이론’에 비견될 만한 것입니다. 서양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이론을 16세기에 이미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를 들어 말의 상태가 기수의 승마능력을 결정하듯 ‘리’와 ‘기’는 더불어 변하는 ‘공변’ 관계에 있다는 것이 승반론의 요지다. 인간 또한 본래 선한 성품인 ‘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각기 다른 몸뚱이인 ‘기’에 따라 수많은 성품이 빚어진다.

이 교수는 오늘날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횡설과 수설로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 이상주의적 진보와 보수는 각기 횡설의 입장에서 ‘정의’(리)와 ‘사적 이익’(기)만을 강조하기에 늘 평행선이다. 그는 존재론에 입각한 경제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부구조(수설)를 전제한 뒤 정의와 사적 이익(횡설)을 생각하는 것이 진보와 보수가 나아갈 길이라며 횡설·수설의 통합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남명의 <학기유편>에 실린 24개의 성리학 도표 중 14개가 원대 유학자인 정복심의 <사서장도>에서 옮겨왔다는 사실을 새로 발굴해 이번 책에 함께 싣기도 했다. 그는 이런 발굴 또한 “지난 20년간 가진 합리적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합리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치와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 16~17세기 유학자들이 끝없는 다툼으로 날을 지샜듯 현대를 사는 우리 또한 “사실에 가치를 덧씌워 맹비난하는 세태를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를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입력 : 2012-11-09 20:12:42수정 : 2012-11-09 20: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