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음악가 정율성, 그는 왜 군가를 작곡했나 | |||||||||||||||||||||||||||||||||||||||||||||||||||||||||||||||||||||||||||||||||||||||||||
[하성봉의 중국이야기10] 70여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정율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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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생활과 시대의 산물…옌안(延安)은 당시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 같아 중국인들은 정율성 음악가가 작곡한 ‘연안송’을 듣고 부르면서 중국적이지도 않으면서 낭만적인 서양음악의 선율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인들은 연안송이 서정성과 전투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곡을 들어보면 전반부가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로 잔잔하게 흐르다가 중간에 발랄하고 빠른 곡으로 진행된뒤 마지막 부분에서 또다시 잔잔한 분위기로 마무리되는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율성 음악가가 당시 서양 고전음악을 기조로 삼으면서도 중간에 행진곡풍을 더하면서 다른 중국인 음악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연안송’이 낭만적인 송가(頌歌)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대해 20세기초 한반도가 서양문물의 영양분을 풍부하게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중국인들은 분석한다. 또한 정율성이 당시 행진곡 등 군가를 많이 창작한 것은 항일투쟁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음악은 생활과 시대의 산물이다. 정율성 음악가가 옌안(延安)에 갔을 때는 1937년 10월로 일본 침략이 최고조화되고 무력충돌이 극대화하던 시기였다. 항일이 시대의 조류가 된 상황에서 군가외에 다른 음악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옌안은 당시 중국공산당 혁명의 근거지로 수만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병영(兵營)이었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았다. 정율성은 그곳에서 팔로군 군인으로 소속돼 생활하면서 뜨거운 혁명의 열기를 음악의 선율로 담아낸 것이다. 정율성은 왜 군가를 작곡했는가? 당시 옌안(延安)에는 많은 와호장룡(臥虎藏龍)급의 음악가들이 몰려 들었다. 셴싱하이(诜星海), 리환즈(李煥之), 스러멍(時樂濛), 마커(馬可) 등 모두 뛰어난 창작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음악가들이었다. 그럼에도 25살이었던 정율성 음악가가 불후의 군가를 남긴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고 평가한다.
우선 정율성 음악가의 항일 정신을 꼽는다. 정율성 음악가는 일본 침략자들의 피압박자로서 강적과 맞서 싸우는 군대에 대해 존경심과 숭배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또 정율성 음악가는 당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중국인의 혁명성지인 옌안(延安)과 정의로운 역량에 대해 커다란 놀라움과 신선함을 갖고 있었고 강한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 실제 중국인들은 ‘중국인민해방군군가’속에는 수많은 다른 스타급 음악가들이 강렬한 창작충동을 느꼈지만 만들지 못해던 웅장함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중국인민해방군가 듣기→ http://blog.sina.com.cn/s/blog_6d4eafe80100mhln.html 정율성 음악가 자신 또한 “전심 전력을 다해 음악으로써 민족해방전쟁의 이 위대한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음악사에 큰 공백을 남기는 것”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옌안은 수만명이 모인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다. 또한 이곳에는 병력이 모이면 노래로 행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부르면 저곳에서 따라부르고 수만명이 합창을 하면 옌안 전체가 울려 퍼졌다. 당시 옌안은 서북의 작은 산성(山城)이었지만 노래소리로 가득찬 ‘음악의 도시’였으며 청춘의 활력이 넘쳤다. 또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연설과 청년들이 미래의 이상을 논하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정율성은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 이 속에서 정율성은 가슴속에 이전에 갖지못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연안송과 군가를 만들어 냈다. 실제 정율성 음악가는 연안에 있던 4년동안이 그의 일생을 통해 창작활동에서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약 50수를 썼으며 특히 옌안 도착직후 2년동안 ‘연안송’과 ‘팔로군행진곡’ ‘연수요’(延水謠) 등 대표작 3곡을 창작했다. 정율성은 이 3곡을 통해 송가, 진행곡과 민가 등 세분야에서 중국현대음악사상 개척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적인 서정성이 녹아 있는 노래 연수요(延水謠) 중국인들이 높게 평가하는 것은 정율성의 음악속에는 강한 서정성이 배어 있다는 것이다. ‘연수요’를 들어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깊은 한국적인 한이 느껴진다. 연수요 듣기→ http://blog.sina.com.cn/s/blog_6d4eafe80100nqzr.html 연수가 흐리고 연수가 맑아, 나의 님인 오빠는 출정하여 전사되러 가네. (아) 출정하면 항일군이 되어야지, 좋은 쇠가 아니면 못도 못박는다네. 곡괭이를 들면 밭일 하기 쉬워지고,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면서 이름을 떨치게 되네. ‘연수요’는 당시 옌안이 위치해 있던 산시(陝西) 북부지역 민가(民歌)의 가락을 취해서 정율성이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 새롭게 작곡해낸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연수요’는 ‘산베이 민가’(陝北民歌)와 닮은 듯하면서도 이국적인 색깔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1939년에 창작된 ‘연수요’는 ‘연안송’의 자매편으로 한편으로는 서양풍의 송가형식과 한편으로는 산베이(陝北) 민족의 농밀한 서정풍이 어린 곡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노래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는 전염성이 강하다고 말한다. 또 곡조가 매우 밝으면서 넓다. 또 가사중 “연수가 흐리고 연수가 맑아, 나의 님인 오빠는 출정하여 전사되러 가네 延水濁, 延水淸, 情郞哥哥去當兵”’ 이란 내용이 사람의 심금을 사로잡는 힘이 느껴질 정도로 서정풍이 강하다고 말한다. 이 노래는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모두 좋아한다. 이는 정율성 음악가가 민가(民歌)에서 영양을 흡수하는 재능이 탁월했음을 말해주며 일생동안 창작에 있어서 나타나는 방식이다. 실제 정율성 음악가는 1952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963년까지 쓰촨(四川), 헤이룽장(黑龍江), 저장(浙江), 후난(湖南),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푸젠(福建), 장시(江西)성 등지를 다니면서 민가(民歌)를 수집하고 인민의 정서를 반영한 창작활동을 했다. 이에따라 그의 창작의욕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았다. 이 당시의 노래들은 대부분 노동가곡, 아동가곡와 합창곡을 작곡하게 된다. 당시의 곡은 다음과 같다. ‘강위의 노래’(江上的歌聲), ‘평화의 비둘기’(和平鴿), ‘소흥안령송’(小興安嶺頌), ‘유송합창’(流送合唱),’흥안령위에 눈꽃 날리네’(興安嶺上雪花飄),’채벌가’(採伐歌),’행복한 농장’(幸福的農庄),’강대한 함대가 바다를 달리네’(强大的艦隊在海上進行),’바다 고기잡이 노래’(海上漁歌), ‘포정대대 출동가’(炮艇大隊出動了),’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我們多麽幸福),’우의와 평화 행진곡’(友誼和平進行曲),’소년운동원의 노래’(少年運動員之歌),’아름다운 칭다오’(美麗的靑島),’철도노동자의 노래’(鐵路工人歌),’즐거운 어린시절’(快樂的童年),’망부운’(望夫雲),’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용과 같네’(灣灣河水像條龍),’장강대교’(長江大橋),’아가씨는 누구 집으로 달려가나요’(姑嫏你跑向誰家),’바다의 초병’(海防哨兵),’비행원의 노래’(飛行員之歌) 독학으로 일군 대음악가의 쾌거…조선인 출신 이방인 청년으로서 불가사의한 일 정율성 음악가가 높이 평가되는 것은 맨손으로 넒은 대륙의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는데 있다. 그것도 조선인 출신의 이방인 청년으로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평가된다. 정율성은 당시 먹을 것과 잠 잘 데도 없고 학비도 없는 상황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거나 순전히 독학으로 중국인들이 마음을 뒤흔드는 위대한 음악을 일궈냈다. 정율성은 중국에 도착한 이듬해인 1934년 의열단(義烈團)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뒤 비밀공작대원으로 난징(南京)고루(鼓樓)전화국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했다. 당시 신분 은폐를 겸해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우고 매주 한차례 상하이(上海)에 성악을 배우러 갔을 뿐이다. 정율성은 1937년 10월 옌안에 와서 샨베이공쉐(陝北公學), 루신예술대(魯迅藝術大), 캉다(抗大: 중국인민 항일군사 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의 준말) 등 학교에서 학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대학들도 전문 음악학교가 아닌데다 갓 설립된 것이어서 명목상의 학교에 불과했다. 당시 옌안에는 피아노는 고사하고 오르간도 하나 없었다. 정율성은 음악에 관한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정율성의 음악적 재능은 당시의 중국 혁명군중과 항일 전쟁속에서 획득되고 양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율성의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음악은 ‘항일 혁명의 무기’ 정율성은 중국으로 온 목적이 항일투쟁이었지만 음악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목사인 외삼촌을 좋아해서 항상 그 집에가서 놀곤했다. 그 집에는 서양의 많은 명곡음반이 있었고 유성기(留聲機)도 있어서 날마다 가서 듣곤했다. 이것이 어릴 때 정율성의 음악적인 소양을 길러준 것으로 보인다. 또 둘째 형이 준 만다린은 이후 정율성이 음악을 작곡하는데 둘도 없는 친구가 되며 한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그는 1933년 5월 만다린과 세계명곡음반을 소중히 간직한 채 중국 땅을 밟는다. 의열단장 김원봉이 음악공부 자금 지원…크릴로바 교수가 인생 행로 바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율성의 음악 인생을 도운 이들이 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은 정율성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상하이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때 정율성은 러시아출신 여성 외국교수 크릴로바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우게 된다. 정율성이 스승에게서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율성이 유명한 작곡가가 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크릴로바 여교수이다. 크릴로바 교수는 정율성의 자질을 알아보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권하지만 정율성은 항일 운동을 위해 거부한다. 당시 매주 교수에게서 받는 한번의 수업료는 한달 생활비와 맞먹었다. 이 사실을 걱정하자 크릴로바 교수는 정율성에게 무료로 수업을 받는 대신 매번 수업때마다 생화를 사오도록 했다. 그래서 정율성은 매번 꽃을 사들고 성악수업을 들으러갔다. 정율성은 몇 개월동안 상하이를 오가면서 성악을 배웠고, 난징에서는 매일 새벽 어두울 때 계명사(鷄鳴寺)에 가서 적막한 하늘을 향해 성악연습을 했다. 몇 개월이 지나자 정율성은 자신만의 발성법을 터득하게 된다. 크릴로바 교수는 정율성에게 상하이에서 열리는 세계 명곡음악회에 남자 고음 가수로 출연할 것을 제의받고 참가해 관중들에게서 큰 갈채를 받는다. 이때 닦은 성악 실력은 정율성이 옌안에서 음악가로 인정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된다. ‘마음속 우상’ 셴싱하이(诜星海)와의 만남…음악활동에 커다란 자극제로 작용
정율성이 당시 유명한 작곡가로 활약한 셴싱하이(诜星海)를 만난 것도 음악 인생의 촉매제가 됐다. 1936년 가을 김원봉은 정율성이 중국 ‘좌익’ 진보단체와 접촉이 긴밀한 사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자금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율성은 더 이상 상하이로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율성은 다시 난징으로 돌아와서 중화먼 화루강(中華門 花露岗)의 사당안에서 혼자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다. 정율성은 당시 먹고 자는 일조차 쉽지 않았지만 음악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그의 이름을 정부은(鄭富恩)에서 정율성(鄭律成)으로 바꾼다. 정율성은 1936년 봄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서 정식으로 회원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친구의 소개로 이 단체에 가입해 음악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젊은층들이 많이 참가했던 이 단체의 활동에서 정율성은 노래로써 주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이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일으킨뒤 중국공산당이 전국을 향해 일본에 항전을 선포했을 때 정율성은 옛동지 뤄칭(羅靑)을 만나러 난징중양판뎬(南京中央飯店)에 갔을 때 루칭이 당시의 대음악가인 셴싱하이를 소개해 둘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행운을 얻게 된다. 당시 셴싱하이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당시의 대스타였다. 셴싱하이는 당시 ‘적을 만나면 뒤로 돌아간다’(到敵人後方去), ‘길은 우리가 연다’(路是我們開) 등 작곡한 노래가 전국에 퍼져있었고 음반판매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정율성은 셴싱하이와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면서 마음속의 우상으로 삼았다. 훤출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웃음을 머금은 셴싱하이를 보고 정율성은 바로 좋아하게 되었다. 정율성은 그 자리에서 셴싱하이가 작곡한 ‘구국군가’(救國軍歌)를 부르자 셴싱하이가 놀라며 정율성의 팔을 꼭 붙잡고 흥분해서 영화에 노래를 삽입하고 레코드 취입 등 음악으로 함께 항일운동을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1937년 9월 일본의 공격이 강화되고 셴싱하이와 연출팀들은 상하이를 떠나 장쑤(江蘇), 저장(浙江), 허난(河南) 등지로 항전선전활동에 나서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항일 혁명의 열정안고 옌안으로 발걸음…만다린, 바이올린과 세계명곡집과 동행
정율성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을 때 상하이부녀구제회 지도자이자 “좌련”(左聯)의 여성회원인 두군혜(杜君慧)가 옌안으로 갈 것을 제의한다. 정율성의 제부인 박건웅과 두군혜는 상의한 끝에 정율성을 옌안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두군혜의 소개로 정율성은 상하이에 있는 팔로군 사무실에 가서 소개장을 받아 옌안으로 가게 된다. 정율성은 옌안에 가면서 만다린, 바이올린을 등에 메고 한국에서 가져온 ‘세계명곡집’을 가지고 가게 된다. 이것은 정율성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지 않고 옌안으로 가면서 정율성의 음악인생은 새롭게 시작된다. 1937년 10월 정율성은 옌안에 도착해서 산베이공쉐(陝北公學)에 입학을 한다.졸업뒤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 들어가 음악과 항일운동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됐다. 음악 작가사 궁무(公木)와 모예와의 만남…조선인과 중국인의 완벽한 합작 예술품 정율성은 옌안에서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작곡을 하려면 작사자가 필요했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중요한 작사자 두명을 만나는데 ‘중국인민해방군군가’의 작사자인 궁무(公木)와 ‘연안송’의 작사자인 모예(莫耶) 등 2명이다.
정율성은 셴싱하이가 작곡한 <황하대합창>(黃河大合唱)에 자극을 받아 궁무와의 합작아래 ‘팔로군행진곡’(이후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창작하게 된다. 궁무의 본명은 장쑹루(張松如)로 정율성과는 친형제처럼 사이가 아주 좋았다. 궁무는 1910년 허베이 신지베이멍(河北辛集北孟)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나서 1938년 8월 항일전선에서 옌안으로 오게 되어 정율성과 만나게 된다. 옌안 시절 정율성은 캉다(抗大,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음악지도를 맡고 있었다. 당시 궁무와 바로 옆에 거주했으며 항상 방문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정율성은 우연히 궁무의 책상에서 시가 적힌 노트를 발견하고 곧바로 ‘자야강병송’(子夜岡兵頌:한밤중의 보초병)에 곡을 붙인 것을 계기로 궁무와 급속히 가까워진다. 정율성은 1939년 5월 궁무에게 “팔로군대합창” (八路軍大合唱)을 쓰자고 제안한 뒤 8월에 곡을 완성하게 된다. 옌안에는 피아노가 한대도 없었는데 당시 정율성은 손짓이나 세숫대야, 탁자, 돌맹이 심지어 허벅지를 두드리거나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곡을 만들었다. 정율성이 노래를 부르면 궁무가 들었는데 정율성이 9월에 루쉰예술음악과(魯迅藝術音樂科)로 옮겨가면서 10월에 완전히 곡을 마치게 된다.
‘팔로군대합창’의 모든 가곡은 소책자로 인쇄되어 옌안 전체와 전군, 전후방 할 것없이 배포돼 울려퍼졌다. 1940년 5월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이 <팔로군군정잡지>에 게재되는데 이는 중앙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정율성과 궁무의 공로를 인정한 것을 의미했다. 당시 먹을 것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총정선전부 부장(總政宣傳部部長)인 샤오샹룽(肖向榮)은 정율성과 궁무를 초청해 술과 함께 훙샤오러우(紅焼肉,돼지고기 찜)을 대접한 것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연안송’의 작사자는 당시 루쉰예술학원문학과의 모예(莫耶)로 옌안을 칭송한 한편의 시가 정율성이 작곡한 아름다운 선율로 옷을 입으면서 동시에 유명해졌다. 당시 모예는 연안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한 여성 시인이었다. 그녀는 ‘기념 12.8’을 썼으며 샹위(向隅)에 의해 곡이 붙여져 연안에서 반향이 좋았다. 1938년 봄에 옌안에 루쉰예술학원이 건립이 되었는데 정율성이 옮겨 오면서 서로 알게 됐다. 정율성은 오후 5시만되면 옌안에서 회의가 끝나고 수많은 대열들이 흩어지면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모예에게 가사를 써 달라고 여러 차례 졸랐다.
모예는 당시 무엇을 써야할 지 몰랐는데 정율성이 눈앞에 펼쳐지는 옌안의 웅장한 고성과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도록 하면서 시심(詩心)이 폭발했다고 말한다. 모예는 연필을 급하게 꺼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단숨에 써내려 갔는데 이것이 바로 ‘연안송’의 가사로 됐다. 정율성은 1938년 봄 옌안 대강당에서 저녁회의 첫 행사로 ‘가송연안’(歌頌延安, 뒤에 ‘연안송’으로 불림)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여자 고음(高音)가수인 탕룽메이(唐榮枚)와 같이 불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당시 마오쩌둥 주석이 자리에 있었는데 노래가 끝난뒤 크게 웃고 박수를 치면서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지도부에 뚜렷하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국경을 넘은 ‘사랑의 힘’…정치지도자 아닌 조선인 음악가와 사랑 정율성의 창작 활동은 부인이 된 딩쉐쑹(丁雪松,2011년 작고) 여사와의 ‘사랑의 힘’도 작용했다. 딩쉐쑹은 1918년 5월 27일 창장(長江)의 항구인 충칭 무둥전(重慶 木洞鎭) 에서 태어 났으며 어릴 때부터 산위에서 창장을 오가는 배를 바라보며 바깥 세계에 대한 꿈을 꾸게된다. 1938년 항일전쟁이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상우르바오>(商務日報)에 게재된 “하늘아래 흥망은, 백성들도 책임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라는 “옥이 되어 부서질 지 언정, 기와로 오래 살지 않는다”(寧爲玉碎, 勿爲瓦全)라는 제목의 글을 접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19살 때 충칭시 부녀구국회(重慶市婦女救國會)의 상임위원으로 있다가 대혁명시기 공산당원인 치루위(漆魯魚)의 영향을 받고 옌안으로 와서 혁명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20살에 캉다오대대여성대장(抗大五大隊女性隊長)이 되어 강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딩쉐쑹은 만물이 소생하던 1938년 봄 다른 여성동지들과 길을 걷고 있다가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정율성을 처음 만났다. 정율성은 당시 루쉰예술음악과에 다니고 있었다. 정율성은 1938년 봄 연안 강변에서 딩쉐쑹과 처음 단둘이 만났으며 그 무렵 ‘연안송’을 발표했다. 그리고 1939년 새해에 딩쉐쑹이 정율성에게 이름과 같은 ‘설송’(雪松)이 인쇄된 신년카드를 보내면서 둘 사이는 급속히 가까워졌는데 바로 1월 정율성은 ‘팔로군대합창’을 완성한 후 불후의 음악작품이 되었다. 이외에도 딩쉐쑹과 사랑을 나누는 기간동안에 정율성은 ‘시월혁명행진곡’ ‘항전돌격운동가’ ‘연수요’ ‘생산요’ ‘기어아랑’(寄語阿朗) ‘재삼림중’(在森林中)등 다수의 작품을 쏟아냈다. 딩쉐쑹은 나중에 정율성은 “잘 생겼고 작곡뿐 아니라 노래도 정말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옌안에서는 이름높은 정치 간부들이 많았지만 딩쉐쑹은 솔직하고 쾌활한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연인으로 택했다.
딩쉐쑹 역시 고향인 충칭의 교회에서 음악을 배웠을 정도로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 딩쉐쑹는 피리를 불고 오르간을 칠 줄 알았으며 같은 취미가 둘의 사랑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대약진때 반대발언으로 ‘우경’으로 몰려…문화대혁명으로 창작활동 못해 1957년에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운동때 정율성은 당과 첨예한 마찰을 빚게 된다. 부인 딩쉐쑹은 이때 외국의 네덜란드, 덴마크(아일랜드 겸임) 대사를 지내면서 외교적인 일로 매우 바빴다. 이때 그녀는 정직한 성격의 정율성이 혹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두려웠다. 그래서 딩쉐쑹은 정율성에게 “‘우경’(右傾)을 경계하라”고 했고 “절대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대해 정율성은 “나는 항상 나라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이라며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정율성은 대약진때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면서 결과적으로 “반우투쟁”중에 “우경”으로 몰려 비판의 중심대상이 되었다. 당조직은 그에 대해 ‘반당’(反黨)의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탈당을 요구했지만 완강하게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1959년 여러 차례 공격을 받은 정율성은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곤궁에 처했다. 그러나 1962년 당조직은 그에게 평범한 반대의견을 냈다는 결론을 내리고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기간을 거치면서 정율성에게 더욱 큰 시련이 다가왔다. 1966년 8월 홍위병들의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서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자료가 유실됐다. 그가 쓰고 싶었던 <정강산대합창>(井冈山大合唱)은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부인 딩쉐쑹에게 “어떻게 토지혁명때 지주계급에게 하던 태도를 혁명영도간부에게 할 수 있는가”라며 “이것이 무슨 문화대혁명이냐, 이것은 문화대학대”라고 탄식했다. 강가에 나가 고기잡는 취미는 그 때 생긴 것이다. 그는 주덕(朱德) 총사령관과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겠다고 여러 차례 의견을 표시했고 후야오방(胡耀邦)집에도 자주 가서 불평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마다 고기잡이로 위안을 삼았다. 정율성은 반당집단인 ‘4인방’을 위해서는 한곡도 쓰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렇지만 1970년 마오쩌둥의 시가 20수에 곡을 붙이는 것을 완성했는데 발표는 하지 못했다. 정율성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음악의 샘을 가지고 있었다. 생전 360곡을 창작했지만 문화대혁명 기간을 뺀 시간동안 이뤄진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이 없었다면 한민족의 정서가 담긴 더 많은 작품들을 중국땅에 남겼을 것이다. 그점에서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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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지는 은퇴시기..`50대후반 앞으로 10년 더 일한다` (0) | 2012.05.16 |
흔들리는 한국금융 대해부 (0) | 2012.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