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이방인의 덕수궁 돌담길 탐방
대한제국의 근대화 역사 속에 외국인을 가장 먼저 맞이한 정동. 덕수궁 대한문에서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을 걸으며, 구 러시아공사관, 중명전, 정동교회 등을 둘러본다면 개화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돌담길 따라 경향신문사까지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 또는 정동길로 불리며 오래 전부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힌다. 특히 서울의 고궁이 하나둘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지나간 역사의 흔적들을 다시금 새롭게 조명하면서 덕수궁을 중심으로 자리한 정동길 역시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근대 100년 역사의 현장, 서울 정동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대한문 앞 광장에는 평일에도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 나라 사오리(일본 야마나시현)가 수문장 교대식에서 전통복식을 입고 타북(북치기) 체험을 한 후 기념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3박 4일로 한국을 찾아 서울 시내 관광을 하였습니다. 경복궁, 북촌한옥마을, 남산, 난타공연 관람, 동대문 시장 쇼핑까지 관광을 하였는데, 동대문 쇼핑이 제일 즐거웠어요. 또 오늘은 한국의 전통체험으로 아주 특별한 체험까지 하게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라며 마냥 신기한 듯 즐거워한다.
덕수궁을 비롯해 비교적 시내 중심에 자리한 조선의 5대 궁궐은 외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관광지 중 한 곳. 그 중 덕수궁과 그 둘레길인 정동길은 다시금 새롭게 조명되면서 찾는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덕수궁이 자리한 중구 정동은 개화기의 역사를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근대 서울의 역사가 많이 남아 있다. 수문장 교대식을 시작으로 덕수궁의 안팎을 둘러보고 정동길을 걷다보면, 우리 민족 역사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덕수궁을 둘러보고 약 1.5㎞의 돌담길을 따라 정동의 근대 문화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다보면 이야기가 쏠쏠하게 이어진다.
조선 왕궁을 둘러싼 서양식 건물들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 가운데 근대 백년 역사의 현장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 자리한 정동이다. 덕수궁(德壽宮)의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다. 하지만 경운궁이 지금의 덕수궁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의 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태후와 태자비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을 하였고, 이후 1897년 고종이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전각 등이 세워졌고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근대 백년 정동의 역사가 쓰여지게 된다. 그 해 9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세워지고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한 뒤, 비로소 경운궁은 조선의 정궁(正宮)이 된다. 하지만 덕수궁이란 명칭으로 불린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의 일이다. 이 시기의 중건 과정에서 수옥헌(漱玉軒·후에 중명전으로 고침)·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 등이 지어졌고, 1900년에서 1910년에 걸쳐 석조전(石造殿)이 지어졌다. 현재의 덕수궁 면적은 6만1500㎡로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작은 규모다. 또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에 전각의 배치가 정연하지 못하다. 그리고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고유한 우리 궁궐의 양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어쩌면 당시 외세에 둘러싸여 있던 조선왕조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왕의 뜨락에 스며든 가비 향
따라서 지금의 덕수궁은 전통적인 우리 궁실의 양식을 부분적으로 따르는 한편,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재된 독특한 건물의 구조미를 지니게 된다. 그 중 최근 영화 <가비>의 영향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정관헌 역시 혼재된 양식을 대표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축을 융합한 건물들로 근대 서양건축 도입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다소 낯선 제목인 ‘가비(加比)’는 커피(Coffee)의 우리식 발음의 고어(古語)라 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일본 및 서양세력의 진출로 인하여 경운궁을 중심으로 정동 일대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던 중심지였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정동 일대에 러시아·영국·일본·미국 등 열강의 영사관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정관헌은 궁내의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고종은 다과를 들거나 연회, 음악을 감상할 목적으로 덕수궁 안에 정관헌을 마련한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관헌은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장식되어 화려하고 이색적인 모습이다. 고종은 이 정관헌에서 외국의 사신들을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거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당시 이미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으로 기록돼 있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커피 애호가로 변모한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어한 후에도 커피를 즐겼다.
하지만 고종은 커피를 직접 타지는 않았으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형인 미스 손탁이 고종의 바리스타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커피에 매료된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의 건물 한 채를 하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이며, 1층은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인 ‘정동구락부’다. 현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바로 손탁 호텔 자리다.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뜻의 정관헌에서 고종은 쓰고도 달콤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서구열강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였던 자신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백년의 역사를 넘어 다시 열린 덕수궁
최근 정관헌은 영화의 배경으로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지난해부터 정관헌에서 백년 전 근대 자주외교의 꽃을 피운 ‘대한제국’의 외국공사 접견례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를 펼치고 있다. 당시 고종은 중국, 일본으로 국한됐던 외교에서 미국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으로 근대 외교관계의 폭을 넓혀간다. 이로 인해 서양인의 덕수궁 출입이 잦아지면서 사신들은 국빈 대접을 받으며 입궁했다.
하지만 서양 외교관의 예법은 동양식 외교사절단의 예법과는 차이가 많았다. 이에 고종은 과감히 서양의 예법을 수용하는 등 외국공사 접견례 의식절차를 재정비한다. 외국공사를 맞이할 때면 옥좌에 앉지 않고 교의에 앉아 외교사절단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까지도 조선의 신하들은 왕에게 절을 했다. 하지만 외국공사들은 왕에게 허리를 굽혀 세 번 인사를 했고, 고종은 손을 들어 답례했다. 이는 고종이 외국공사의 접견을 통해 동서양 문화를 교류하고, 더불어 세계에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했던 자주외교의 의지였다. 교의에 앉아 외국공사의 눈높이로 그들을 맞이한 이유는 대등한 외교관계를 펼쳐가겠다는 의지를 암시한 것이었다.
한편 고종은 플랑시 프랑스 공사와 ‘국가 홍보’에 대한 정보를 자주 주고받으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세계 최초 활자본 ‘직지심경’을 전시하는 등 근대식 외교의 활로를 통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피력하려 노력했다. 국왕의 근엄함을 잃지 않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고종의 모습은 자주외교를 꽃 피워 나라를 지키려 했던 황제의 당당함이었다. 이에 지난 3월 24일부터 이틀간 덕수궁 정관헌에서 ‘승정원일기’ ‘구한국 외교문서’ ‘대한예전’ ‘예식장정’ 등의 자료를 근거로 당시의 외국공사 접견례를 재현하는 행사를 펼쳤다.
이날 친구들과 함께 재현행사를 관람한 프랑스인 마리앙(marion)은 당시 프랑스 공사의 모습을 재현한 배우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당시의 한국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며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역사 속에 외국인을 가장 먼저 맞이한 정동. 덕수궁 대한문에서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을 걸으며 구 러시아공사관, 중명전, 정동교회 등을 둘러본다면 개화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관헌에서는 올 하반기에도 매주 토·일 오후 3시에 같은 장소에서 연회 재현 등 다양한 행사를 선보일 예정이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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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문 앞 광장에서 열리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
덕수궁 대한문에서 돌담길 따라 경향신문사까지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 또는 정동길로 불리며 오래 전부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힌다. 특히 서울의 고궁이 하나둘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지나간 역사의 흔적들을 다시금 새롭게 조명하면서 덕수궁을 중심으로 자리한 정동길 역시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근대 100년 역사의 현장, 서울 정동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대한문 앞 광장에는 평일에도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 나라 사오리(일본 야마나시현)가 수문장 교대식에서 전통복식을 입고 타북(북치기) 체험을 한 후 기념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3박 4일로 한국을 찾아 서울 시내 관광을 하였습니다. 경복궁, 북촌한옥마을, 남산, 난타공연 관람, 동대문 시장 쇼핑까지 관광을 하였는데, 동대문 쇼핑이 제일 즐거웠어요. 또 오늘은 한국의 전통체험으로 아주 특별한 체험까지 하게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라며 마냥 신기한 듯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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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프랑스 공사의 모습을 재현한 배우와 함께 사진을 찍은 프랑스 관광객 마리앙(왼쪽). |
조선 왕궁을 둘러싼 서양식 건물들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 가운데 근대 백년 역사의 현장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 자리한 정동이다. 덕수궁(德壽宮)의 원래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다. 하지만 경운궁이 지금의 덕수궁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의 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태후와 태자비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을 하였고, 이후 1897년 고종이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전각 등이 세워졌고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근대 백년 정동의 역사가 쓰여지게 된다. 그 해 9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세워지고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한 뒤, 비로소 경운궁은 조선의 정궁(正宮)이 된다. 하지만 덕수궁이란 명칭으로 불린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의 일이다. 이 시기의 중건 과정에서 수옥헌(漱玉軒·후에 중명전으로 고침)·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 등이 지어졌고, 1900년에서 1910년에 걸쳐 석조전(石造殿)이 지어졌다. 현재의 덕수궁 면적은 6만1500㎡로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작은 규모다. 또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에 전각의 배치가 정연하지 못하다. 그리고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고유한 우리 궁궐의 양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어쩌면 당시 외세에 둘러싸여 있던 조선왕조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왕의 뜨락에 스며든 가비 향
따라서 지금의 덕수궁은 전통적인 우리 궁실의 양식을 부분적으로 따르는 한편,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재된 독특한 건물의 구조미를 지니게 된다. 그 중 최근 영화 <가비>의 영향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정관헌 역시 혼재된 양식을 대표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축을 융합한 건물들로 근대 서양건축 도입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다소 낯선 제목인 ‘가비(加比)’는 커피(Coffee)의 우리식 발음의 고어(古語)라 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일본 및 서양세력의 진출로 인하여 경운궁을 중심으로 정동 일대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던 중심지였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정동 일대에 러시아·영국·일본·미국 등 열강의 영사관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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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대한문 앞 광장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
정관헌은 궁내의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고종은 다과를 들거나 연회, 음악을 감상할 목적으로 덕수궁 안에 정관헌을 마련한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관헌은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장식되어 화려하고 이색적인 모습이다. 고종은 이 정관헌에서 외국의 사신들을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거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당시 이미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으로 기록돼 있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커피 애호가로 변모한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어한 후에도 커피를 즐겼다.
하지만 고종은 커피를 직접 타지는 않았으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형인 미스 손탁이 고종의 바리스타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커피에 매료된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의 건물 한 채를 하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이며, 1층은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인 ‘정동구락부’다. 현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바로 손탁 호텔 자리다.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뜻의 정관헌에서 고종은 쓰고도 달콤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서구열강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였던 자신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백년의 역사를 넘어 다시 열린 덕수궁
최근 정관헌은 영화의 배경으로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지난해부터 정관헌에서 백년 전 근대 자주외교의 꽃을 피운 ‘대한제국’의 외국공사 접견례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를 펼치고 있다. 당시 고종은 중국, 일본으로 국한됐던 외교에서 미국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으로 근대 외교관계의 폭을 넓혀간다. 이로 인해 서양인의 덕수궁 출입이 잦아지면서 사신들은 국빈 대접을 받으며 입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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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부터 정관헌에서 ‘대한제국’의 외국공사 접견례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를 펼치고 있다. |
하지만 서양 외교관의 예법은 동양식 외교사절단의 예법과는 차이가 많았다. 이에 고종은 과감히 서양의 예법을 수용하는 등 외국공사 접견례 의식절차를 재정비한다. 외국공사를 맞이할 때면 옥좌에 앉지 않고 교의에 앉아 외교사절단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까지도 조선의 신하들은 왕에게 절을 했다. 하지만 외국공사들은 왕에게 허리를 굽혀 세 번 인사를 했고, 고종은 손을 들어 답례했다. 이는 고종이 외국공사의 접견을 통해 동서양 문화를 교류하고, 더불어 세계에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했던 자주외교의 의지였다. 교의에 앉아 외국공사의 눈높이로 그들을 맞이한 이유는 대등한 외교관계를 펼쳐가겠다는 의지를 암시한 것이었다.
한편 고종은 플랑시 프랑스 공사와 ‘국가 홍보’에 대한 정보를 자주 주고받으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세계 최초 활자본 ‘직지심경’을 전시하는 등 근대식 외교의 활로를 통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피력하려 노력했다. 국왕의 근엄함을 잃지 않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고종의 모습은 자주외교를 꽃 피워 나라를 지키려 했던 황제의 당당함이었다. 이에 지난 3월 24일부터 이틀간 덕수궁 정관헌에서 ‘승정원일기’ ‘구한국 외교문서’ ‘대한예전’ ‘예식장정’ 등의 자료를 근거로 당시의 외국공사 접견례를 재현하는 행사를 펼쳤다.
이날 친구들과 함께 재현행사를 관람한 프랑스인 마리앙(marion)은 당시 프랑스 공사의 모습을 재현한 배우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당시의 한국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며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역사 속에 외국인을 가장 먼저 맞이한 정동. 덕수궁 대한문에서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을 걸으며 구 러시아공사관, 중명전, 정동교회 등을 둘러본다면 개화기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관헌에서는 올 하반기에도 매주 토·일 오후 3시에 같은 장소에서 연회 재현 등 다양한 행사를 선보일 예정이다.
글·사진|이강<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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