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병원이 수익경쟁 시장터로… 저소득층 감당 못해”
ㆍ렐만 하버드의대 명예교수 인터뷰
“77년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 편집장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투자자들로 구성된 민간 기업이 비영리 공공 의료 기관을 대체하거나 공적 기관과의 경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건의료체계가 환자의 진료에 전념하는 전문적 서비스에서 수지 맞는 경쟁시장으로 변하고 있었던 거죠. 이로 인해 미국의 의료 보험료가 늘 것은 자명했고 의료 기관의 서비스 또한 줄어들 것이 분명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런 현상에 대해 공공연하게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라도 대중과 의료계에 이 사실을 주지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 의료 민영화의 폐해 중 가장 큰 문제로 꼽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장 논리에 따라 운영이 되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가 너무 비싸고 비효율적입니다. 돈이 없는 빈곤층에게는 불공정한 일이죠. 의료 민영화 체제에서는 의료진이 환자의 건강과 안정을 우선시한다기보다는 경제적인 이익을 우선합니다. 의료업 종사자들의 윤리적인 기준을 무너뜨린다는 점도 심각한 일입니다.”
- 미국의 의료보험 민영화에서 이익을 보는 쪽은 누구인가요.
“의료보험이 단순히 시장 소비재가 되면서 돈있는 사람들만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습니다. 대신 돈 없는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점점 더 많은 부분에서 민영화가 됐는데 그 사이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습니다. 비싼 돈을 내고 개인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조차 어려움을 겪었죠. 민간 보험회사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험 가입자들이 비싼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꼭 필요한 수술이나 약인데도 막았던 거죠. 수술 비용이 비싸면 그 수술을 못받도록 갖은 수를 썼어요. 당연히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병은 더 악화됐죠.”
- 왜 그런 문제 많은 의료 민영화를 하게 된 걸까요.
“투자자들은 미국 의료 민영화라는 대안이 나왔을 당시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민영화가 됐을 때 보험 업계에 엄청난 돈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좋은 기회로 봤던 거죠. 바로 이들이 의료 민영화를 주도했습니다. 정부의 수동적인 대응은 의료보험이 민간 산업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당시 민영화에 반대한 이들은 나를 포함해 소수였어요. 반면 자유 시장 논리에 따라 의료 서비스업계를 지지한 쪽은 정부를 포함해 기업, 경제 관계자 등으로 훨씬 많았습니다. 수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죠.”
- 민영화 이후의 미국 의료제도는 아파도 비싼 의료비 때문에 병원에 못가고, 의료비 때문에 파산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걸까요.
“현 미국 의료 민영화 시스템에서 국민들은 피해를 보고 있지만 보험회사와 제약회사들은 많은 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지속적으로 로비 등의 활동을 통해 미국 정부가 현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죠.”
- 그러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런 의료보험 체계를 개혁할 수 있을까요.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도 의료보험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할 재정을 마련하자고 의회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개혁 방향은 높은 의료비를 규제하고 의료보험 및 의료 서비스 전달 체계를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둘 것입니다. 하지만 의료 민영화로 이익을 얻는 집단이 가진 경제적인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개혁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나는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어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미 의회와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의 결단이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 미국 의료 서비스는 어떻게 바뀌는 게 좋은가요.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의료비를 지원하는 ‘통합된 국가적 보험 계획’입니다. 빈곤층에는 정부 보조금으로 의료비를 지원해야 해요. 의료진은 1차 진료 서비스 공급자 및 전문가와 함께 다양한 의료 분야 전문가로 이루어진 비영리 그룹으로 조직되어야 합니다. 임금도 이 그룹을 통해 지급받아야 해요. 병원 및 외래 환자용 시설은 의사 그룹에 할당된 기금으로 운영하고 서비스 비용은 정부가 맡도록 하는 겁니다. 요양 기관이나 만성 질병 또는 재활 병원과 같은 장기 서비스 제공 기관은 정부 예산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의료 시설은 비영리 기관이 되는 겁니다.”
- 한국은 최근 미국 모델을 따라 의료보험 민영화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여러 심층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민간 의료보험 및 의료 서비스는 공공 또는 비영리 민간 기관에 비해 비용이 더 비싸면서 서비스 질은 그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의료 서비스 질을 조사해본 결과 민간 영리 시설은 비영리 기관의 시설보다 우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낮은 경우도 있었어요. 의료 민영화가 더 큰 의료 혜택을 가져다 준다는 논리는 증명된 바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 의료보험 기업은 자신들의 이윤을 추구하는 데 골몰하고, 서비스에서 파생되는 더 비싼 행정 비용은 국민에게 떠넘겨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국민이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의료 보험 민영화 추진은 절대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특별 취재팀]
서의동 경제부 차장
조찬제 국제부 차장
김재중 문화부 기자
장관순·홍진수·송윤경 정치부 기자
이로사·유희진 사회부 기자
<유희진기자 worldhj@kyunghyang.com>
입력 : 2009-04-02 18:02:47ㅣ수정 : 2009-04-03 03:50:13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미국 대표기업’ 월마트 노동자들은 저소득층
ㆍ덜 받고, 쉽게 잘리는 ‘나쁜 일자리’ 악순환
월 600달러로 살아가는 올슨
“아버지는 미장이 기술을 가진 일용직 노동자였는데 제가 클수록 돈 문제가 심각해졌죠. 일감이 계속 떨어졌으니까요. 저희 집만 특별한 게 아니었어요. 저희 동네는 슬럼가가 아니었는데도 다들 점점 더 살기가 힘들어지더군요.”
올슨의 청년 시절인 1980년대 캘리포니아주 LA는 탈산업화의 극심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40~50년대 공장들이 속속 들어섰고 이때 흑인과 저소득층 노동자가 대거 모여들었다. 그러나 80년대 세계화의 바람이 몰아쳤고, 공장들은 인건비가 싼 제3세계로 옮겨가거나 아예 문을 닫았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기댈 곳 없이 시장에 내던져졌다.
올슨은 20대 중반에 잠시 항공운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에 다녔지만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동에 질려 그만뒀다. 그는 술과 마약에 더 빠져들었다. 약 20년간의 길고긴 노숙생활. 지금 노숙생활은 청산했지만 집이 없어 휘티어 노숙자를 거처로 삼고 있다.
“그래도 지난해에 이 보호소로 온 건 큰 행운이에요. 지금은 대기자 명단만 세 페이지라고 들었어요.”
그는 지난해 말부터 약 반 년 가까이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그러나 독립할 형편까지는 안된다.
“가장 허름한 아파트라 해도 한 달 임차료가 족히 800달러는 돼요. 560달러짜리도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부엌과 화장실을 같이 써야 하죠. 무척 더럽고요.” 그는 앞으로 3년은 보호소에 머물며 돈을 모을 생각이다. 가장 큰 걱정은 건강이다. 탈장과 간염을 방치한 지 오래됐다. 지금의 수입으로 의료보험은 그림의 떡이다.
“만약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저나 제 아버지처럼 저임금 노동자가 되지는 않았으면 해요. 그렇지만 미국에선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면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가난한 사람으로 크는 것 같습니다.”
미국 저임금 노동자 비율 세계 2위
국민 총소득 세계 1위 미국,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 미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통계는 스캇 올슨이 겪은 비극이 올슨의 문제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미 전체 노동자를 임금 순으로 한 줄로 세운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한가운데 있는 노동자의 임금을 중위임금이라고 부른다. 중위임금의 3분의 2 이하를 버는 노동자를 OECD는 저소득 노동자로 분류한다.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기에 적절하지 않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에는 이 같은 저임금 노동자가 네 명 중 한 명꼴(24.2%)이다. OECD 국가 중 두번째로 높은 비율이다. 1위는 한국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나쁜 일자리’가 많다는 뜻이다. 미 노동시장의 덕목으로 꼽히는 ‘낮은 실업률’은 이런 ‘나쁜 일자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는 “실업률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저임금이라도 벌지 않으면 안되는 계층이 많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미국이 본래 나쁜 일자리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73년으로 시계를 돌려, 다시 임금 순으로 노동자를 줄 세운다고 치자.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끝에서부터 10%는 2003년보다 매 시간 0.39달러를, 20%는 0.71달러를 더 받았다. 최하위 노동자들이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증가는 노동자 전반의 추락과 맞물려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말한다.
“(1950년 즈음의) 노사관계와 현재의 노사관계가 얼마나 다른지 알아보려면, 대표적인 두 기업을 비교하면 된다. 과거와 현재의 기업 말이다.”
크루그먼이 말하는 과거 대표기업은 GM, 현재의 대표기업은 월마트다. 50년 전엔 GM이, 지금은 월마트가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에 따르면 물가상승을 고려할 때, 월마트 노동자는 35년 전 GM 노동자가 받은 연봉의 절반도 안되는 돈을 받고 일한다. 즉, 40년쯤 전엔 ‘미 대표기업 노동자’는 곧 중산층이었지만, 지금의 ‘미 대표기업 노동자’는 저소득층인 것이다. 30~40년 사이, 미 노동시장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노조의 약화, 고도의 노동 유연화.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일시 해고에서 영구적 해고로
“미국 기업은 위기가 닥치면 바로 해고하지만 노동자들의 저항은 없습니다. 경제가 좋아지면 다시 써주겠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 노사관계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는데 이번 위기를 유연화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이 2월13일 ‘최고경영자 연찬회 특강’에서 한 말이다. 노동 유연성이 높은 미국에선 노동자가 해고돼도 곧 복직할 수 있으므로 유연화에 순순히 따르고 있으니 우리도 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불황일 때 노동자를 잘랐다가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부르는 ‘일시 해고’가 미국에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도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돌아올 거라는 기대로 짐을 쌌다. 그러나 이는 주로 80년대 전반의 일이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피터 카펠리 교수는 “80년대 후반~90년대부터는 (일시 해고가 아닌) 인원 감축(다운사이징), 비정규직 활용 등 기업의 경영전략으로 인한 실직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지적한다. ‘다시 고용하지 않는’ 해고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 같은 변화는 ‘노조 약화현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 법은 인종, 성, 노조가입 등을 이유로 한 차별적인 해고만 아니라면 해고가 자유롭다.
사실상 해고규제가 없는 선진국은 미국이 유일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노조와 기업 간 단체협약을 통해 해고남용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일시해고 관행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노동자들이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돌아올 권리’를 단체협약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노조세력이 약해지다 보니, 노동자들의 안전판은 사라졌고, 결국 기업의 해고 칼날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금융부문의 팽창도 인원감축을 유행으로 만들었다. 기업들은 투자자(주주)를 모으기 위해 단기수익을 올리는 데 몰두했다. 이때 주로 활용된 것이 바로 인원감축이었다. 이러한 ‘신경영기법’으로 이름을 날린 이가 바로 GE의 CEO 잭 웰치다. 만약 인원감축으로 회사를 떠난다 해도, 괜찮은 일자리를 다시 구할 수 있다면 큰 문제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자리 구하는 경우는 학력별로 큰 차이가 있었다.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99~2001년 미국 실직자 중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이들의 경우 70% 이상 재취업하는 반면, 고졸 미만은 재취업률이 50%에 불과했다. 재취업의 양극화 현상이다.
사실 인원감축의 유행이 불기 전에도, 노동자들 모두가 ‘일시 해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저학력 육체노동자들은 유연화의 바람을 가장 먼저 맞았다. 아시아 등으로부터 섬유·전자제품 수입이 늘자 미 기업들 상당수가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공장들을 제3세계로 옮긴 것이다. 이때 실직한 저학력 육체노동자들 상당수가 ‘괜찮은 일자리’를 다시 구하지 못했지만 정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노조 세력이 약한 서비스업종이었다.
월 900달러로 살아가는 살라자
멕시코에 살던 클레오틸데 살라자(29)는 2004년 8월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불법체류자였다. 미국에서 그가 처음 얻은 일자리는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뉴저지의 큰 슈퍼마켓. 그는 시간당 임금 4~5달러를 받고 매일 12시간씩 일했다. 식사시간은 단 15분. 그녀는 “고된 노동에 지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후 살라자는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책 제본공장에 들어가 2년간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 채 잘렸다. 지금은 파견업체에서 소개해준 의료장비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한 달 수입은 900달러. 일단 500달러는 집세와 관리비로 나간다. 그의 방 3개짜리 아파트에는 세 식구 9명이 살고 있다.
“한 달 식비는 200달러, 교통비는 160달러 정도 돼요. 7개월 된 딸아이가 있기 때문에, 옆방 시누이에게 아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한 달에 240달러씩 주고 있어요. 아무리 아껴도 이렇게 한 달에 1000달러는 써요.” 매달 적자였다. 그는 “아프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며 “죽어야 할 상황이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막스밀리아노도 멕시코에서 온 불법이민자다. 그는 파견업체를 통해 제조업체의 창고에서 일하다 팔이 부러지고 눈이 찢어졌다. 그때 사측은 응급차를 불러주지 않았다. ‘당신은 파견업체 소속이니 파견업체가 알아서 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파견업체는 ‘2시간30분 뒤에 일이 끝나니 그때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결국 2시간이 지나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병원비가 문제다. 제조업체와 파견업체 모두 자기가 부담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시급 7.44달러 받는 스미스
워싱턴주 마운트 버논에 사는 조시 스미스는 얼마 전까지 월마트에서 시간당 임금 7.44달러를 받고 일했다. 그는 정규직을 원했다. 그러나 그의 일자리는 1주일에 33시간씩만 일하는 파트타임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미네소타주 프리들리에 사는 다나 라자이는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그는 월마트 창고에서 5년간 고된 노동을 해왔다. 덕분에 다른 노동자들보다 좀더 많은 시급 11.29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형편으로는 월마트가 제공하는 의료보험의 보험료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월마트는 미취학 아동이 의무적으로 맞아야 하는 몇 가지 백신주사도 적용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의료보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미네소타주에서 제공하는 빈곤층 대상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는 월마트 일을 쉬는 주말에는 주유소에서 일을 한다. 월마트의 노동착취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이트 ‘정신차려 월마트’에 월마트 노동자들이 직접 올린 이야기다.
저임, 저숙련, 해고를 낳는 노동 유연화
유통업체, 청소·경비업 외주업체 등 서비스업종은 노조세력이 약하고 유연화는 강화되던 시기에 값싼 일자리를 양산했다. 그 때문에 유연성의 수준 역시 가장 높은 업종이라는 금메달을 땄다. ‘자르기 쉬운’ 파트타임 노동자, 파견 노동자 고용률은 최고 수준인 반면 임금과 복지혜택(임금 유연성)은 최저수준이다. 노동조합 설립이 가장 어려운 업종이기도 하다. 기업체 서비스 노동자의 상황은 지역 서비스 노동자(소매점, 식당, 병원 등)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 일종의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홍종학 경원대 경제학 교수는 “제조업 쇠퇴 이후 부상한 서비스업은 고소득 전문직의 서비스업과 저소득층들의 하위 서비스업으로 양극화됐다”며 “하위 서비스업 노동자들을 위한 제도적 보호망이 없어 이들 노동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노동 유연화는 제조업 노동자들의 상황도 악화시켰다. 미국의 생산직 노동자는 독일이나 일본보다 숙련도(기술수준)가 낮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카펠리 교수는 ‘단기적 고용관계’를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미국에 장기적 고용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그 노동자가 기업에 장기간 머물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면서 “그 때문에 기업이 노동자 훈련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장은 이런 저숙련 노동자의 가격을 높게 쳐줄 리 없다. 따라서 이들은 저임금 노동자가 되고, 이들의 저숙련 때문에 기업은 이들을 부담 없이 해고할 수 있게 되며, 그 자리는 다시 자르기 쉬운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로 채우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송윤경기자 kyung@kyunghyang.com·LA | 이찬행 통신원·뉴욕 | 진숙경 통신원>
입력 : 2009-04-09 17:55:41ㅣ수정 : 2009-04-09 17:55:43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 |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1만 3000명 해고 ‘항공관제사 사건’ 노조붕괴 신호탄
지난 30년간 미국 노동자의 삶을 악화시킨 가장 큰 요인으로 노동조합의 약화를 들 수 있다.
1950~60년대 미국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던 노동조합의 힘은 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다. 기점은 도널드 레이건 취임 첫해의 항공관제사 사건이었다.
80년대에 미 코넬대에서 노사관계를 전공한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 교수는 “이 사건 이후 기업들의 본격적인 노조 공격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 사건의 의미는 단지 ‘정부의 태도 변화’만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조합과 노동권을 존중하는 사회규범이 깨지기 시작했다.
여기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70년대부터 미국은 오일 쇼크와 물가상승, 생산성 하락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맞고 있었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는 국민정서가 비등하고 있었다. 약 10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전미 트럭노조 위원장 지미 호파의 부패 스캔들은 노조의 이미지를 ‘거대한 이해집단’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상태였다.
기업들의 노조 공격은 주로 노조 설립을 방해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부 기업은 북부 도시에 있던 공장을 정서상 노조 설립이 어려운 남부 교외로 옮겼다.
미국에서는 노조 설립을 위해서 전체 직원의 비밀투표가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측의 방해가 빈번했다. 때로는 ‘직원 절반이 찬성하면 이미 설립된 노조라도 해체시킬 수 있다’는 법을 이용해 이미 활동 중인 노조를 없애기도 했다.
문제는 ‘급한 불을 끈 후’에도 노조의 힘은 지속적으로 약화됐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제는 70년대 후반 잠깐의 위기를 넘긴 후 상승세를 이어왔지만 노조는 계속 약화돼 왔다. 미국 노동자의 임금 수준도 노조조직률과 같은 궤도를 그리며 추락했다. 폴 크루그먼은 “80년대 들어서면서 위기는 지나갔지만 경제적 이득을 모든 국민이 공유하는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조의 약화는 정부의 ‘노동자 보호 의지’ 약화로 이어졌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최저임금이다.
2000년 물가를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연방정부의 최저임금은 60년대 말에는 7달러까지 올랐다가 노조 세력이 크게 약화된 레이건 집권기에 4달러대로 떨어졌다. 이후 법 개정이 이뤄진 지난해까지 약 30년간 4~5달러 사이에 묶여있었다.
<송윤경기자>
입력 : 2009-04-09 18:07:35ㅣ수정 : 2009-04-09 18:07:35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일본에선 왜 노동 빈곤층이 늘었을까
보통 워킹푸어(working poor)란 일을 하는데도 생활이 불가능한 노동자를 뜻한다. 일단 연수입 200만엔 이하의 고용자를 기준으로 삼는데, 2006년에는 이런 사람들이 1000만명 이상이었다. 적은 소득인 채,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알 수 없는 처지인 파견노동자가 늘어난 까닭이다.
파견이란 것은 필요한 때, 필요한 업무의 노동자를 일시적, 임시적으로 고용하는 것이다. 이런 노동 방식은,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노동자에 한하는 예외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고용을 통해 생활이 이뤄질 수는 없다. 기한 규정이 없는 고용 쪽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간접고용인 까닭에 중간 공백이 생긴다. 즉 실제 노동자를 지휘하고 명령하는 사용자의 책임이 애매해진 것이다. 노동에서 안전·위생의 확보, 기술·기능의 전승 및 축적의 측면에서도 많은 문제를 낳는다. 일에 대한 의욕, 성과 측면에서도 마이너스이다. 실제로 일하고 있는 기업에 의한 직접고용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 전 일본에서는 취업알선업자나 중개꾼에 의한 ‘삥땅’(수입 가로채기)이 횡행했다. 인신매매와 같은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문제가 벌어지는 등 씁쓸한 경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직업안정법 제44조 등에 의해, 전후 일본에서는 노동자 파견이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본래 노동은 직접고용으로 기간의 규정이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파견노동은 잔존했고, 80년대 들어 확대 조짐을 보였다. 사용하기 쉬운 노동력을 요구하는 산업계의 요망, 법망을 씌워 규제하는 방법이 좋다는 의견 등도 있어, 1985년에 노동자파견법이 제정돼 일부 업무에 한해 파견이 인정됐다.
그 후 99년에는 반대로 일부 업무를 제외하고, 파견 금지가 해제된다. 이게 포지티브 리스트로부터 네거티브 리스트로의 역전인데, 파견노동 확대의 계기가 됐다. 2004년에는 이때 금지되던 제조업에 대한 파견까지 해금돼 한층 더 파견은 확대된다. 이에 따라 96년 72만명에 지나지 않던 파견노동자는 03년 3배 이상인 236만명이 됐다. 더욱이 07년에는 384만명이 되면서 04년과 비교할 때, 불과 3년 새 157만명이나 증가했다. 산업계의 요망이나 노동조합의 대응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 1995년 5월 당시 닛게이렌(日經聯·일본경영자단체연맹, 현 經團聯)은 ‘신시대의 일본식 경영’을 발표해 고용의 유연화를 강조했다. 노동조합의 최대 전국조직인 ‘렌고’도 같은 해 12월 ‘규제완화 추진에 관한 요청’을 내고 규제완화를 요구했다. 이런 ‘시대 분위기’도 있어서 99년의 파견법 개정에 즈음해서는, 일본공산당 이외의 모든 정당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파견노동의 재규제를 겨냥한 이번 파견법 개정에도 렌고는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렌고 회장 출신의 노조이자 민간 산별 단일조합 최대 세력을 가진 UI젠센동맹에, 파견 회사의 노동조합인 인재 서비스 제너럴 유니온(JSGU)이 가맹해 있기 때문이다. 기업별 조합과 그 연합체인 렌고의 약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정부가 최근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은, 일용 파견(날마다 또는 30일 이내의 기한을 정해 고용)의 원칙 금지가 포함돼있지만 등록형 파견은 그대로다. 사전 면접이나 고용신청 의무의 규제완화 등도 있다. ‘약’뿐 아니라 ‘독’도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독은 넣지 않고, 적어도 등록형 파견 원칙 금지, 마진율의 상한 규제, 제조업체 파견 금지 등의 약을 더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 치료에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증상을 악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임금인상 등 파견 노동자와 정규 노동자와의 균등 대우, 파견이 중지됐을 경우 다음 일자리 소개 의무 등도 필요하다. 여야 정당 간 협의에 의해, 노동자 보호 측면에서 좀더 실효성 높은 법개정을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워킹푸어 증가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가라시 진 | 호세이대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 교수>
입력 : 2009-04-12 17:25:52ㅣ수정 : 2009-04-12 17:25:52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90년대 말 규제완화가 비정규직 양산 주범”
“일본의 고용환경 악화는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근본 원인입니다.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 결과입니다.”
그는 “단기적 이익만을 최고선으로 추구하는 경영자들의 자세”를 지적하며 “정규사원 위주의 고용·노동정책은 변혁과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파견유니온은 일용 노동 금지, 파견사원의 권익 옹호 등을 내걸고 2005년 비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소규모 노조로, 현재 3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일본에서 비정규직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전후 일본에서는 노동자 파견, 중간 착취 등을 법률로 규정해 전면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고도성장기에 편승해 간접고용 알선 사업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죠. 세계적인 파견회사(고용알선업체)인 미국의 ‘맨파워’가 일본에 상륙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72~73년 ‘맨파워’를 모방한 파견업체들이 속속 생겨난 것이죠. 현재 일본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 5400만명의 3분의 1이니까 1800만명 정도입니다. 3월까지 10여만명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해고됐죠.”
-고용환경 악화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법적 규제 완화입니다. 90년대초 버블 붕괴 이후 실적이 악화된 기업들은 눈 앞의 이익, 주가 등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노동력은 싼 게 좋은 것이란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입니다. 95년 당시 닛게이렌(日經聯·일본경영자단체 연맹, 현 게이단렌·經團聯)은 신시대 일본의 경영이란 미명하에 언제든지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96년과 99년에 제조업 파견사원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는 등 규제완화가 이뤄지면서 사실상 비정규직 고용이 자유화됐죠.”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원인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쓰고 버리는 노동력이 가능토록 한 고용의 유연화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전망 자체가 불충분합니다. 노동자를 위한 여러 안전망을 갖췄다고 하지만 모두 정사원 중심의 제도입니다. 급속히 증가하는 비정규 노동자에 대해서는 기존 안전망으로 구제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제도의 변혁,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보험을 받기 힘들어요. 비정규직은 일자리를 잃으면 한 달간 고용보험 신청을 할 수 없게 돼 있는 반면 정규직은 실직 1주일 이내에 고용보험 신청을 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다른 일을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죠. 실직하고 1개월 간이 가장 어려운 시기인데도 비정규직은 고용보험을 신청할 수 없는 겁니다.”
-비정규직이 실직한 뒤에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실직 후에는 이른 시일 내에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도록 연결망을 강화해 줘야 합니다. 실업 대책 사업을 늘리라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환경, 복지 등 노동력이 부족한 부문이 많습니다. 이런 공공사업을 늘려 이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헬로 워크’(정부가 운영하는 무료직업안내소)는 효과가 없습니까.
“별 도움이 안됩니다. 예를 들면 비정규직 실직자들은 어느날 갑자기 해고되기 때문에 기숙사에서도 쫓겨나고 PC방을 전전하게 됩니다. 일부는 노숙자로 전락합니다. 이들은 거처도 없고 가진 돈도 적습니다. 최소한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보장되는 직장, 또 그날 그날 급료를 지급받을 수 있는 직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에 맞는 일이 헬로 워크에는 거의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노동자간 격차가 점차 확대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우선 노동자에 대해 ‘동일 노동, 동일 급여’와 같은 균등한 대우가 필요합니다. 기간을 정한 뒤 고용하는 ‘기간 고용’도 규제해야 합니다. 독일 등 유럽국가에서는 합리적인 이유없는 기간제 고용이 금지돼 있어요. 몇 달 일 시키고 해고하고, 또 다시 몇 달 계약하고 고용하는 게 사라져야 합니다. 하청이나 중간착취도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해요.”
<도쿄 | 조홍민특파원 dury129@kyunghyang.com>
입력 : 2009-04-12 17:29:55ㅣ수정 : 2009-04-12 23:11:13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카르도수 ‘노동법 개악’으로 국민이 정권교체
중남미 국가들은 1980년대 급증하는 외채와 만성적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타개책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 경제위기를 벗어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분노하는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1989년 2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봉기가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300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멕시코에서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는 1994년 1월 시작된 사파티스타 농민군의 무장투쟁이 국민적 지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중남미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10년은 시민들의 저항 앞에 무너지며 좌파정당 집권 붐을 가져왔다.
국영기업 사유화·사회부문 예산 축소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하여 가장 충실하게 집행된 것은 카르도수 시기(1995~2002) 브라질이었다. 카르도수는 재무장관 시절 10여년간 연 평균 100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을 제압함으로써 압도적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공약한 바대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거침없이 펼쳐나갔다.
사유화 대상을 제조업뿐만 아니라 광산업과 공익사업들로 확대하여 전화통신, 전력, 철도, 도로 부문 등의 거대 국유기업들을 사유화했다. 내수시장 부양과 산업 보호를 포기하며 비관세장벽을 철폐하고 관세를 대폭 인하하여 상품시장을 급격하게 개방하는 한편 자본시장 개방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교육, 보건, 위생, 사회보장, 빈곤퇴치, 주거, 도시개발 등 사회부문의 예산지출을 20% 이상 삭감하며 국기기능을 축소했다.
일시해고 허용등 노동법 개악
노동정책에도 큰 변화가 왔다. 카르도수 집권 첫 해 석유산업 공기업 페트로브라스 노동자들은 반년 전 전임 대통령의 개입으로 합의된 임금조정액에 대해 정부가 지급을 거부하자 파업투쟁에 돌입하였다. 파업이 한 달을 넘어설 무렵 정부는 노동법정으로 하여금 “불법 파업”을 선언케 하고 노조에 10만달러의 벌금형을 부과하도록 한 다음 경찰력을 투입하여 파업을 진압하고 노조지도자들을 포함하여 100여명을 해고하였다. 뒤이어 노동의 유연화를 위한 노동관련 법규 개정을 추진하여,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는 경우 2~5개월의 일시해고를 허용하며 임금은 물론 납세 의무도 면제하도록 하였고,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력을 보다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법규정을 개정하였다. 이러한 카르도수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추어 기업들도 자의적 해고, 노동법규 위반, 단체협약 무력화 및 노동조건 개악 등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를 전개했다.
실업자는 들끓고 노동자는 들볶이고
정부와 자본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들 삶의 조건은 크게 악화되었다. 사유화 전후 국유기업의 구조조정과 급격한 시장개방으로 제조업이 위축돼 실업률은 크게 상승했고, 남은 일자리들도 빠르게 비정규직으로 교체되어 갔다. 당시 상파울루 지역 금속산업 공장에서 실직한 노동자 마리아 주제는 “옛날이 좋았다… 일자리 찾으러 나가면 서너개씩 있었고, 가장 조건이 좋은 곳을 선택했다. 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다른 공장으로 옮기곤 했다…. (카르도수 시기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그래서 회사가 노동자들을 들들 볶아댈 수 있었다”며 분노했다. 노조 활동가들은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을 하청노동자로 계속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지적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카르도수 재임 8년 동안 연평균 1%씩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사회부문 예산 지출이 대폭 삭감된 것을 고려하면 삶의 조건 악화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중남미 전역 좌파정권 집권 붐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분노는 노동자들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1996년과 2001년에는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맞서 “전국적 투쟁의 날(dia nacional de luta)”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이 여타 사회운동 세력들 및 일반 시민들과 함께 전국적 수준의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카르도수는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3월 가족 농장이 무토지농업노동자운동 구성원들에 의해 무단침입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노동자들을 포함한 시민들의 분노는 결국 노동자당 룰라의 선택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2002년 말 브라질 룰라의 대선 승리에 이어 좌파집권은 우루과이, 볼리비아, 칠레,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신자유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조돈문 |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 : 2009-04-12 17:38:52ㅣ수정 : 2009-04-13 10:04:13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비정규직에 대한 일본의 두 시선
오후 6시를 갓 넘긴 시각, 이 한마디를 남기고 회사 문을 나서는 파견사원이 있다. 야근 및 회식 사절, 시급 3000엔 이하의 계약도 사절. 상사 눈치를 봐야 하는 다른 비정규직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공선 노동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하반신이 없다”고 느낄 만큼 오래도록 서서 일해야 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이들은 파업을 감행하지만, 일본제국의 해군에 의해 간단히 진압된다. “우리에겐 우리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낀 노동자들은 다시 저항하기로 마음먹는다.
자기 책임이다, 사회 책임이다
파견직의 삶을 주제로 한 TV드라마가 히트를 치고, ‘파견’이란 말은 나오지도 않지만 지금의 파견직 이야기나 다름없다며 80년 전의 소설에 열광한다. 비정규직이 넘쳐 나는 일본사회의 단면이다.
첫 번째는 2007년 방영된 TV드라마 <파견의 품격>이고, 두 번째는 지난해 55만부가 팔리면서 ‘게공선 현상’까지 불러온 소설 <게공선>의 일부 내용이다. 두 작품은 비정규직의 고달픈 현실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두 가지 마음’을 보여준다. < 위 # 1, # 2 참조 >
TV드라마 <파견의 품격>은 평균시청률 20.1%를 기록하는 등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인기 요인은 판타지와 사실성의 묘한 조합에 있었다.
정리해고를 당한 뒤 파견사원이 되어 10년 동안 열심히 일한 덕에 ‘슈퍼 파견’에 이른 주인공 하루코의 이야기는 판타지에 가깝다. 하지만 고용불안에 떨며 주인공을 부러워하는 ‘후배’의 이야기는 ‘리얼‘하다.
이 드라마는 ‘노력하면 하루코처럼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주입한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임을 암시한다. ‘노력만 한다면 곤궁한 처지를 극복할 수 있으며, 현재의 빈곤은 노력을 덜한 탓’이라는 자기책임론이 일본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게공선에는 자기 책임론이 없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사회를 보는 일본인의 다른 시선이 드러난다. ‘워킹푸어, 이거 혹시 게공선 이야기 아닌가요’. 도쿄의 한 서점 점원이 서가 한쪽에 꽂아둔 작은 광고팻말의 힘은 셌다. ‘현재의 워킹푸어 이야기와 닮았다’는 입소문을 타고 게공선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2차대전 무렵 쓰여진, 읽기 힘든 ‘프롤레타리아 문학’이었는데도 그랬다.
게공선 속 노동자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지만 저항할 생각을 쉽사리 못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그들을 게공선 속으로 자꾸 밀어 넣는다. 이를 두고 일본인들은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시에 저항할 힘조차 갖지 못한 현재의 워킹푸어’와 닮았다고 느낀 것이다.
소설에 담긴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대해 저항하자’는 메시지는 자기책임론·자기계발론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곧 열광으로 이어졌다. 일본인들은 게공선 독후감을 모은 책 <우리는 어떻게 게공선을 읽었나>까지 베스트 셀러로 만들었다. 저자 고바야시 다키지가 소속됐던 공산당의 청년층 가입자는 게공선 붐 이후 1만명이나 늘었다.
인식변화의 원동력은 비정규직 현실의 변화였다. 1999년 정규직에 버금갔던 비정규직의 업무 만족도가 10년 사이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후생노동성의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업무내용, 보람’ 등의 만족도가 1999년엔 50.1%였다가 2003년엔 49.1%로, 2006년엔 22.2%로 떨어졌다. 임금만족도는 1999년 정규직보다 약 10% 높았지만 2006년엔 정규직보다 낮았다.
<송윤경기자 kyung@kyunghyang.com>
입력 : 2009-04-12 17:40:56ㅣ수정 : 2009-04-13 09:58:00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실업자 양산과 격차 확대하는 ‘노동유연화’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제를 완화했고, 그 결과 2003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고용노동자의 30%를 넘어서게 됐다. 일본노동자총연합(렌고)의 추산에 따르면 전체 5000여만명의 고용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은 1700만~1800만에 이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은 격차확대와 함께 연봉 2000만엔 이하의 노동자인 이른바 '워킹 푸어(Working Poor)'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지난해 가을 이후 전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의 칼바람은 사회적 약자인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먼저 불어닥쳤다. 후생노동성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하켄기리(파견 해제)'로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 실직자 수가 15만780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는 머물고 있던 회사 기숙사에서 쫓겨나 네트카페(PC방)를 전전하거나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도 적지 않다.
지난 3일 일본 가나가와현 아쓰기(厚木) 역에서 만난 마쓰모토 신이치(41)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지난해 10월 마지막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뒤 4개월간 노숙자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는 그는 아직도 일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들고온 가방 속에는 지하철 역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취업정보지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40분간 버스를 타고 아쓰기 시내로 나왔지만 오늘도 허탕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즘엔 그나마 비를 피할 거처가 있어서 낫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약간의 돈도 받을 수 있구요."
잿빛 하늘에서 가끔씩 흩뿌리는 진눈깨비를 피해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덥수룩한 수염에 거뭇거뭇 때가 낀 회색 점퍼 차림이 못내 어색한지 처음엔 들어가기를 주저했지만 자리에 앉자 담담하게 그동안 생활을 털어놓았다.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트럭운전사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이시카와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에현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마쓰모토는 86년 학교를 졸업한 직후 어려운 집안형편 탓에 곧바로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직장을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먼저 운전면허를 땄다. 첫 직장은 운송회사. 10 트럭을 운전하며 화물을 일본 전역에 나르는 일이었다. 비록 비정규직이었지만 그 때만해도 사정이 괜찮았다. 손에 쥐는 돈도 꽤 짭짤했다. 열심히 뛰면 한 달에 25만엔 가량은 벌 수 있었다. 닛산자동차 요코하마 공장 등의 부품을 나르기도 하고 건설현장의 자재 운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 18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에 따른 피로와 지병 때문에 이 일도 오래하지 못했다. 직장을 옮겨 기계제작업체 보쉬의 사이타마 공장, 이스즈자동차 도치기 공장을 전전하면서 부품 가공일 등을 했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정착하진 못했다. 어느 공장도 그를 정사원으로 승격시켜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1년이 조금 지나면 나가달라는 통보만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군마현의 한 자동차 부품하청공장. 하지만 이곳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0월 또다시 그는 거리로 쫓겨났다.
"처음엔 막막하더라구요. 그나마 예전엔 해고통보를 받아도 이직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받아주질 않아요. 나이도 많은데다, 정식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죠. 어떤 곳에서는 생긴 게 마음에 안든다고 면접에서 퇴짜를 놓는 곳도 있었어요."
가지고 있던 돈마저 떨어진 그는 할 수 없이 도쿄 이케부쿠로의 공원 등을 전전하며 노숙자로 전락했다. 2~3일에 컵라면 1개로 끼니를 때우고, 상점에서 버린 빈 상자를 모아 잠자리를 만들었다.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구하려 무진 애를 썼지만 모두 허사였다. 경기 악화로 감원의 칼바람이 불어닥친 데다 연말인 탓에 사람을 쓰는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용직 자리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후생노동성이 마련한 일자리 알선창구(헬로 워크)에서는 주소가 없다는 이유로 상담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살다간 언제 죽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31일 마쓰모토는 일본 시민단체가 연합해 히비야공원에 마련한 '파견캠프'를 찾아가게 됐다. 같이 노숙생활을 하던 사람이 그런 행사가 있다고 귀띔하는 것을 듣고 단숨에 달려갔다. 그곳에서 맛본 흰 주먹밥과 따뜻한 국물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고 했다. 지요다구청과 초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모처럼 깊은 잠도 청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소득은 시민단체의 주선을 통해 생활보호대상자 신청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요다 구청에 신청해 8만엔의 거금을 손에 쥐고, 지난 1월 중순에는 가나가와현 아이카와마치에 있는 고용촉진주택에 들어갈 수도 있게 됐다. 말이 주택이지 3평짜리 방 하나에 간신히 몸을 추스릴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재기의 의욕을 다질 수 있어 무엇보다도 좋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달에 나오는 8만엔 가운데 집세 1만7000엔을 내고 남은 돈으로 살아야 하지만 그나마 노숙자 생활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마냥 있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7월초에는 이곳을 나가야 합니다. 그 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자리를 구해야하는 데 아직 막막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곳저곳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요즘 마쓰모토의 하루 일과 대부분을 차지한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취업정보지를 뒤져 전화로 상담한 뒤 운이 좋으면 면접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게 끝이다. 조금이라도 돈을 덜 쓰기 위해 요즘에는 하루 한 끼로 식사를 해결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밤 9시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팔다 남은 물건을 반액에 팝니다. 먹을만 합니다. 밥은 밤에 몰아서 한 번에 해결합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하다는 생각만 든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새로운 일에 도전할 의욕도 잃어간다는 게 그의 하소연이었다.
"도대체 정부는 무얼하는 지 모르겠어요. 일단 살아야하니까 뭔가는 해야하는 데…. 희망이 없습니다."
<아쓰기(일본 가나가와현)/조홍민특파원 dury129@kyunghyang.com>
입력 : 2009-04-13 10:13:41ㅣ수정 : 2009-04-13 10:13:41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획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수준높은 공교육’ 만이 희망이다 (0) | 2012.05.04 |
---|---|
4부 - 다른 사회를 상상한다 (1) 일의 즐거움, 노동의 존엄성,[기로에 선 신자유주의]한국 배관공 “자식교육·여가·노후준비 꿈도 못 꿉니다 (0) | 2012.05.04 |
2부 - 1 눈먼 시장주의[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3중 위기’로 달리는 한국… (0) | 2012.05.04 |
1부 - (1) 아이슬란드를 가다 (0) | 2012.05.04 |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뭐든 대출로 살수 있었다 이젠 평생 빚갚아야 할판 (0) | 2012.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