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부(富)를 추구한 중국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 | |||||||||||||||||||
[하성봉의 중국이야기 24] 보시라이 사건으로 본 중국정치권의 치열한 권력투쟁 | |||||||||||||||||||
| |||||||||||||||||||
보시라이(薄熙萊·63) 전 충칭(重慶)시 서기는 지한파다. 한국을 자주 방문했고 한국의 발전양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만큼 한국에 잘 알려진 중국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태자당(太子黨) 출신에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서구적인 마스크로 오랫동안 국내언론에 빈번히 소개됐다. 10년전 필자가 베이징 특파원으로 있던 때에는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시장, 랴오닝성 성장을 할 때였는데 인민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그가 다롄시장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시민들이 헤어지기가 아쉬워 연도에 나와 줄을 선 채 눈물을 흘렸다. 그가 업무차 택시를 잡을 때 기사들도 택시비를 거부할 정도였다. 보시라이는 ‘울타리 없애기’로 다롄시의 도시미관을 확 뜯어고쳤다. 랴오닝성장 때는 개혁, 개방 1번지인 광둥성(廣東省) 선전(深圳)의 발전모델을 배우러 열차를 전세내 수천명의 직원과 함께 다녀와 화제가 됐다. 그의 거취와 활동내용은 이후에도 국내 언론에 단골메뉴가 됐다. 그러나 2012년 2월 심복인 왕리쥔(王立軍,53)이 미국망명을 요청하고 그의 정치운명에 치명적인 비밀자료와 내용이 중앙당에 전달되면서 화려했던 그의 정치역정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중국정치권내의 치열한 권력투쟁 드러나…부인의 영국인 살인 혐의 치명적 이번 보시라이 사건은 중국 정치, 사회의 변화와 인식에 여러 시사점을 준다. 드러난 보시라이 실각의 주요 원인은 중국정치권내의 권력투쟁과 개인비리 혐의다. 올가을 제5세대 지도부로의 세대교체를 앞두고 태자당과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출신간의 치열한 권력암투 속에 보시라이는 후진타오 주석에 대한 전화도청 등 개인비리와 두번째 부인 구카이라이(谷開萊,52)의 영국인 기업가 닐 헤이우드(41) 살인혐의가 드러나면서 결국 몰락하게 됐다.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의 집사인 장샤오쥔(張曉軍)과 공모해 치정관계에 있던 헤이우드에게 청산가리를 음식물에 넣어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왕리쥔 왜 미국 총영사관으로 들어 갔나…생명의 위협 느껴 미국망명 신청 보의 심복이던 왕리쥔은 왜 미국 망명을 원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왕리쥔이 쓰촨성(四川省) 청두(城都)주재 미국 총영사관으로 들어간 시점은 2012년 2월 6일 오후였다. 왕리쥔은 나흘전인 2월 2일 충칭시 공안국장직에서 면직된 뒤 교육,환경 담당 부시장으로 밀려났다. 이는 왕리쥔의 보시라이 비리 폭로의 발화점이 됐다. 정황을 보면 왕리쥔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도청사건과 관련해 중앙당의 조사가 숨통을 조여온데 반해 보시라이가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자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의 사망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보의 부인 구카이라이의 직접적인 개입이 나타났고 사건 처리문제와 관련해 보와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2월 2일 보시라이가 일방적으로 공안국장직을 박탈하고 자신을 내치자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함께 보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 이와함께 왕리쥔은 살인사건과 관련해 자신이 보 가족의 혐의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는 왕리쥔이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장을 한 채 미국 총영사관을 찾은데서도 드러난다. 당시 왕은 헤이우드의 독살사건과 관련된 증거자료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과 영국간의 관계에서 볼 때 미 당국이 영국인 피살사건의 해결을 위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다. 결국 왕리쥔은 사전에 연락을 한뒤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망명요청을 하게 된다. 왕리쥔은 책임감 강한 저돌주의적 성격…‘반범죄 영웅’이지만 안하무인 태도 왕리쥔은 타협을 모르는 원칙론자로 평가된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책임감이 강하고 스스로에 대해 엄격했다고 돼 있다. 왕리쥔은 랴오닝성 톄링(鐵嶺)시의 공안국장을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조폭들을 때려잡으면서 ‘범죄와의 전쟁’(打黑英雄)에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받은 표창장과 수상기록만 해도 수두룩하다. 당시 보시라이와 인연을 맺은 왕리쥔은 2008년 6월 보의 요청으로 충칭에 부임한다.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로 부임 한뒤 반년쯤 지난 때이다. 왕리쥔은 충칭시에서도 능력을 한껏 발휘했다. 보시라이의 창홍다헤이(唱紅打黑, 사회주의 문화는 고양시키고 불법폭력은 엄격히 근절)의 기치 아래 폭력배소탕작전에 나섰다. 2009년 6월부터 왕리쥔의 지도아래 폭력조직 300개, 3천명의 폭력배들이 검거됐다. 이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경을 받았다. 2010년 3월에는 폭력배들과의 연계를 끊기위해 자신의 직속부하들은 모두 면직시킨뒤 새로 임용하는 극약처방까지 내렸다. 심지어 조폭들이 그의 머리에 500만위안(약 9억원)의 현상금을 걸 정도였다. 또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해 노상에서 살해를 기도하기도했다. 실제 왕리쥔의 몸에는 20여군데의 상처가 있다. 이런 공로로 왕리쥔은 2011년 1월 14일 충칭시 제11차전인대 대표가 됐다. 왕리쥔은 지독한 노력형이다. 톄링시의 교통경찰로 있을 때 개인비용으로 선양(審陽)까지 가서 멋진 손동작으로 교통통제하는 요령을 배운뒤 톄링시에서 실행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왕리쥔은 경쟁심이 강했다. 주위에선 출세를 위한 ‘질투심’이 왕리쥔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왕리쥔의 독불장군식의 행동에 대해 주위로부터 불만을 사기도 했다. 저돌적인 성격으로 인해 동료들에게서 배척당하기도 했다. 무리한 수사를 하다 무고 등 혐의로 여러 차례 조사를 받고 18개월동안 피고가 되기도 했다. 왕리쥔은 네이멍구 아얼산(內蒙古 阿爾山) 출신의 몽고족이다.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몽고족은 다혈질이다. 중국 포털 바이두에는 그의 단점에 대해 “일할 때 급하며, 사람을 욕할 때 함부로 대한다”고 돼 있다. 불같은 성격으로 평소 주위사람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태도로 구설에 올랐다. 2010년말에는 사실을 왜곡보도한 언론사와 해당기자를 상대로 법정소송을 하겠다고 선언해 논란이 일기도했다. 톄링 공안국장시절인 1999년 3월 왕리쥔은 인력거 인부를 두들겨 팬 것으로 기소됐으나 법원에서 무죄가 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시라이의 넘치는 자신감이 화불러…왕리쥔과 인연이 치명적 ‘악연’으로 결말 중국언론들은 보시라이의 몰락 원인이 너무 야심만만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시하는 ‘충칭식 경제모델’이 당상층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성급하게 확장했다. 왕리쥔 사건뒤에도 여러 차례 경계선을 넘었다. 2월 8일 부친이 창설한 윈난성 쿤밍의 14집단군을 방문했으며 전인대에 출석해 홍콩언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또 전인대 팀회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군대’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등 자신의 무덤을 팠다는 지적이다. 이런 표현 은 공청단파들에게 후 총서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보시라이의 ‘범죄와의 전쟁’은 타인을 정치적으로 박해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보시라이는 2008년 6월 부패척결을 위해 왕리쥔을 랴오닝성(遼寧省)에서 불러들였다. 보시라이와 왕리쥔이 힘을 합치자 ‘호랑이가 날개를 단’식으로 폭력배들이 잡혀들어왔다. 범죄와의 전쟁은 중국의 법률도 완전히 무시한 채 진행됐다. 문화대혁명식으로 먼저 사람들을 잡아들인 뒤 증거를 찾아내고, 증거를 찾지 못해도 계속 감금했다. 인권과 절차를 무시한 불법수사가 진행된 셈이다. 보는 전임 충칭시 당서기를 역임한 왕양(汪洋) 현 광둥성(廣東省) 서기의 측근을 잡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왕양과 가까운 충칭시 전사법국장 원창(文强)이 사형당했다. 왕양은 후진타오 주석과 가까운 공청단 출신으로 공청단을 자극하는 결과가 됐다. 충칭시민들은 박수를 쳤지만 공산당 상층부가 볼 때는 ‘튀는 행동’으로 비춰졌다. 이와함께 결정적인 것은 후진타오 주석 등 현 지도부 인사들에 대한 전화도청 혐의다. 보시라이는 충칭을 방문한 고위인사뿐 아니라 지난해 8월까지 외국산 최신 도청기구로 후 주석을 비롯해 당정 최고간부들이 거주하는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전화를 도청한 의혹을 받고 있는 것으로 외신은 전한다. 보는 올 10월 열리는 제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노리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도청의 동기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행동은 당내 기율을 파괴한 중대범죄로 보시라이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 됐다. 이와함께 중국 지도부는 그간 저렴한 임대주택과 후커우(戶口) 제공 등 보시라이식 포퓰리즘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원자바오 총리가 3월 14일 보시라이를 겨냥해 반성을 촉구한 것도 이 맥락이다. 이런 와중에 보에 대한 배신감과 극도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왕리쥔이 보시라이의 비리 문건을 들고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폭로한 것이 자폭의 뇌관으로 작용했다. 왕리쥔과의 인연이 치명적인 ‘악연’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중국 공산당내 부패와 비도덕성 한도 넘어…관시(關係)가 부패의 고리로 작용해 졸업을 앞둔 중국 대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직업은 공무원이다. 중국사회는 아직 권력지향적이다. 권력에는 당연히 부(富)가 따른다. 중국은 공산당이 사실상 유일당으로 견제세력이 없다. 중국내 공산당원은 8천만명으로 공직자로서 성공하려면 당가입이 필수적이다. 성, 시, 현정부 등 정부단체뿐 아니라 대학교 등 교육기관, 경찰(公安), 군대, 언론사 등 힘있는 모든 조직을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공산당은 일사불란한 무소불위의 권력기구다. 공산당이 각 분야에서 공정하게 제역할을 한다면 그만큼 이상적인 조직기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패와 비리는 베일속의 어둠속에서 싹트게 마련이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구조는 부패를 양산한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이러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또한 중국은 관계의 끈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중국에서는 이를 “관시”(關係)라고 부른다. 한국의 혈연, 학연, 지연 등 인맥관계와 상통하는 말이다. 중국에서 어떤 일을 해결하고자 할 때 크든 작든 ‘관시’가 동원된다. 현재 공산당내의 부패 구조는 ‘권력+관시’가 결합된 구조로 이런 특수성이 중국내 부패를 양산하는 거대한 시스템적 인큐베이터가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권력의 줄을 잡지 않으면 사업이 힘들다. 권력이 부패를 방조할 때 관시는 부패의 연결고리가 되면서 힘을 발휘한다. 또 중국은 입법, 행정, 사법 등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기능이 없다. 사법기구는 아직도 독립성이 미약하며 행정기구에 복속된 것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하다. 또한 국가의 통제를 받는 언론도 제4부로서의 독자적인 비판기능을 못하고 있다. 언론은 거세된 권력으로 일정한 테두리내에서만 취재와 보도가 가능하다. 보시라이 사건은 공산당 내의 이 같은 취약한 구조적인 통치시스템에서 탄생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이 태자당과 공청단의 권력투쟁이든 보의 개인부패와 비리이든 간에 그 탄생의 뿌리는 통제되지 않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공산당 권력이라 할 수 있다. 보의 부인 구카이라이가 영국인 사업가를 청산가리로 독살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행위 또한 준비과정과 실행단계에서 공산당 고위공직자인 남편의 힘과 권력으로 영원히 비밀이 묻혀질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신들에 따르면 구카이라이와 헤이우드간의 치정과 금전관계로 문제가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헤이우드가 보시라이 부부가 국외로 빼돌린 돈세탁 과정을 폭로하려 하자 입을 막기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보시라이는 2012년 10월께 당대회에서 최고지도자인 정치국 상무위원직이 유력한 상태였기 때문에 헤이우드는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중국 당국의 언론통제에 한계 노출…중국 트위터가 소식전하고 파문 확산 시켜 보시라이 사건의 시작은 왕리쥔 공안국장이 2월 6일 미국 총영사관으로 들어가 망명을 요청하면서 부터다. 중국내 정치권의 움직임은 그간 비밀에 갖혀있었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중국에 수많은 외신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지만 공식적인 브리핑과 공개된 자료 외에는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 내부 인사가 기밀을 누설하게 되면 반역죄로 처벌받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중국의 누리꾼들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실시간으로 해외 화교 언론이나 홍콩 언론의 보도를 신속하게 확산시키면서 파문이 커졌다. 인터넷 매체 둬웨이왕(多維網)이 왕리쥔 망명이후 보시라이의 교체를 처음 보도했다. 반체제사이트 보쉰닷컴(boxun.com)도 ‘보시라이는 최고의 간신’이란 표현이 담긴 왕리쥔의 서신을 처음 공개했다. 중국은 최근 사건이 커지자 검열을 강화하고 소문 유포자를 처벌하는 등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못 거두고 있다. 중국은 인터넷 인구가 4억명으로 온라인에서 전파되는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번 사건은 중국 당국의 언론 통제에 한계가 드러난 것으로 분석된다. 이제 중국 당국도 언론 환경의 변화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단계에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1년 말 당간부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불법매각해 터져나온 광둥성 우칸춘(烏坎村) 마을의 농민시위사건도 인터넷과 국외 언론을 통해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고 여론이 조성돼 주민들의 의견이 수용되면서 해결점을 찾았다. 왕리쥔의 망명사건도 마찬가지다. 한국같으면 언론사에 폭로를 하거나 검찰에 제보를 하고 신병안전 요청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내에서 폭로를 했더라도 보시라이의 입김 아래에서 수사당국과 언론사가 제기능을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판단으로 왕리쥔은 결국 미국 총영사관의 문을 두드렸다. 중국 당국은 최근 보시라이에 대한 수사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밝혔다. 이번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지만 발표를 약속한 이 태도 또한 중국 사회의 변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계속>
|
'기획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성봉의 중국이야기7] 하얼빈에 새겨진 안 의사와 역사의 흔적 (0) | 2012.05.18 |
---|---|
[하성봉의 중국이야기10] 70여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정율성' (0) | 2012.05.18 |
늦어지는 은퇴시기..`50대후반 앞으로 10년 더 일한다` (0) | 2012.05.16 |
흔들리는 한국금융 대해부 (0) | 2012.05.16 |
지자체 경쟁력 대해부/1부 (0) | 2012.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