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2부 - 1 눈먼 시장주의[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3중 위기’로 달리는 한국…

ngo2002 2012. 5. 4. 13:59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3중 위기’로 달리는 한국…폭주기관차에서 내려라

ㆍ2부 - 1 눈먼 시장주의

신자유주의라는 종교에 빠진 한국

지난해 9월 발생한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 경제와 한국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금융에서 실물로 옮겨진 ‘경제위기’는 경제를 조정하는 정치의 자율성을 축소시키는 ‘정치위기’를 강화시키는 동시에 사회통합을 훼손하고 사회해체 경향마저 가시화하는 ‘사회위기’를 낳고 있다. 이른바 ‘3중 위기’의 시대로 우리 사회가 진입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 살리기’라는 열망을 배경으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가 전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 발전전략이 수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버전인 시장만능주의 경제 및 사회정책을 고집스레 고수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최근 우리 사회는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의 거리가 더욱더 멀어져가는 ‘두 국민(two nations) 사회’로 빠른 속도로 재편돼 가고 있다.

사슬 풀린 투기성 금융자본

이론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중시했다면,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개입에 맞서는 시장에서의 자유를 특권화한다. 시장에서의 자유가 경쟁 메커니즘에 의해 보장된다는 점에서 경쟁은 신자유주의의 기본 원리이자 자본주의 생산·재생산을 담당하는 조정 원리다. 신자유주의 아래서 경쟁은 지고지순의 미덕으로 간주되며, 무한경쟁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승인된다.

역사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의 ‘국가의 실패’를 대신해 등장한 발전전략이다. 사회민주주의와 대비해 신자유주의는 시장 기능의 강화와 국가 역할의 축소, 곧 정부의 각종 규제완화와 재정긴축, 그리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국내 시장의 완전개방 등을 강조한다. 국가의 과도한 개입이 낳은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정상화함으로써 생산과 분배의 효율성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논리의 핵심을 이룬다.

신자유주의를 적극 채택한 사례로는 흔히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꼽힌다. 특히 영국의 대처 정부는 규제완화, 세금감면, 사회보장기금 삭감 등의 정책을 통해 시장의 국가개입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추진한 바 있다. 이 전략은 70년대 중반 이후 진행돼 온 포스트 포디즘(post-Fordism)이라 불리는 유연화 전략과 결합해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키는 데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실패에 따른 ‘시장의 복권’을 부각시킨 신자유주의 전략은 9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한계에 직면했다. 사회보장의 축소는 소득분배를 악화시키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고용불안 및 실업을 증대시킴으로써 신자유주의 정부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결국 약화시켰다. 그 결과가 다름 아닌 미국의 클린턴 정부, 영국의 블레어 정부, 그리고 독일의 슈뢰더 정부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제3의 길’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제3의 길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명명했듯이 일종의 ‘신자유주의 좌파’였다. 적극적 복지와 사회투자를 앞에 내걸었지만, 세계화가 강제하는 무한경쟁 속에서 시장을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국가처럼 제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세계화의 새로운 첨병으로 금융자본은 컴퓨터 및 정보혁명에 힘입어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경제를 영국의 경제학자 수전 스트레인지가 일찍이 예견한 ‘카지노 자본주의’로 변화시켰다. 자본주의의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는 다름 아닌 투기성 금융자본이었다.

종막을 고하는 ‘고뇌의 30년’

80년대부터 거품으로 일궈져 온 거대한 바벨탑 신자유주의는 결국 지난해 가을 그 내부로부터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바로 그 출발점이었다. 금융위기는 이내 실물위기로 확산됐으며, 이는 ‘신자유주의 우파’든 ‘신자유주의 좌파’든 발전전략으로서의 신자유주의를 단숨에 시험대 위에 올라서게 했다.

신자유주의 이후 과연 어떤 패러다임이 지배적이 될 것인가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할 때 프랑스의 조절이론가 로베르 브와이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 역사를 ‘영광의 30년, 고뇌의 20’년이라고 이름 지은 바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견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10년의 수명을 연장한 그 ‘고뇌의 30년’이 이제 종막을 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지난 1년간의 교조적 추종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원은 대체로 김영삼 정부의 후반기로 소급된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 실시 등 집권 초반기 경제개혁의 의욕을 선보였지만, 이내 ‘국제화’ ‘세계화’ 담론을 수용하면서 규제완화, 민영화, 시장개방을 강화하는 신경제정책으로 선회했다. 군부권위주의 정부가 추진한 발전국가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이라는 이러한 정책기조가 가져온 결과가 97년 외환위기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전략은 이중적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일련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경제 영역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동시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 등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김영삼 정부보다는 상대적으로 사려 깊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김대중 정부를 경유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신자유주의는 더욱 공고화됐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기조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말한 바 있는 ‘좌파 신자유주의’였다.

집권 초반기 김대중 정부의 유산인 카드대란을 정리하고 장기주의적 관점에서 경제를 운용하고자 시도했지만, 결국 정책의 방점은 ‘좌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놓여졌다. ‘2만달러 시대’ 담론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강행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책 영역에서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꾸준히 강화해 나갔으며, 그것은 결국 사회 양극화의 심화로 귀결됐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발전전략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경고가 이뤄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를 이은 이명박 정부가 지난 1년간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버전인 시장만능주의를 완성하는 데 노력을 경주해 왔다는 점이다. 규제완화, 민영화, 시장개방, 정부 역할의 축소, 그리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에 이르는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를 이명박 정부는 교과서처럼 따르고, 이를 위해 모든 국가 역량을 집중시켜 왔다.

경제위기가 정치·사회 위기로 확산

더욱 문제가 심각한 것은 신자유주의에도 미국식, 유럽식 등의 여러 버전이 있는데 이명박 정부는 유독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선호하는 편향성을 보여 왔다는 점이다.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자영업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등의 사회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강화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엇보다 미국 내에서는 정작 기존 신자유주의 전략의 수정 및 변화가 모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식 모델을 일관되게 짝사랑해 온 상황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만능주의라는 기관차가 이미 고장났는데도 그것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석탄만을 더 들이붓는 형국이 현재 이명박 정부의 자화상이다. 경제위기를 조정해야 할 정부가 그릇된 방향으로 국가 운영을 조타(操舵)해 가니 ‘경제위기’는 ‘정치위기’로, 그리고 다시 ‘사회위기’로 전이되고 또 확산되고 있다. 위기 관리가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외려 정부가 그 위기를 만들고 심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라고 해서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의 경쟁은 개인의 선택 및 자유를 확대하고, 경쟁력 제고는 상품 및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그늘이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시장 경제를 지속 불가능하게 하고 사회 양극화를 강화시키며, 무엇보다 시민사회를 황폐화시키는 동시에 인간적인 기품을 훼손시킨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은 ‘사회 없는 시장’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 있는 시장’으로서의 대안적 발전모델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라는 폭주의 기관차에서 과감하게 뛰어내려야 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입력 : 2009-03-01 17:51:23수정 : 2009-03-01 22:52:54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임시직·빈부격차 당연시…시장만능의 포로, 한국인

ㆍ2부 - 1 눈먼 시장주의

돈이 돈 버는 세상,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인데,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돈 가진 자가 또 더 가지고 또 더 벌고 투자도 하고. 이 사회가 투자를 해야 돈을 버는 건데, 우리로서는 가진 게 없다보니까 몸으로 투자를 하고 몸으로 때워야 되는 거지요.”

소자본으로 근근이 봉제업체를 운영해오고 있는 강재섭씨가 말했다. 건설일용직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김수택씨도 우리 사회를 ‘돈이 돈 버는 세상’으로 규정한다. 아파트 경비원인 황종수씨와 용역업체 건물청소원인 이경숙씨 역시 ‘너도 나도 없이 살던 옛날’에 비해 ‘지금은 없는 사람이 자꾸 더 없이 빈곤에서 벗어나올 수 없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빈부격차는 있었지만, 지난 10여년 동안의 신자유주의시대를 거치면서, 정부 통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남편을 여의고 농사일을 하며 두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유경희씨는 TV에서 우리 사회의 부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접하면서 “쓰고 싶어도 못쓰고 시장만 가도 벌벌 떠는” 자신의 초라한 신세를 떠올리며 “진짜 기죽죠”라고 털어 놓는다. 강재섭씨는 “전쟁이 확 일어나서 네게 내 것이 되고 내게 네 것이 되는 세상”으로 뒤바뀌었으면 할 정도로 “없는 서민을 죽어라 짜내는” 우리 사회에 대해 선명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노숙자 된다는 압박감 속에 살아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은 비정규직의 양산과 고용불안 그리고 일터 동료관계의 상실 등을 초래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일부로서 가장 뚜렷하게 경험되고 있다. 자동차 제조업체의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고광택씨는 우리 사회에서 과도하게 남용되고 있는 비정규직의 현실을 빗대어 장차 그의 자녀들이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야, 정규직 없다. 너희 때는 (정규직 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하하 지금 사회가. 저는 그래요, 애들한테, 앞으로 가면 갈수록 대한민국에 정규직은 5% 안이다.”(고광택)

“언젠가는 노숙자 될지도 모른다. 정신 차려라, 그래요. 진짜 할부 한 몇 달 밀려봐요. 차 뺏겨버리고 어쩌다보면 노숙자 되는 거예요.”(이진우)

또한 그는 주변의 비정규직들이 월 120만원의 저임금에 허덕이느라 “월급 받아서 애 하나 못 키운다고 애를 못 놓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경숙씨와 홍순임씨는 “만날 뻑하면 자른다”는 위협 속에서 고용불안을 상시적으로 느끼면서 긴장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덤프트럭 지입차 주인 이진우씨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신규진입을 쉽게 허용하는 정부의 탈규제정책에 따라 업계가 포화상태에 놓여 치열한 일감 경쟁에 시달리면서 “언제 노숙자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오현우씨 역시 전문직이라 해도 비정규직 신분 때문에 늘 직장이동을 대비해야 한다. 이처럼 고용 불안과 치열한 경쟁이 지배하는 일터에서는 더 이상 예전 같은 정겨운 동료관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편한 경험들

고광택씨는 지난 1998년 구조조정을 경험한 이후, 현장 동료들 사이에 “뭐든지 있을 때 최대한 벌어놓고 보자”는 인식이 팽배해졌다고 한탄한다. 이런 인식은 살아남기 위해 점차 자신과 자기 가족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남이야 망하든 지랄하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 때문에 일터의 동료관계가 날로 각박해지는 현실을, 비정규직인 조중호·황종수씨 역시 안타까워했다.

공기업의 중간관리자로 일하는 김한성씨는 조직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말까지 ‘올인’하고 있는 자신의 고단한 직장생활을 토로한다. 재벌기업 정규직 사원인 최형철씨는 인사고과경쟁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행복하지 못한 직장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이민이라는 탈출구를 떠올린다. 그러나 언어 및 금전적 자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값비싼 도피처’인 이민은 최형철씨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서민들에게 손쉬운 대안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생산성-효율성이 지배하는 인식세계

“공산주의가 생산성이 완전 떨어지니까 몰락한 거 아니에요? 능력이 있어도 똑같이 받으니까. 이제 인간이다 보니까 능력 있는 사람들이 능력대로 대우를 못 받는 거.”(조중호)

“경제적인 시스템은 당연히 자본주의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경제 시스템에서의 효율성은 어쨌든 갖고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전체적인 파이를 키우려면 그런 시스템을 갖고 갈 수밖에 없는 거고.”(오현우)

자동차공장 사내하청으로 일하는 조중호씨와 금융기관 전문계약직으로 종사하고 있는 오현우씨 모두 효율성과 생산성 그리고 능력주의를 기준 삼아 몰락한 공산주의에 비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우위를 내면화하고 있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규범이 은근하게 우리 서민들의 사고방식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작금의 변화에 대해서조차 당연시하는 가치판단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면화된 무한 경쟁 논리

아파트 경비원인 황종수씨와 박영국씨는 최저임금제의 적용으로 인건비가 상승하게 되자, 아파트 단지에 전자경비시스템이 도입되어 상당수의 동료 경비원들이 “잘리게 되었는데도” 인건비 절감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지요”라고 손쉽게 감내하고 있다. 홍순임씨는 자신이 청소용역업체에 근무하며 박봉에 시달리면서 용역업체의 경쟁을 통해 인건비 절감이 이뤄지고, 용역업체가 없어지면 실업자가 많이 생기는 문제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청-용역업체들이 “앞으로 (경제) 발전이 되려면 그런 게 있기는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간제 교사인 최미경씨는 “엄청 경쟁”에 내몰리는 민간 회사들과 달리 “학교에는 경쟁이 없어 느슨하다”고 지적하면서, 경쟁 도입을 통해 “애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은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이 확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

강재섭씨는 “세상이 확 뒤집어졌으면 좋겠다”는 말 뒤에 허탈한 웃음을 남겼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이라고 판단을 하면서도, 큰 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 번듯한 직장을 구한다는 것 즉, 현재의 경쟁 속에서 밀려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설일용직인 이창석씨 역시 건설일용직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회 불평등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이를 달관하며 잊으려 하거나, 아예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기 최면을 건다. 일자리 찾기가 더욱 어려운 장애여성인 장현희씨는 4대 보험에도 들기 어려운 식당주방일을 하면서 현실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나머지 “나쁜 일자리”라 해도 큰 불만은 없다고 말한다.

심각한 청년실업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고지은씨는 점차 ‘일의 목적’을 찾기 어려운 대중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자아실현으로서의 일이라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 바로 그것이다. 고지은씨는 아르바이트로 편의점 두 곳에서 밤낮으로 일하기 때문에 몸은 고달프지만 “돈 벌면 좋잖아요”라고 말한다.

박봉에도 증권 투자하고 돈 잃고, 시장의 노예로

사회양극화가 심화될수록,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보상받는 것이 어려워진다. 고임금과 저임금이라는 일자리의 양극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융 중심의 축적체제로의 변환을 주요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개인들을 금융투자(주식, 증권 및 펀드)로 유인한다.

“증권, 그것도 거의 중독성이에요.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들어요.… 보통 때는 점심 먹고 증권회사 나가보고. 왜 나가냐 하면 뉴스도 접해보고 돌아가는 방향도 듣고…. 그래서 한 번씩 나가고. 증권회사 끝나면 거기 친구들하고 소주 한 잔하고.”(박영국)

오늘의 세계적 금융위기에서 드러나듯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는 많은 서민, 즉 개미투자자들로 하여금 금융투자로 큰 돈 벌기를 바라는 욕망의 굴레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있다. 박영국씨는 아파트 경비일로 받는 박봉의 상당수를 꼬박꼬박 증권투자에 갖다 바칠 만큼 중독되어 있다. 조중호씨와 김한성씨 그리고 최미경씨의 남편 역시 증권투자 중독의 유사 경험을 들려주고 있으며, 이경숙씨와 조중호씨는 소액이나마 펀드투자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모두가 주식장세에 휘둘려 결국 적잖은 손해를 보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본전 생각에 더욱 증권중독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한 경쟁의 피해자도 자녀를 경쟁에 단련시켜

각종 광고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펀드상품들은 일을 통해 제대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 된 듯하다. “노후자금이다 생각하고” 펀드를 계속 하고 있는 김한성씨는 그 좋은 예이다. 재산 불리기와 더불어 자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일 것이다. 이 때문에 빈부의 차를 막론하고 교육투자에 열중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보게 된다.

“너네(두 자녀)는 절대 이 길(농사)로 나서서는 안 된다고 못이 박히게 가르쳐요. 나중에 서울 가서 머리 굴리면서 펜 들고 일하든지 햇볕 뜨겁지 않게 햇빛 막아주는 데서 일하라고.”(유경희)

고단한 농촌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딸의 교육에 열 올리는 유경희씨나 “엄마, 아빠 꼴 나지 않도록” 자녀들의 공부를 다그치는 김수택씨, 그리고 날로 심각해지는 일자리경쟁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 자녀의 대학진학과 공무원시험 등을 일일이 챙기고 있는 조중호씨 모두가 자식들이 현재 자신들의 처지보다 발전되길 바라면서 악착같이 자녀교육에 열중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행복하게 살기? 악착같이 살아남기?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경쟁적 교육 시장에 맹렬히 뛰어드는 사람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이 일 해야 하는 사람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 노후 밑천 마련을 위해 금융재테크투자에 열 올리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적’이다.

살기 위해 무조건 경쟁에서 뒤처지지 말아야 하는 사회가 될 때,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것처럼 보이던 신자유주의는 어느새 우리의 삶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와 자연스러운 생활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는 수많은 서민들에게 고달픔과 불안 그리고 좌절감을 안겨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일상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금융위기를 맞아 많은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의 종말과 대안적 경제체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지만, 우리의 서민들은 학교와 일터에서 치열한 경쟁논리에 이미 길들여져 자신의 삶을 어느 누구에게 의존할 수 없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삶의 이치를 뼈저리게 체득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야기되는 양극화의 부조리와 사회공동체의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이 같은 현실에 가위 눌려 살아가는 우리 서민들이지만, 그들의 반응은 그저 순응하는 듯 덤덤하기만 하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정책의 이념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과 사회관계에 스며들어 그들의 생활양식이자 문화적 규범으로 강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기사는 17인의 일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담은 <양극화시대의 일하는 사람: 환경미화원에서 변리사까지>(2008, 창비)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다음은 구술자 명단.

황종수(남, 62세, 아파트경비원·용역)
이경숙(여, 43세, 건물청소원·용역)
박영국(남, 65세, 아파트경비원·용역)
조중호(남, 52세, 제조업·사내하청)
홍순임(여, 60세, 건물청소원·용역)
고광택(남, 45세, 제조업-대기업정규직)
최미경(여, 36세, 기간제교사)
김한성(남, 42세, 공기업·정규직)
오현우(남, 35세, 금융업·전문계약직)
이진우(남, 48세, 덤프트럭운전사)
고지은(여, 22세, 편의점·아르바이트)
최형철(남, 30세, 대기업정규직)
장현희(여, 47세, 식당노동자)
강재섭(남, 40세, 봉제업운영)
이창석(남, 51세, 건설일용직)
김수택(남, 50세, 건설일용직)
유경희(여, 42세, 농민)

<이병훈(중앙대 교수)·강은애(중앙대 박사과정)>

입력 : 2009-03-01 17:56:37수정 : 2009-03-02 09:28:40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현금 주고 ‘불안한 어음’ 받는 셈

ㆍ관세장벽 철폐뿐 아니라 법·제도까지 이식
ㆍ실패한 미국식 신자유주의 받아들이는 결과
ㆍ‘고용없는 성장’ 경제불안·양극화 심해질 것

현재 한국사회는 세계적 경제침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운데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양극화로 고통당하고 있다.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의 영향과 내수 부진으로 올해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할 전망이다. 극단적 사회양극화에 직면해 국민들은 자녀 일류 대학 보내기 열풍에 빠져들었고, 과중한 생명보험료를 내면서 질병과 노후 대비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전국을 휩쓴 개발 광풍과 펀드 열풍도 재테크로 생활 불안에 대처하려는 안간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7년에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의 요구로 약간 수정된 상태로 한·미 양국 의회에서 비준되어 시행에 들어간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정부 여당은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개방만이 살 길이라며 미국시장 선점을 통한 수출 증대와 경제성장률 제고를 장담한다. 또한 구조개혁 촉진과 기술혁신, 외국인투자 증대 등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 한다. 농업 등 손해를 보는 산업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지원하면서 합당한 보상책을 마련한다는 약속도 내놓는다. 그러나 한·미 FTA는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 불안과 침체, 양극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수출 증가 기대는 곤란

우선 한·미 FTA로 모든 미국산 농산물이 수입·개방되는 결과, 농업의 피폐가 가속화될 것이다. 그동안 수입·개방 확대로 식량자급도는 25%로까지 내려갔고,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 외국산 농산물을 먹어야 했다. 노령화와 외국인 여성과의 결혼 비율이 30%가 넘을 정도로 심해진 농업해체 위기는 한·미 FTA로 더욱 악화될 것이다. 농업지원대책으로 새롭게 발표한 20조원도 농가소득 보전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둘째, 관세철폐로 인한 자동차, 철강, 전자제품 등의 수출 효과는 기대 이하일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미국 현지 생산이 늘어나고 있고, 또 2.5%로 낮은 미국의 수입관세가 철폐되어도 수출은 별로 늘어나지 않는다. 섬유류도 까다로운 원산지 규정과 후발 개도국들의 저가 경쟁으로 수출 증대 효과를 별로 기대할 수 없다. 한 해에 15억달러의 수출손실을 입히는 악명높은 반덤핑관세제도는 미국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반면 미국산 자동차 수입은 상당한 수입관세율 하락과 자동차세 인하, 일본산 자동차의 우회수출 등으로 상당한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바마 정부는 자동차 수입의 미국 점유율 상승 약속을 받아내려 할 것이다. 일반 약 출하를 억제하는 특허 제약회사의 데이터 독점권 허용 등으로 미국산 약의 수입이 늘고 약값은 올라갈 것이다.

셋째,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서비스산업 개방으로 한국 서비스업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2006년 7월 스크린쿼터를 73일로 축소한 이후 이미 한국영화 점유율(서울 기준)은 2006년 60%에서 2008년 35%로 크게 감소했다. 지적재산권의 보장기간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해줌으로써 로열티 지급 부담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연구인력 대우 악화로 이공계 기피현상까지 생긴 정도이므로 한국은 특허권 강화의 혜택을 보기는 어렵다. 금융업 개방이 확대되면 그동안 축적된 막대한 금융자산 운용은 금융기법에 능한 미국 금융자본의 손에 맡겨지게 될 것이다.

법률, 회계·통신·방송 등에서 미국인의 투자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투자자-국가 제소권 허용은 공공정책을 사적 자본의 이윤추구 대상으로 삼아 공격하는 효과를 가진다. 부동산정책과 조세정책을 예외로 한다고 하지만 미국식 ‘간접 수용’ 개념을 도입했고, 비위반 제소(협정위반이 아니라도 기대이익 침해시 제소)까지 허용했다.

농업·상품·서비스·투자 분야의 영향을 종합해본다면 한·미 FTA는 우리의 시장을 현금처럼 확실하게 내주고, 미국시장 점유율 확대는 어음을 받는 것처럼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도 협상타결 후 9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미 FTA로 미국이 무역수지상으로 최대 40억달러의 이익을 본다고 했다.

확대될 경제 불안

한·미 FTA는 한국 현지 영업(상업적 주재)을 조건으로 신금융서비스를 허용했다. 물론 한국 금융당국의 인가권 조항이 있지만 이러한 규제는 2월부터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의 포괄주의로 인해 무의미해진다. 신금융서비스를 통한 파생상품시장 개방은 국내 금융기관과 시장을 큰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선진적 금융제도야말로 미국발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이 아닌가. 여기에 한국의 금융감독체제는 파생금융상품을 충분히 규제할 체제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금융산업 발전을 핑계로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금융정책기능과 금융활동을 규제하는 감독기능을 금융위원회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미 FTA에 외환 세이프가드 조항이 있지만 사실상 무력하다.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외 송금은 손댈 수 없고, 기타 투자 영역의 경우에도 미국의 상업적·경제적 이익에 손해가 나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있다.

이미 과도한 개방으로 우리 경제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취약하다. 수출입의존도는 2007년 현재 94.2%에 이른다. 자본시장의 개방도 최고수준이다. 한·미 FTA는 대외의존도를 더욱 심화시켜 경제위기, 식량위기, 에너지 위기 등 경제 불안을 부추길 것이다.

심화될 양극화

설혹 한·미 FTA로 다소간의 수출 증가와 플러스 경제성장의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재벌체제와 외국인투자 확대로 인해 소수 재벌과 외국 자본이 성과를 독식하는 ‘고용 없는 성장’ ‘고용 없는 수출’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동안 개방 확대에 따른 이익이 손해를 본 계층과 분야로 배분되는 구조가 확립되지 않은 탓에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선진국들은 통상절차법과 무역조정지원법 등으로 제도화해 놓았지만 한국은 정부 주도로 통상협상이 이루어진 탓에 대내협상이 실질적으로 없었다. 한·미 FTA도 마찬가지였으니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양극화를 완화해야 할 조세재정정책은 소득재분배 기능이 선진국에 비해 너무나 취약하다. 개발독재에서 복지국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신자유주의로 전환한 탓이다. 이마저도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감세법안 강행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런 여건 속에서 한·미 FTA를 시행하면 양극화를 심화시킬 건 너무나 뻔하다.

한·미 FTA 체결은 단순히 관세 장벽만 낮추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법과 제도를 이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럽식 복지사회보다는 자유경쟁을 중시하는 미국식 모델로 가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제위기로 미국식 모델의 약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농업과 서비스 분야의 개방을 제외하고 투자자 국가제소권을 비롯한 수많은 독소조항을 삭제하는 등 한·미 FTA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장상환 | 경상대 교수·경제학>


 

입력 : 2009-03-04 17:39:27수정 : 2009-03-04 22:57:45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수출 아니면 죽는다”…과장·왜곡된 정부논리

ㆍ2부- (2) 미국처럼 잘 살게된다 한·미FTA의 환상과 허구

시기별 등락은 있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찬성 여론은 일정수준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이는 한국인이 열등감 속에서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 개방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부도 한·미 FTA의 필요성을 홍보할 때 이런 한국인의 고정관념을 적극 활용해 미국, 개방은 선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대미인식, 개방 이데올로기 자극해 찬성론 유도

정부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 각종 수출품에 대한 관세장벽이 철폐되거나 낮아져 안정적인 수출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미국과의 무역과 투자 확대를 통해 국민소득이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무역에서 FTA와 같은 지역협정 체결국 간 교역비중이 50%가 넘고, 우리나라 자동차 수출의 26%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FTA가 체결되면 투자·금융·법률·지적재산권 등 각종 제도와 서비스정책이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에 올라설 것이라는 ‘제도 선진화론’도 거론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만큼이나 개방 이데올로기 선전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정부는 개방과 경쟁이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라는 점을 중점 부각시켰다. 역사적으로 개방을 거부해 성공한 나라가 없다, 정부는 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는 조선말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늦어지면서 민족 수난사가 이어졌던 역사를 동원해 ‘한·미 FTA=개방=발전’이라는 인식의 틀(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수출 길이 막히면 대책 없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2006.3.22 ‘특별기획-일류국가를 향하여’ 한·미 FTA 국정브리핑)

쇄국이냐, 개방이냐의 극단 논리

“구한말 우리는 도도한 세계의 조류에 애써 눈을 감고 쇄국이라는 순간적인 만족에 젖어 을사늑약이라는 치욕적인 변화를 강요당했다. 100여년 전 역사의 교훈을 잊고 또다시 변화를 강요당하겠는가 아니면 우리 손으로 우리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나가겠는가.”(2006.6.21 김현종 당시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파이낸셜뉴스 기고문)

정부는 또 한·미 FTA가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로 인정받는 것이라며, 대미종속적 성격을 은혜의 관점으로 접근했다. “미국과의 FTA가 체결되면 한·미관계는 외교, 군사, 경제 등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동맹관계로 발전되며, 동아시아에서의 지역경제, 전략적 구도에서 한국 비중이 그만큼 커질 것.”(2006.2 이태식 당시 주미대사, 매일경제 기고문) 이러한 논리는 한·미동맹을 중요시하는 계층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시작되자 정부·여당은 한·미 FTA의 조기 비준을 주장하기 위해 ‘경제위기 돌파론’을 내세웠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서비스시장 개방에 따른 경제 성장과 고용 증가, 비준의 불확실성 제거로 외국인투자가 늘고 우리 경제의 투명성이 높아져 실물경제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다.

정부는 지난해 말 일간신문과 무가지에 ‘향후 10년간 연평균 최대 32억달러의 외국인투자 추가유입-세계 일류로 가는 고속도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내용의 광고를 실었다.

과장과 왜곡 많아

이러한 정부의 논리는 한·미 FTA 찬성 여론을 이끌어내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지만, 과장과 왜곡의 경계를 오락가락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한·미 FTA를 개방이냐 폐쇄냐, 수출시장을 넓힐 것이냐 말 것이냐는 식의 흑백논리·이분법에 의존하고 있지만 준비된 개방이냐, 졸속 개방이냐, 불안한 수출 의존형을 지속할 것인가, 내수시장 확대 노력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다른 인식의 틀은 무시하고 있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지난해 11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미 FTA 협정 내용을 반대한다고 해서 개방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개방을 찬성한다고 해서 한·미 FTA 협정 내용을 전부 찬성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FTA가 가져올 파장에 대해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방 이데올로기는 무분별한 개방으로 외환위기가 초래되고, 미국 모델을 추종해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아이슬란드의 예를 간과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허위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미국에 수출하는 국내 제조물품의 경우 이미 상당 부분 낮은 관세를 적용받고 있어 한·미 FTA가 발효되더라도 미국 관세의 인하폭은 크지 않다. 추가적 수출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미 FTA 내용 중 우리 측에 가장 유리한 부분으로 꼽히는 자동차만 하더라도 당장 철폐될 미국 자동차 관세는 2.5%에 불과한 데다 미국 내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돼 수출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

미국식의 환상에 빠져 있는 한국인

또한 정부는 ‘미국식 제도 도입=선진화’라는 논리만 강조하고 있을 뿐 새로운 제도와 서비스가 몰고올 위험성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당장 한·미 FTA가 발효되면 현재 국내에서는 판매되지 않는 투기성이 강한 고위험 파생상품이 대거 들어올 수 있다. 국내 중소기업들이 대거 가입했던 통화옵션상품 키코(KIKO)가 가져온 피해를 목격한 상황에서 자본시장 개방에 대한 보완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한·미 FTA는 미국계 국제금융자본에 포위돼 있으며, 세계는 지금 한·미 FTA와는 매우 다른 국제금융 규제를 모색하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가 진정한 개방론자가 되려면 한 입으로 한·미 FTA 추진과 새로운 국제금융규제를 같이 말하는 위선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한·미 FTA 찬성론은 개방 이데올로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허위의식을 벗기고 나면 미국이 한국을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한국인이 드러날 것이다.

<이주영기자 young78@kyunghyang.com>


 

입력 : 2009-03-04 17:41:01수정 : 2009-03-04 17:41:02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쟁점 따라 찬성·반대 들쭉날쭉

ㆍ3년간 한·미 FTA여론 추이
ㆍ협상타결땐 “미국에 더 유리하지만 찬성”

한·미 FTA 협상 공식 선언 후 지난 3년여간 표출된 여론은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 민감한 쟁점이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되거나 지루한 밀고당기기 협상이 진행 중일 때에는 반대가 우세하거나 찬반이 팽팽했다. 그러나 협상 개시나 협상 타결 등 정부가 FTA 협상 속도를 한 단계씩 진전시키는 시점에서는 찬성이 우세하게 나타났다.

정부차원의 협상이 한·미 FTA를 기정사실화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분석이 있다.

2006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연설을 통해 갑작스레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한·미 FTA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했다. 그리고 2월3일 한·미 양국은 FTA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당시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미국과의 FTA 추진 방침에 불안감이 팽배한 데다 노 대통령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언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되면서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컸다.

하지만 한·미 FTA 1차 공식협상(2006년 6월5~9일)이 가까워지자 점차 반대 여론이 잦아들었다. 6월4일 KBS 문화연구팀 조사에서 찬성(39%)이 반대(22%)를 웃돌았다. 다만 찬반 의견을 정하지 못한 응답자가 36%에 달해, 아직은 협상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유동적인 여론이 많았다.

2차 협상(2006년 7월10~14일) 기간 실시된 SBS·리얼미터 조사(7월12일)에서는 찬성 30.4%, 반대 52.3%였다. MBC·코리아리서치 여론조사(7월6일)에서도 반대가 더 많았다. 이런 여론에는 2차 협상을 앞두고 방영된 MBC 의 영향이 컸다. 당시 은 캐나다와 멕시코가 직면한 빈부격차 심화 등의 문제가 미국과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때문이라는 내용을 방영했고 이는 논쟁을 촉발했다. 또 정부가 미국과 FTA를 맺기 위해 쇠고기, 스크린쿼터, 자동차, 의약품 등 4대 분야에서 모종의 양보를 했다는 이른바 ‘4대 선결과제’ 논란이 부상한 것도 이 즈음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7월11일)에서는 반대가 62.1%까지 치솟았다.

반대여론이 비등해지자 청와대는 한덕수 경제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FTA 체결지원위원회를 꾸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비판적 보도에도 적극 반박했다. 이후 3~5차 협상이 진행된 2006년 하반기까지 찬반 여론은 엎치락뒤치락했다. 8월14일 KBS·미디어리서치 조사에서는 찬성이 반대를 10%포인트가량 앞선 반면 10월26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에서는 반대가 더 높았다.

팽팽하던 여론은 2007년 4월2일 양국이 FTA 협상 타결을 선언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타결 직후(3일) 실시된 지상파 방송3사 조사결과 모두 찬성이 반대를 압도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4월27일)에 따르면 ‘양국간 무역확대로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므로 찬성한다’는 응답이 66.2%에 달했다. 타결 직후 여론조사 때보다 찬성여론이 최대 17%포인트 많아진 것이다. 큰 피해가 예상되는 농림어업 종사자에서도 찬성이 한 달 전 조사때보다 18%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당시 여론은 협상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미국이 협상이득을 더 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찬성이 우세했다. SBS 조사에서 협상 내용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다’고 답한 사람이 45.6%로 ‘만족스럽다’는 응답(35.5%)보다 많았다. 또 협상이 미국에 유리했다고 답한 사람은 53.9%에 달했고, 한국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4.2%에 불과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계층별로 각론에 대한 반대는 있어도 FTA에 원론적으로 동의하고 이미 타결된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국제질서에서 한·미 FTA가 우리보다는 미국에 유리할 가능성이 높지만, 협상 타결로 FTA가 기정사실화되었다고 인식하고, 현실을 감안할 때 FTA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란 인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007년 12월 대선을 거치면서 별다른 변화가 없던 여론은 2008년 봄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촛불 정국을 계기로 또 한 번 출렁거렸다.

CBS·리얼미터 조사(5월16일)에서 비준 반대가 55.4%였고, 가급적 빨리 비준해야 한다는 의견은 28.3%에 그쳤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와 관련, 졸속협상 내용이 드러나고 국민적 반발이 확산되면서 잠복해온 반대여론이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지만 촛불이 소진되면서 반대여론은 다시 잦아들었다. 8월28일 리얼미터 조사에서 비준 찬성(44.4%)이 비준 반대(37.7%)를 앞섰고, 문화일보·디오피니언(9월9일) 조사에선 찬성이 우세한 가운데 찬반 격차가 14.2%포인트로 더 벌어졌다.

<이주영기자>


 

입력 : 2009-03-04 17:45:22수정 : 2009-03-04 17:45:22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FTA, 독소조항 몰랐지만… 수출 늘 것 같아서… 찬성한다

ㆍ2부- (2) 미국처럼 잘 살게된다 한·미FTA의 환상과 허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국민의 절반 정도가 찬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외 개방에 대해선 80%가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으며, 한·미 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지적돼온 ‘투자자-국가소송제(ISD)’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응답은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경향신문이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지난달 13일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이다. 이 조사는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이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미 FTA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견이 54.9%로 ‘반대한다’(39.5%)보다 15%포인트 정도 높게 나타났다.

지난해 촛불정국 이후 회복된 찬성여론 우세 흐름이 별다른 변환점 없이 그대로 안착된 것으로 보인다. 한·미 FTA 체결 내용에 대해 ‘알고 있다’는 답변도 68.6%(매우 3.5%, 어느정도 65.0%)로 높았다. 내용을 ‘모른다’는 응답은 31.4%(별로 28.3%, 전혀 3.0%)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부 내용을 알고 있는지 묻는 질문에서는 모른다는 답변이 높았다. 한·미 FTA 체제하에서 미국 투자자들이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 등 국가의 공공정책을 제소할 수 있도록 한 ‘투자자-국가소송제’에 대해 ‘몰랐다’는 응답이 72.0%로 압도적이었다. 반면 ‘알고 있었다’는 답은 28.0%에 그쳤다. 또 특정 사안에 있어 한 번 완화된 규제는 다시 강화될 수 없게 한 역진방지 조항(래칫 조항)에 대해서도 몰랐다는 비율이 44.8%에 이르렀다. 이 조항은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지적되어 왔던 것들이다.

이같이 내용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찬성 여론이 높게 나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최태욱 교수는 “일반 국민들은 한·미 FTA가 각종 제도와 주권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자유무역을 위한 협정 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하지만 이번 조사 결과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는 것이지, 당장 한·미 FTA가 발효된다고 할 때 물어보면 또 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힌 수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찬성 여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봤다. “우리나라가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집단 무의식 속에 수출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됐다. 과거 우리 사회의 지배담론 중 하나인 반공주의의 경우 민주화를 거치면서 소수 이데올로기로 입지가 축소됐지만 나머지 하나인 수출지상주의는 한 번도 투쟁 대상이 된 적도, 집단지성에 의해 점검된 적도 없었다. 한·미 FTA에 대한 생각은 수출에 대한 그러한 인식을 물려받은 것이다.”

실제로 한·미 FTA 찬성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 ‘수출이 늘어나 경제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45.8%)를 가장 많이 꼽았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의 FTA는 수출시장을 넓혀 경제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고,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정부·여당과 보수언론의 주요 논리가 상당히 먹혀든 셈이다. ‘개방이라는 세계적 흐름상 불가피하므로’(41.1%), ‘선진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어서’(6.9%), ‘미국과의 관계가 더 좋아질 것 같아서’(5.8%)라는 의견이 뒤를 이었다.

반면 한·미 FTA에 반대하는 이유로는 ‘농업 등 취약산업이 더 힘들어지므로’(48.7%)가 높게 나왔다. 농림어업 종사자 중에선 이를 반대이유로 꼽은 비율이 72.9%나 됐다. 이어 ‘불평등하게 체결된 협정이므로’(30.7%), ‘경쟁강화에 따른 양극화 심화가 우려되므로’(12.7%), ‘금융시장이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으므로’(7.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한·미 FTA에 대한 찬성여론은 높지만 개방정책에 대해선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79.2%)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개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은 18.5%에 그쳤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윤희웅 팀장은 “개방은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우리가 주체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각 분야의 개방 폭과 시기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이해영 교수는 “한·미 FTA에 대한 이런 모순된 여론은 지난 몇년간 일관되게 나타나는 흐름”이라며 “이는 한·미 FTA에 대한 국민들 인식의 틀이 파편적이고 막연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FTA의 경우 이미 양국 정부가 최종 합의했고 국회 비준 절차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 들어온 외국 자본이 막대한 이익을 거둔 뒤 철수하는 일이 잇따르면서 외국 자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져있음을 보여준 것으로도 해석된다.

한·미 FTA에 대한 정보는 ‘신문·방송 등 언론’에서 얻는다는 응답이 74.5%로 가장 높았다. 언론 보도가 단순히 사실 전달에 그치지 않고 가치판단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급력이 큰 언론사의 성향 및 보도태도가 한·미 FTA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보를 얻은 구체적인 매체를 묻는 질문에 KBS(30.2%), MBC(18.7%), 조선일보(13.8%), 중앙일보(8.0%), YTN(6.1%) 순으로 답변이 많이 나왔는데, 이 중 한·미 FTA 지지 성향이 강한 KBS와 조선일보, 중앙일보 3사의 비중이 50%를 넘는다.

신문·방송 등을 제외하고는 ‘인터넷 게시물 및 토론글’(19.2%),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4.3%), ‘정부 광고 및 당국자의 설명’(1.5%)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는 응답은 남성, 30대 이하, 고학력층, 고소득층, 화이트칼라와 학생층에서 평균보다 높게 나왔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 등에 대한 정부의 홍보 내용에 대해선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52.8%(별로 45.7%, 전혀 7.2%)로 ‘신뢰한다’는 답(45.2%)보다 많았다. 40대 이하와 고소득층에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전체 평균을 웃돌았다.

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한·미 FTA에 대한 정보를 정부 홍보물에서 얻었다는 응답은 적고 홍보 내용에 대한 신뢰도도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미 FTA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정부 홍보논리가 보수언론을 매개체로 대중에 전달되는 만큼 실질적 영향력은 훨씬 큰 것으로 분석된다.

최태욱 교수는 “엄청난 홍보수단을 갖고 있는 정부는 다른 어느 기관보다 홍보력이 뛰어나다.

정부가 한·미 FTA의 긍정적 측면만 확대했고, 조·중·동이 이를 받아 지속적으로 홍보해줬다”며 “보수정부-보수언론-보수학자로 이어지는 오피니언 리더그룹 대부분이 찬성입장에 서면서 한·미 FTA의 부정적 측면이 상당히 가려졌다”고 지적했다.

<이주영기자 young78@kyunghyang.com>


 

입력 : 2009-03-04 17:49:32수정 : 2009-03-06 09:54:51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금융자유 향해 달린 10년

ㆍ민주화와 재벌, 부적절한 결합…‘시장자율 = 금융민주화’로 인식

한국의 금융자유화는 민주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민주화의 결과로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10년간 금융자유화를 앞당겨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미 카드대란, 주택담보·부동산 개발 대출(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 각종 대출 부실 등 금융 자유화와 그에 따른 금융의 실패를 충분히 반복해왔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를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금융을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를 폈다.

이 같은 이상한 한국식 금융자본주의는 민주화와 자본(재벌)의 부적절한 결합의 산물로 지적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관치, 비자금, 은행주의의 부정부패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가 크게 부상했기 때문이다.

즉 ‘시장의 자율성=금융 민주화’로 인식하면서 인위적인 힘이 시장에 작용해서는 안된다며 금융 자유화를 거세게 밀어붙인 것이다.

기획재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사실상 외환자유화를 단행해서 일일 거래규모를 10배 정도 키웠다”며 “파이를 키우면 한두 사람이 시장을 좌지우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는 ‘모피아(재정경제부)’와 뚜렷한 대립각을 세우며 각종 규제철폐를 통해 관치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했다. 그 결과 추진된 것이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이었고, 금융 중심지 선정작업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정부가 끌어들인 시장은 일반 경제주체가 아닌 재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은 대기업이었고, 시장이 열리자 이들이 관치의 자리를 꿰어차면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로 나서게 된 것이다.

엄길청 경기대 교수는 “관치의 힘을 대신할 건강한 금융세력을 시장이 키우지 못한 상황에서 급격히 그 힘을 시장에 넘겨둔 것이 실수”라며 “관치는 그나마 공익성이라도 있지만 무한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들을 끌어들이면서 부작용이 급격히 부각됐다”고 말했다.

재벌 득세는 민주화 정부의 ‘배신’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특히 대선 과정에서 재벌들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고, 그 결과 당선 이후에도 재벌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정권 탄생의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은 사실상 삼성경제연구소가 주도했으며, 그로 인해 정권 차원에서 재벌개혁 의지도 없었다고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말했다.

그는 “금융자유화는 금융경제민주화 과정에서의 단순 부작용이라고 보기에는 원인과 결과가 너무 뚜렷한 사안”이라며 “한마디로 대선때 자신을 도와준 재벌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면서 그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금융자유화를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정부의 개방은 외환위기의 영향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외환지원을 대가로 한국에 대해 금융개방을 강력히 요구했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정부는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급격히 빗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외국인들의 국내 투자 규제가 외환위기를 전후해 사실상 사라졌다”며 “한국경제가 주요 개도국 중에서 가장 쉽게 투자하고, 회수할 수 있게 되는 데 외환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박병률기자>


 

입력 : 2009-03-08 17:37:04수정 : 2009-03-08 17:37:04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정부 통제의 금융委가 감독 ‘좌지우지’

ㆍ2부 -(3)금융강국 바벨탑 쌓기 : 이것이 한국 금융감독 수준

시장은 규제를 싫어하고 금융 자유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시장주의에 기반한 금융 자유화는 감시와 감독을 피하는 다양한 논리와 명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규제 노력 없이는 금융 자유화의 위험을 피하기 쉽지 않다.

지난 1월14일 서울행정법원은 경제개혁연대가 금융감독원을 대상으로 제기한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소송에 대해 각하 판정을 내렸다. 경제개혁연대는 ‘론스타가 산업자본인지 여부를 판정한 문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행정법원은 금융당국이 이 문서를 보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없다며 소송을 각하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문서가 없다는 것은 금융감독원이 론스타에 대해 산업자본 여부 판정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대주주에 대한 적격성 심사는 매각 당시는 물론 그 이후 6개월마다 해야 한다. 외환은행이 매각된 게 2003년 9월이니 정부는 무려 5년간 단 한 차례도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하지 않았다는 셈이 된다.

이는 금융감독의 문제가 법제도의 차원이 아니라 정책적 판단과 실행의지의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외환은행을 팔아야 한다는 정책 때문에 정부가 법적용을 회피한 것”이라며 “금융감독기구가 정부기관으로 돼 있는 한 절대 공정한 금융감독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사후 감독’에 대한 믿음을 시장에 전달하려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으로 이원화된 현 금융감독 체제를 대수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지금처럼 관료 조직인 금융위가 정책과 감독을 좌지우지해서는 객관적인 감시체계가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는 “감시·감독체제를 강화하라는 말이 규제와 같은 법제도를 많이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라면서 “감시·감독이 객관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감독기구를 공적 민간기관으로 독립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카드대란 당시 금융감독원은 2002년에 문제점을 발견했지만 2003년이 돼서야 대책을 수립했다. ‘내수진작’을 앞세운 재정부와 규제개혁위원회에 막혔기 때문이다. 유종일 KDI 교수는 “감시·감독기구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구로 전락하게 되면 경제적 논리에 따라 시장을 감시·감독할 수 없게 된다”며 “감독 잣대가 오락가락하면 결국 시장의 신뢰를 잃고 실기를 하게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감사원은 2004년 카드사태에 대한 특감에서 금감위가 ‘감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해 감독 신뢰를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당시 금감위의 한 관계자는 “주택담보인정 비율(LTV·집을 담보로 대출할 때 주택 가치의 일부에 대해서만 대출해 주기 위해 정하는 비율)의 경우 정권에 따라 40~75%까지 왔다갔다 했다”며 “경제적 논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정책적 목표에 따라 기준이 엿가락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 당국을 정부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욕심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금감위가 관료조직으로 부활했고, 노무현 정부때는 금융청 신설이 추진됐다. 정부가 감시·감독기구의 독립을 주저하는 동안 2000년 이후 우리는 적어도 세 차례의 중대한 감독실패를 경험했다. 대표적인 것이 카드사태이고, 부동산 버블을 불러왔던 2005~2006년 부동산주택담보대출과 2007년의 부동산 개발자금(프로젝트 파이낸싱·PF)대출 역시 감독당국의 방조 속에 부실의 위험을 잔뜩 부풀린 경우였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주택담보대출이나 PF대출의 경우도 자금흐름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조기에 포착했다”며 “하지만 윗선(청와대)의 의중에 따라 아무리 보고해도 의미가 축소되거나 무시됐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에 법률안 제출권까지 준 이명박 정부의 금융감독체제는 지난 두 정부 때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융정책은 결국 규제완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규제완화는 곧 시장의 경제주체들에게 위험 부담을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고, 이는 위험 부담에 따르는 이윤 획득의 기회를 늘려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시장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반면 감시·감독은 이윤기회를 강제로 줄이는 데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유지하는 일이다 보니 아무리 잘하더라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작업이다. 이 때문에 한 기관에 두 역할을 동시에 주면 시장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규제완화로 자연스럽게 쏠린다는 말이다.

감시·감독기구의 성공적인 사례는 국내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은행이다. 인사권과 예산권이 독립된 한은은 비교적 독자적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성장을 위해 환율을 건드린 정부와 달리 시종일관 ‘돈의 흐름’이라는 기준에서 냉정한 통화정책을 운용한 한은에 대해 지난해 시장은 정부 금융조직 중 가장 높은 신뢰를 보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인사권과 예산권 정도만 독립시켜줘도 시장 감시기구는 얼마든지 제역할을 할 수 있다”며 “한은 체계에 대한 벤치마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병률기자 mypark@kyunghyang.com>


 

입력 : 2009-03-08 17:38:53수정 : 2009-03-08 17:38:54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카드업 비중 3%…규제 풀자 신용불량 400만명

ㆍ2부 -(3)금융강국 바벨탑 쌓기 : 고삐 풀린 금융의 위험성

이명박 정부에는 금융위험에 대한 교훈이 필요하지만, 그 교훈을 세계적 금융위기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이미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금융 자유화의 뼈아픈 경험을 수차례 겪었기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2003년 발생한 카드사태다. 카드대란으로까지 불렸던 이 위기는 자칫 한국 금융시스템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할 뻔했던 한국판 서브프라임사건이었다. 400만명의 신용불량자를 만들며 가계와 은행 부실을 불러왔던 카드사태는 무분별한 금융자유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사후감독을 철저히 하면 된다”며 “우리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단언한다. 미국이 막지 못한 금융 자본의 탐욕을 우리 정부가 막아낼 수 있을까.

시장은 스스로 탐욕을 제어할 수 있다?

아니다 정부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카드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구조조정과 기업퇴출로 급속히 위축된 내수를 회복시키고 탈세를 방지한다는 이유였다. 카드사에 대해 일반대출 업무가 허용됐다. 카드사용 외 부대업무는 60%를 넘지 못하도록 한 상한선은 폐지했다. 중국집에서 자장면 외 다른 음식을 몇% 이상 팔면 안된다고 규제하는 것과 같다는 해괴한 논리가 동원됐다.

이후 전쟁이라고 할 만큼 카드사간 과열 경쟁이 펼쳐졌다. 길거리 행인을 대상으로 카드 회원을 모집했다. 카드사들은 카드를 발급받으려는 고객의 신용을 묻지 않았다. 당연히 미성년자에게도 카드가 발급됐다.

1999년 5월 규제개혁위원회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월 70만원으로 정해져 있던 현금대출한도를 없앤 것이다.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규개위는 “신용카드 현금대출 한도는 카드사가 자율적으로 정할 사항”이라며 일축했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카드사가 어련히 알아서 현금대출을 축소하겠느냐는 의미였다. 또 대마불사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이어 카드사용액에 대해 연말 소득공제를 해주는 제도가 도입됐고, 이듬해에는 카드 영수증 복권제도 시행됐다.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시장 논리가 밀려오던 시기, 우리사회는 규제개혁을 절대선으로 받들었다. 규개위는 규제완화 실적을 인사고과에 반영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당시 규개위에 몇차례 참석했던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규개위에는 기업인들도 다수 있었다”며 “내용이 뭔지 몰라 제대로 토론도 안했고, 일단 통과부터 시키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시장은 스스로 조절한다?

아니다정부가 전방위적인 규제완화에 나서자 시장은 기다렸다는 듯 응답했다. 1999년 경제활동인구 1인당 1.8장에 불과하던 카드수는 2000년 2.6장, 2001년 3.7장으로 뛰더니 2002년에는 4.5장까지 늘어났다. 신용카드 전체발급수도 1999년 3899만장에서 2002년에는 1억481만장으로 1억장을 돌파했다. 시중에는 죽은 사람에게도 카드가 발급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카드는 요술방망이 같았다. 사고 싶은 건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신용카드 사용액이 급격히 늘어났다. 1999년 90조7000억원이었던 사용액은 2002년에는 622조9000억원으로 6배 늘었다. 카드를 이용한 현금서비스 비중은 더 빨리 늘어났다. 1999년 48조1000억원이던 현금대출액은 연간 100조원씩 늘어나더니 2002년 357조7000억원으로 늘어났다. 4년새 8배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다 카드로 돈을 빌린 것까지 합치면 2002년 카드현금 대출 전체 이용 규모는 무려 412조8000억원이나 됐다.

금융감독당국이 이런 버블을 모를 리 없었다. 신용카드사의 과당경쟁을 최초로 정부가 인식한 것은 2001년 2월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재정부는 내수진작이 더 필요했다.

금감위는 재정부에 “카드사 부대업무 비율을 50% 수준으로 다시 낮추고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재정부는 반대했다. 서민들이 사채시장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크고, 영업에 대한 직접 규제여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대신 재정부는 길거리 회원모집을 통한 무분별한 카드발급을 규제키로 하고, 금감위가 회원모집 방법을 제한할 수 있도록 여신전문금융법(여전법) 시행령을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규개위가 반대했다. “여전법에 근거가 없는데 금감원 규정에 제한 규정을 넣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규개위는 심지어 “길거리 회원모집을 금지하면 카드모집인의 실업문제 발생이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한국은행도 2000년 상반기에 현금대출 증가와 가계대출 급증현상을 포착했지만 정부 기조에 발맞춰 2001년 하반기까지 낙관적인 시각을 애써 유지했다.

그 사이 카드사들은 시장점유율 확보를 위해 무이자 할부와 같은 출혈 영업을 더욱 강화했다. 카드 빚을 갚지 못하는 국민들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카드관련 신용불량자(신불자)수는 1999년 59만명에서 2001년 100만명을 넘어섰다. 전체 신불자에서 차지하는 카드관련 신불자수는 1999년 29.5%에서 2001년에는 42.4%까지 늘어났다. 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알면서도 애써 눈을 감았다. 내수중심 경제는 2002년 상반기까지 계속된다.

사후 감독을 잘하면 된다?

아니다 2002년이 되자 신용카드문제는 사회문제로 커졌다. 신문지면에는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과 신용카드 관련 범죄 얘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플라스틱 버블’이라고 냉소했다.

불안감이 커졌지만 금감위원장은 “경기회복을 목표로 감독정책을 운용하겠다”고 요지부동이었다. 정부가 대책을 내놓은 것은 2002년 5월이었다. 당정협의에서 정부는 영업규제와 건전성 감독강화를 담은 ‘신용카드 종합대책추진’을 발표했다. 마침내 극단적인 내수진작책을 포기한 것이다.

미성년자에 대한 카드 발급시 반드시 부모 동의를 받도록 했고 현금대출 업무는 제한됐다. 길거리 회원모집은 금지됐다. 모두 1년전 시행했어야 할 것들이었다. 이듬해인 2003년에는 카드사의 연체채권비율이 일정규모를 넘으면 경영개선조치인 적기시정조치를 내리겠다며 카드사들에 대해 건전성 관리에 들어갈 것을 독려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1년’의 대가는 혹독했다. 가뜩이나 불안해 하던 시장이었는데 뒤늦은 규제조치가 들어가자 오히려 붕괴를 재촉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카드사들은 현금대출 비중을 낮추기 위해 회원신용 한도를 축소하고 대출금 회수에 나섰다. 이에 돌려막기로 연명하던 카드사용자들은 곧바로 신용불량자로 추락했다.

2003년 신용불량자는 240만명으로 1년전(149만명)보다 무려 100만명이 더 생겨났다. 신용불량자들이 돈을 갚지 못하니 카드사의 부실은 더 커졌다. 신용카드사가 빌려 주고 받지 못한 비율이 2001년 2.6%에서 2002년 6.6%, 2003년 14.1%로 급격히 늘어났고, 1개월 이상 연체 채권은 2001년 1조8999억원에서 2003년에는 7조7276억원으로 7배나 늘어났다. 카드사들은 연체채권 비율을 낮추기 위해 1~2개월도 안된 연체채권의 헐값 매각에 나섰지만 이는 카드사의 자산을 축소시켰다.

카드사의 당기순이익은 2001년 2조4870억원에서 2002년 2355억원으로 줄어든 후 정부 조치가 본격 시행된 2003년에는 10조4742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금융자본의 탐욕은 제어 가능하다?

아니다 카드사의 과당경쟁과 신용불량자 급등으로 인해 카드사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가 처음 포착된 것은 2002년 10월께다. 그러나 당시 카드사는 자산을 근거로 한 채권이 많았다. 만기연장과 신규발행 등 카드채 시장도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금감위는 안심하고 그 불안한 신호를 무시했다. 하지만 2003년 3월 북핵문제와 SK글로벌분식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국내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추락하면서 해외차입이 사실상 중단된 것이다. 가뜩이나 불안하던 카드채 시장은 마비상태에 다다른다. 정부는 당시 카드채 규모를 적게는 50조원, 많게는 90조원까지 추정했다.

정부는 부랴부랴 2003년 4월3일 긴급대책인 4·3대책을 내놓았다. 신용카드사 카드채의 만기를 연장하고 투신사가 환매를 요청할 것에 대비해 5조원의 환매자금을 조성한다는 골자였다. 정부의 긴급대책에 시장은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카드사 실적 악화가 공개되면서 11월 LG카드 부도위기설이 터졌다. 정부로서는 당시 시장 점유율 1위였던 LG카드가 무너지는 것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LG카드가 무너지면 투자신탁회사들이 카드채에 대해 일시적으로 환매에 나서게 되고, 그러면 채권시장이 급격히 혼란에 빠질 위험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불안은 주식시장으로 전이돼 주가가 급락하고 보험·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은 시차를 두고 연쇄부실로 빠져들 수 있었다. 특히 LG카드사 고객 중에는 복수로 카드를 발급받은 다중 채무자들이 많아 삼성카드 등 타 카드사도 동반 부실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정부가 나섰고, 이는 관치 시비를 불러왔다. 채권단과 LG그룹간의 대화는 겉돌았다. 진통 끝에 채권단의 추가출연 결정과 LG그룹의 LG카드 포기로 사태가 마무리된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카드대란은 국내 카드사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은행계 카드사 중 국민카드는 2003년 9월 모은행인 국민은행에 흡수합병됐고, 외환카드와 우리카드도 2004년 모은행에 합병됐다. LG카드는 산업은행 관리를 거쳐 2006년 신한금융지주에 매각되고, 삼성카드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도움으로 회생했다.

카드 시장은 규모가 작아 걱정없다?

아니다 카드대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외환카드를 인수한 외환은행이 덩달아 부실화된 것이다.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 없었던 정부는 외환은행 매각을 추진했다. 정부는 2003년 7월 미국계 펀드인 론스타펀드를 배타적 협상자로 선정하고 10월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최종 매각했다. 하지만 외환은행을 론스타로 넘기는 과정에서 외환은행 주식매각이 불법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검찰수사가 시작됐고, 이어 론스타에 대한 인수 적격성 문제까지 불거졌다. 특히 론스타가 2005년과 2007년 두차례에 걸쳐 국민은행과 HSBC 등에 막대한 차익을 남기며 매각하려 하자 이른바 ‘먹튀’ 논란이 불거지면서 외자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극에 달한다.

김대중 정부가 카드시장을 쉽게 생각했던 것은 은행중심으로 짜여진 국내 금융시장에서 카드 시장의 비중은 3%밖에 안된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 금융위기를 불러온 서브프라임모기지도 미국 금융시장의 2%에 불과했다. 3%가 전체 금융시장을 흔들 수 있으리라는 것은 몰랐다. 결국, 3%는 경제활동인구의 15%에 해당하는 400만명을 신용불량상태로 빠뜨리면서 한국경제의 내수를 붕괴시켰다.

이명박 정부는 금융의 위험 잘 알고 있다?

아니다 한국경제는 이미 금융자유화의 뜨거운 맛을 봤지만 감시·감독의 실패라고만 생각할 뿐 금융자유화 자체가 위험한다는 점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카드사태가 끝나자마자 그 무서움을 금방 잊어버린 채 자본시장통합법,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면서 금융자유화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다져 놓은 금융 자유화의 토대 위에서 금융자유화의 완성을 내걸며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부터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의 은행소유를 허용하는 금융자본-산업자본 분리(금산분리)완화, 금융공기업 민영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등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지난해 촛불 집회로 주춤했던 정부는 전대미문의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금융자유화를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우선 금산분리완화를 위한 은행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은행법 개정안은 은행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산업자본의 지분을 현행 4%에서 10%로 늘릴 수 있게 했다. 은행이 제조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도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이미 대기업들의 문어발 확장이 가능하도록 한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는 국회를 통과했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의 지분을 팔아 국내 대기업 혹은 해외자본에 넘기려는 작업도 일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또 파생상품과 사모펀드(PEF)에 대한 각종 견제장치를 풀어 고위험성 상품의 양산을 독려하고 있다. 금융위는 지난 1월22일 규제개혁보고회에서 130건의 각종 규제를 추가로 폐지하고 상반기중에 60%를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금융자유화 폭풍’은 금융규제 완화가 경제성장의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지만, 그 위험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연합 경제정책실장은 “어느 정부나 5년 단임제 하에서는 큰 성과를 내고 싶어하는데 그게 공통적으로 경제성장률”이라며 “이명박 정부가 세운 7% 성장을 위해서는 금융자유화를 더 급하게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후유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은행을 대기업에 주고, 투기자본이 마구 활보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은 결코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금융감시·감독 체계를 정비하지 않고 무리한 금융자유화를 추진하다보면 제2의 카드대란과 같은 금융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박병률기자 mypark@kyunghyang.com>


 

입력 : 2009-03-08 18:01:44수정 : 2009-03-08 18:01:45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2부 - 3 금융강국 바벨탑 쌓기

ㆍ펀드판매·운용 종사자들의 부끄러운 고백

금융인들의 고해성사 “거품인줄 알고도 팔았다”

투자자에 대한 금융회사의 보호의무를 강화한 자본시장법이 지난달 4일 시행되면서 금융회사들이 펀드 등 금융투자상품을 무분별하게 파는 행위가 다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거품의 생성과 붕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금융시장의 속성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규제로도 안심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 금융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그런 우려가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거품 만들기 경쟁에 열중하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깨달음은 거품이 터지면서 나오는 요란스러운 폭발음이 들려온 뒤였다.

철학도 원칙도 없었다 (자산운용사의 한 임원)

“부끄러울 정도로 펀드 운용이 미비했다. 사서는 안될 주를 샀고, 팔아서는 안될 주를 팔았다. 이렇게까지 떨어질 줄 몰랐는데 운용을 잘못했다. 시장에 분명히 거품이 많았다. 주가순자산배율(PBR·순자산에 비해 주식이 몇 배의 가치로 거래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이 8배로 뻥튀기 될 정도로 거품이 많았던 게 분명한데 고객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국이 끝없이 성장할 줄 알았다. 한창 중국 펀드 열풍이 불 때 고객들에게 가입 자제를 요청했어야 했고, 과열이라는 것을 알렸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들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거품은 언젠가는 빠진다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는데 과욕을 자제하기 힘들었다. 경기가 과열되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된다. 그렇게 낙관하다 보면 과도한 차입을 자제할 수 없게 된다.

고객들이 중국 쪽으로만 몰아서 무리하게 투자하려고 했는데 말리기가 힘든 측면도 있었다. 만약에 그게 크게 오르면 우리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몰빵투자(특정 상품에만 집중투자하기)를 권하기도 했고, 몰빵투자를 말리는 데 있어서 너무 미온적이었다. 그동안 이쪽 업계 종사자들이 너무 우왕좌왕했던 것 같다. 철학도 없었고, 원칙도 없었다.”

내 펀드도 절반 가까이 깨졌다 (2년차 은행직원)

“입사했을 때 이미 펀드 붐이 불고 있었다. 지점에서 펀드와 카드 판매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펀드에 가입하면 돈을 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팔기가 수월했다. 한 달에 7000만원 가까이 유치한 적도 있었다. 통장에 돈이 있는 고객들, 조금 친해진 고객들에게 펀드를 권유했다. 요즘은 다시 적금 쪽으로 유도하고 있는데, ‘아 정말 뭐가 잘못되고 있구나’를 느낀다.

펀드에 대해 개괄적이고 전체적인 정보는 알고 있다. 은행에 들어오면 펀드나 예금 적금, 보험 등에 대해 교육을 받고 시험도 본다. 또 펀드 설명회에 가면 증권사 직원들이 상품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렇지만 파생상품 관련 펀드는 어떤 구조이고 어떻게 투자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펀드 종류가 너무 많다 보니까 하나하나 알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손님들에게 가끔 펀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려고 하면 고객들이 ‘아가씨가 그냥 다 알아서 해줘’ 이러면서 그냥 사인만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야 펀드를 팔라고 하니까 팔았는데, 문제는 은행이 좋지 않은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를 안 그려봤다는 것이다. 막연히 주가지수가 계속 오르고 잘될 거라고 믿었다. 나도 모은 돈을 펀드에 다 넣었고 심지어 엄마한테 여윳돈을 보내달라고 해 그것도 넣었다. 나뿐 아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펀드에 돈이 물려 있다. 펀드가 이렇게 빠질 거라는 것을 은행원도 몰랐다.

요즘 펀드 수익률이 안 좋다 보니 은행에 다른 일을 보러 왔다가 하소연하는 아주머니들도 계시고, 작정하고 찾아와서 항의하는 분도 있다. ‘나는 돈 깨져서 이렇게 잠도 못자는데 너는 잘 사냐. 얼굴 좋은 것 보니까 잘 자나보다. 고객 돈 까먹고’ 이러면서 막말하는 분도 있다.

그럴 때마다 ‘저도 상황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제 펀드도 지금 절반 가까이 깨져 있어요. 아주머니만 힘든 게 아니라 다들 돈 잃고 있는 상황이에요. 전반적인 위기이고 곧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진정을 시키고 있다.”

진짜 폭탄 터진다 (증권사 과장)

“역외펀드가 말썽이 많다. 환율 변화가 많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조건이 달려 있다면 그에 따른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판매할 때 이런 것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펀드를 판매한 직원이든 은행원이든 자신들도 잘 모르고 했을 거다. 기계적으로 가입서류에 사인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이론적으로 취약한데 경기 예측은 무슨 수로 하겠는가. 사실 나도 선물환 부분은 잘 모른다. 다들 2007년 주가가 활짝 피었을 때 그게 상투인 줄 모르고 뛰어들었고, 뛰어들게 유도했다. 영업하는 사람들이 펀드 가입 실적을 많이 쌓아 몇% 수당 받아 챙기려고 덤벼든 부분은 분명 문제다. 다행히 내가 관리하는 고객 가운데는 딱히 큰 손실을 본 사람이 없는 편이다. 지난해 초 역외펀드는 다 정리했기 때문이다. 무슨 혜안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정리하고 털었다. 증권사 직원 입장에서 손님들이 빠져나가면 월급이 줄어드는 건 가장 작은 문제다. 고객들이 ‘컴플레인(불만)’을 제기하는 게 큰 문제다. 사고가 터지면 해당 직원은 그대로 고과에 반영된다. 사실 사고 낸 사람들은 이미 다 구조조정 됐다고 본다.

증권사 직원들은 자기 고객이 자신에게 컴플레인 했다 어쨌다 하는 얘기는 절대 서로 안한다. 굉장히 많겠지만 서로 오픈을 안하는 것이다. 자기 마누라한테도 숨기는 얘기다.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 문제다. 각 증권사가 엄청나게 팔아놓은 ELS·ELF·ELT 등 장외파생상품 만기가 몽땅 돌아온다.”

이미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자산운용사 임원)

“우리나라의 문제는 어떤 현상이 너무 급속히 열풍으로 번진다는 데 있다. 특정 증권사를 중심으로 펀드 열풍을 주도했고, 정부도 이런 현상을 조장하는 데 일조했다.

특히 해외펀드에 대한 비과세 조치는 엄청난 악수였다. 중국·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시장인데 거기에 돈들이 몰려갔다.

중국과 베트남은 지난 몇년 동안 5~10배 오른 시장인데 꼭대기에 들어가 물린 것이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펀드가 뭔지도 모르는 70~80대 할머니에게 이머징마켓 펀드를 파는 일도 발생했다.

금융권이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1~2년 전을 회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 많다. 이미 은행장 연봉이 20%씩 삭감되면서 페널티가 주어졌다. 임금동결과 구조조정이 예고되고 있다.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정부 감독당국, 거품에 부화뇌동한 투자자들도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경제지나 일간지 경제면 헤드라인을 검색해 봐라.

그간 한국 금융권은 미국을 벤치마킹해서 투자은행(IB)을 만들자는 기치를 들고 전진해 왔는데 다 허물어졌다. 일대 혼돈기를 겪고 있다. 가시거리가 제로인 상황이다.

금융권 몸집 부풀리기가 거품의 토양 (전직 투자전략가)

“금융기관들이 몸집 부풀리기 경쟁에 나서면서 이른바 ‘캠페인’이 관행이 됐다. 기간을 정해 특정 펀드를 집중적으로 판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실적이 인사고과나 연봉에 그대로 반영된다. 증권사 직원 정도면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고 있고 리스크를 관리할 능력도 있다. 그러나 이쪽 업계에서 먹고살려면 리스크를 알면서도 판매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증권사마다 리서치센터를 두고 각종 리포트를 낸다. 이게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에게 판단 자료가 되기도 하고 증권사 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참고자료로 삼는다. 증권사의 전반적인 전략이 몸집을 키우는 쪽에 맞춰져 있다 보니 아무래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술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어느 증권사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주가가 급변동하던 지난 9~10월에 나온 리포트들을 봐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은행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은행은 기본적인 교육은 시키겠지만 증권사에 비해 펀드나 파생상품 등에 대해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품을 팔라고 경쟁을 시킨다. 심하게 말하면 은행 직원은 상품을 팔아야 할 책임은 있지만 고객이 사인을 하는 순간 책임이나 의무에서 벗어난다. 불완전 판매가 발생하는 완벽한 구조가 조성된 것이다.”

<김재중·유희진기자>

입력 : 2009-03-08 18:04:56수정 : 2009-03-08 18:04:56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노동의 배제는 곧, ‘공동체 통합’을 저해한다

ㆍ2부 - (5) 노동 없는 사회 Ⅱ…왜 민주주의가 아닌가

민주화 20년의 비극, 노동 존엄성 훼손

경찰들이 서울 상암동 홈에버에서 해고에 맞서 농성하는 비정규직을 끌어내고 있다. 자본의 요구에 따라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것이 공권력의 임무가 되어 있는 나라에서 노동의 존엄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자유주의가 낳은 부정적 영향 가운데 하나는 일에 대한 헌신이 갖는 가치 내지는 노동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데 있다. 노동 유연성이라는 부드러운 말이 실제로 가져온 것은 비정규직 양산과 실업 증가였다. 그로 인한 고용 불안과 빈곤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노동비용의 축소를 가능하게 해주는 정상적 시장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렇듯 상당수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잉여 인간이 되면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대신에 ‘일하는 것이 특권이자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새로운 노동 윤리가 만들어졌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제 독트린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외적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태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간의 민주정부들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제어,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추진자로서 역할을 했다는 데 있다. 민주 정부의 이름으로 실천된 신자유주의, 이것이야말로 민주화 20년의 비극적 결산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민주주의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가? 민주주의 자체의 그 어떤 숭고한 뜻이나 이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그러한 접근이 위험할 때도 있는데, 이념이나 가치가 과도하게 강조되고 맹목의 신화가 되면 현실의 실제 문제를 못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창연합’이니 ‘반이명박연합’이니 하는 식으로 구호화된 ‘민주주의 수호론’이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한 채 많은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런 접근을 통해 과도하게 물신화되고 의인화된 민주주의가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직면해 있는 삶의 구체적 현실을 생기 없는 모조품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평생 민주정치를 연구했던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가 옹호될 수 있는 이유를 어떤 이념성이 아니라, “사회 하층의 요구와 경험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일을 다른 어떤 통치체제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데”서 찾았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문구, 즉 “민주주의는 보통의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평범한 사람들을 모아 비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고 말했고, 일의 가치 혹은 노동의 존엄성을 희생해서 경제성장을 추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노조가 강할수록 불평등 작고 빈곤율 낮아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될 때,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정치체제가 될 수 있을까?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계층 간 평등의 정도가 큰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강력한 설명의 하나는 기업운영-노사관계-정당체제-정책결정 과정에서 노동의 시민권이 얼마나 폭넓게 보장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노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여러 학자들이 강조하듯, 노동자들의 이익과 열정을 대변하는 노조와 정당의 힘이 강한 나라일수록 계층 간 불평등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다. 투표율은 어떨까? 노동의 정치적 대표성이 클수록 높다. 범죄율도 낮고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보호의 수준도 높다.

시장경쟁에 내몰리는 정도도 낮고 규제 없는 금융개방에 대한 방호벽은 높으며 그 결과 경제체제도 안정적이다. 하지만 노사 분규가 증가하고 급진적 노동운동이 출현할 가능성은 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볼 수 있듯, 노동의 권리가 폭넓게 인정될수록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산업평화가 유지된다.

미국의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립셋은 노동의 참여가 확대될수록 노동운동의 탈급진화 경향이 커지는 것을 하나의 법칙적 사회현상으로 정의한 바 있다. 요컨대 노동의 시민권에 폭넓은 기초를 둘 때에만 민주주의는 인간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계층간 불평등 원리에 기초

잘 알다시피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생산체제 위에 서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역사상 그 어떤 생산체제보다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계층 간 불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자 인간 사회의 공동체적 통합을 위협하는 부정적 효과를 동반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상적인 정치를 구상하고 조화로운 이성적 공동체를 꿈꾼다 하더라도, 현실의 불평등한 계층 질서와 갈등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빼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허구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으로, 그 수에 있어서나 조직적 잠재력에 있어서 그에 견줄 만한 세력은 없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 노동을 축소해야 할 생산 비용으로 간주하고 참여로부터 배제하려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노동을 배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온전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빨갱이나 좌경으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억압의 논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논리는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면서 못 사는 사람을 멀리하는 심리를 만들어내며, 이런 환경에서는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윤리적인 토양이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위해 노동자 대변 정치세력 필요

가끔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를 따져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경제적 분배효과가 계층별로 달라질 때, 민주주의는 안정된다.

그 경우 어느 사회집단이든 정치참여의 욕구가 자신들의 필요로부터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개인과 민주주의 사이의 결합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노동 정당이 없는 미국조차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와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계층별 소득분배는 뚜렷하게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에 인용해 잘 알려진 프린스턴 대학 래리 바텔스 교수의 책 <불평등한 민주주의>에 따르면 1947년에서 2005년 사이 미국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소득 증가율은 공화당 집권기에 비해 민주당 집권기에 6배나 더 높았음을 볼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아직까지 이런 함수관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기대했던 김대중, 노무현정부 하에서 비정규직은 최대로 늘었고 소득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사회 하층의 빈곤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관계를 구축하고 여러 개혁조치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중요하다.

노동 없는 정치는 절망을 낳을 뿐

지난 총선에서 투표를 거부한 54%의 유권자들, 그리고 전체 노동자의 54%에 해당하는 850만 비정규직의 눈으로 볼 때, 정치를 누가 하든 자신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참여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주범은 다른 것이 아닌, 노동 배제적이고 하층 배제적인 사회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노동 없는 정치가 가난한 보통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 있다 할 것이다.

<박상훈|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입력 : 2009-03-17 17:41:00수정 : 2009-03-18 09:48:57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경제’가 우선…빈곤층 540만명, 혜택 153만명뿐

ㆍ2부 - (6) 벼랑 끝에 몰린 복지

지난 12일 경기 과천시 정부종합청사 앞. 전국 지역아동센터협의회 회원 50여명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정부의 추경예산 편성을 앞두고 지역아동센터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센터 운영의 정상화를 위해 추경에 351억원을 추가로 배정해달라”고 호소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서 가난으로 숨진 사람들을 위한 추모집회를 열고 있는 민주노총과 전국빈민연합 회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역아동센터란 방과 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빈곤·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보육기관이다. 경제 형편이 어려워 부모가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가정이나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겐 끼니도 해결하고 공부도 하는 곳이다. 공공 보육체계가 부실한 한국에서 절실한 곳이다.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전국에 2810개의 아동센터가 운영 중이다. 이용하는 아이들은 8만2440명에 달한다. 이 숫자가 많아 보인다면, 빈곤층 아이로 추정되는 숫자가 120만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두는 게 좋다.

올해 지역아동센터에 배당된 예산은 338억원. 외형적으로는 지난해 대비 132억원이 늘었다. 그러나 아동센터 대다수는 적자의 늪에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보다 지원받아야 하는 센터의 수가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206억원의 예산이 2088개소에 배분됐지만 올해는 338억원의 예산이 2788개소에 배분된다. 각 지역아동센터가 받는 올해 월 지원금은 230만원. 지난해보다 10만원 오른 것에 불과하다. 복지부가 2006년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아동센터 1곳(29명 기준)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월 600만원이 필요하다.

센터마다 29~49명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사회복지사, 시설장 등 3~4명이 근무하는 여건을 감안하면 월 230만원은 그야말고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이렇다보니 아동센터 운영자의 상당수가 십시일반으로 사재를 털어 운영비를 쓰거나 카드빚을 내가며 센터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 역시 월 70만~80만원의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있다.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이광진 간사는 “경제난으로 센터를 찾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며 “예산이 더 지원되지 않으면 올해 안에 센터의 절반가량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원 대상 빈민 늘어? 오히려 줄었다

사회공공연구소 제갈현숙 박사는 이명박 정부의 감세 등으로 인해 복지지출비용 증가분이 이전 노무현 정부에 비해 연평균 1%가량씩 감소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 경우 향후 5년간 복지지출분은 매년 1조원 이상, 총 5조원 이상 줄게 된다. 감세의 여파는 공공부조의 가장 큰 틀인 기초생활보장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느냐에 있다.

올해 정부가 책정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수는 158만6000명이다. 지난해 153만명에 비하면 5만6000명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해 본래 책정했던 수급자는 159만6000명이었다. 증가처럼 보이는 것은 당초 수급 대상에서 6만여명을 줄인 데 따른 착시현상이다. 수급자를 줄인 것은 수급 대상 빈곤층이 없어서가 아니다. 수급자를 찾아내지 못했거나 수급자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복지부의 한 공무원은 “수급자 발굴은 주로 지자체 공무원이나 사회복지사들이 하지만 책정 기준만큼 발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올해 수급자 158만6000명은 지난해보다 줄어든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정부 주장대로 실제로 수급자 수를 늘리려면 지난해 책정 기준인 159만6000명에서 출발했어야 타당하다. 수급자를 줄인 결과 지난해 지원해 주지 못한 6만여명분에 대한 예산도 고스란히 남았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정부는 “취약·위기가구 발굴에 적극 나서겠다”며 부처 합동으로 지원센터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새롭게 발굴되는 취약·위기가구들에 대해 막상 구체적으로 어떤 예산으로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는 언급이 없다. 복지부는 “일단 3월까지 조사를 마친 뒤 보자”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수급자 수 선정을 놓고 비판이 나오자 정부는 지난 12일 추경예산을 편성하면서 추가로 12만명을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복지를 돈벌이 산업으로 인식

또 다른 이명박 정부의 복지 정책 특징은 ‘산업화’이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해야 할 분야를 돈벌이 대상으로 삼는 산업 개념이 도입된 결과 국민연금·건강보험과 같은 사회보험도 돈벌이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정부의 의료 영리화 추진 반대 집회를 갖고 있는 보건의료 노동조합원들.|경향신문 자료사진


복지부·식약청 등 시민 복지를 책임진 정부 부처들은 요즘 서민의 열악한 복지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까를 두고 고민하기보다 ‘경제살리기’에 바쁘다. 이 부처에서는 화장품산업 선진화, 의료기기산업 선진화, 해외환자유치 선진화, 첨단의료복합산업 등 연일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 구상이 발표되고 있다. 복지부의 한 공무원은 “요즘에는 우리가 산업 부처인지 보건·복지 부처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호소했다. 복지부는 지난달 화장품 산업 양성을 위해 올해 40억원의 R&D 예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화장품 개발에 40억원을 쓰겠다는 복지부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쓸 돈은 너무 아끼고 있다. 광우병(VCJD·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브병) 예산이 좋은 예이다. 정부·여당은 “광우병에 대한 연구지원 등 안전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국내 유일의 광우병 전문연구기관인 질병관리본부 산하 광우병 연구실에 배정된 올해 예산은 5억원가량. 5억원 중 실질적으로 광우병을 연구하고 치료제 개발에 써야 할 R&D 예산은 한푼도 없다. 인력 운영비, 광우병 관련 연례 조사비용, 실험실·기기 관리비 등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국내 광우병 연구 실태는 열악하다. 질병관리본부는 내부 보고서에서 ‘광우병을 일으키는 프리온 연구를 위한 인적·물적 인프라 미비로 연구수행 불가’ ‘프리온 연구 지원을 위한 대형 국가 지원 프로젝트 전무’라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광우병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대처할 능력도, 시스템도 전무한 것이다.

본부 측은 광우병 연구를 위해 매년 15억원씩 최소 4~5년은 지원이 돼야 한다며 예산을 신청했지만 전액 삭감당했다. 예산심의과정에서 “발생하지도 않는 광우병에 예산을 쓸 이유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노년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는 국내 실정상 광우병 연구는 광우병뿐만 아니라 치매 등 다양한 분야로 응용될 수 있는 필수 연구”라고 말했다.

제약사 위해 거품 약값 빼기 후퇴

돈벌이 논리에 밀려 후퇴한 보건·복지 정책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부·여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어린이 기호식품 신호등 표시제’라는 것이 있다. 이 제도는 어린이 식품의 성분과 영양을 따져 그 위험도에 따라 빨강(안전), 혹은 녹색(안전) 등으로 포장지에 표시해주는 제도다. 색깔만 보고도 유익한지, 나쁜지 알 수 있다. 학부모·시민단체의 수년간 숙원사업이었다. 정부는 지난해 멜라민 파동 등을 겪으며 올해 안 제도 도입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진전이 없다. 업계의 반발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한 식약청 관계자는 “경제난에 부딪혀 기업들이 어려운데 그 제도를 도입할 경우 경영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하다”고 전했다. 기업 활동에 방해가 되므로 어린이들의 안전을 유보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약값 거품빼기 사업도 기업 논리에 부딪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약품의 상당수가 제약사와 의·약사간 리베이트 비용이 반영되어 있어 가격이 부풀려져 있다는 비판이 계속되자 2007년부터 ‘약제급여평가위’를 구성해 건보적용 약품에 대한 약값을 재평가 중에 있다.

지난해 전체 건강보험재정 지출액 35조원 중 약값이 차지하는 비중은 30%가량인 10조원 이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수치인 17%의 배에 가깝다.

그러나 올해 새로 구성된 급여평가위원들이 ‘친 제약사’가 아니냐며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또 급여평가위 연구 결과 고지혈증 약품에 대해 600억원가량 약값을 인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정부는 3년에 걸쳐 인하하겠다는 방침이다. 한꺼번에 인하할 경우 기업에 부담이 된다는 논리다. 이 때문에 해마다 200여억원씩 건보재정에서 거품 약값을 부담해야 한다.

시민의 미래-기업이익 맞바꾼 국민연금

국민연금도 산업화 논리의 희생양이다. 경제위기를 맞아 무너진 주식시장을 살리기 위해 ‘밑바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연금 재정이 흘러나가고 있다. 시민의 미래와 일부 기업·주식투자자들의 ‘이익’을 맞바꾸고 있는 셈이다.

복지부는 지난 4일 오전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지난해 국민연금 수익률(정부 가수익률 기준)은 0.01%, 수익은 166억원으로 잠정 집계했다. 주식에서 19조3564억원을 손실봤지만 채권에서 19조1524억원, 대체투자·금융수익 등에서 낸 수익으로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해외연금의 경우 일본 연금이 마이너스 13.9%, 캐나다 연금이 마이너스 14.5% 등 대부분 마이너스 수익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선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 3년간 국민연금의 평균 운용수익(4.67%)을 살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민연금은 국가의 예산도, 재정도 아니다. 시민 개인이 장래를 위해 국가에 신탁한 돈일 뿐이다. 국가가 재정을 잘 운영할수록 훗날 개개인이 받는 연금액도 늘어난다. 그래서 매년 연금을 운용할 때 최대한의 수익을 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 마이너스 수익을 보지 않는 것이 원칙은 아니다.

지난해 주식에서만 19조원이 넘는 손실을 봤다. 이를 반으로만 줄였어도 최소 10조원가량의 돈을 시민들이 훗날 더 받을 수 있었다. 그 비용을 안정적인 채권에 투자했을 경우의 ‘기회비용’까지 감안하면 금액은 훨씬 커진다.

그럼에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밑빠진’ 주식시장에 재정의 ‘물붓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해의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올해 연금재정의 주식투자 비중은 지난해와 동일한 17%다. 이 경우 최저 12%, 최대 22%까지 주식투자 비중을 조절할 수 있게 돼 올해도 얼마나 많은 연금재정이 낭비될지 예측이 어렵다.

복지부는 최근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식종목을 공시하도록 한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국민연금의 주식투자에 대한 실시간 감시가 가능해지자 슬그머니 주식투자비중을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주식부문에 대한 연금재정 손실 정보가 더 쉽게 알려지게 되자 그나마 비판을 피하기 위해 ‘꼼수’를 쓴 것이다.

복지 수준, OECD 꼴찌

한 노인이 봉사단체로부터 제공받은 반찬으로 단칸방에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7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양극화 실태와 정책과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가구 월 평균소득의 절반도 안되는 빈곤층의 규모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전국 최저생계비 이하(4인 가족 기준 132만원) 계층은 540만명에 달하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는 지난해 기준으로 153만명에 불과하다. 시민 380여만명가량이 국가로부터 가장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고 있지 못한다는 얘기다.

복지재정 지출은 선진국의 절반 수준밖에 안된다. 200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통합재정지출 중 복지지출 비중은 OECD 국가 평균(55.4%)의 절반(26.7%) 수준이다. 전체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도 8.6%로 OECD 평균의 3분의 1, 우리보다 뒤처진 것으로 인식하는 멕시코의 11.8%(2001년 기준)에도 못 미친다. 이때문에 OECD 국가 군에서 한국의 사회복지 지표는 거의 전 분야에서 꼴찌를 기록 중이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가 2006년에 펴낸 ‘사회지표를 활용한 국가경쟁력 개념연구’ 자료에 따르면 총사회복지지출의 경우 OECD 30개국 중에서 30위, 근로소득지원은 29위다. 공적의료지출 규모도 29위, 비의료서비스 지출도 29위다.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유럽 선진국들은 과대한 복지지출을 이유로 이른바 ‘복지병’을 고치고자 복지 축소에 나섰지만 우리는 그럴 형편이 못된다. 선진국의 절반이라도 따라가려면 앞으로도 계속 복지지출을 늘리고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조세를 늘려 재정을 확충해야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증세보다는 감세를 선택했다.

이명박정부에선 보건·복지도 ‘돈벌이 산업’

진보신당이 지난해 말 분석한 바에 따르면 올해 정부의 전체 지출규모는 273조여원으로 2008년(257조여원)보다 6.5% 늘어난 데 반해, 복지분야 지출은 67조6500여억원(2008년)에서 73조7000여억원으로 9%가량 증가했다.

표면적으로는 복지비용 증가율이 총지출 증가율을 초과, 복지지출이 크게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지비용 증가분에서 국민연금, 노령연금 등 자연증가분(4조5000여억원)을 제외하고 나면 실제로 남는 증가액은 1조786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6% 증가한 것에 그친다.

최근 복지 지출도 한시 지원의 땜질

올해 신규 복지사업의 경우에도 경제위기에 따른 긴급지원사업이 대다수이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복지부 소관 예산 지출안’에 따르면 신규 사업으로 책정된 예산 3700여억원 중 노인장기요양보험 자연증가분과 연료·식비 등 생활보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는 2330여억원에 달한다. 생활보조비의 경우 올해 한시적인 집행으로 끝나므로 실질적인 복지 확대라고 보기 어렵다.

남은 신규사업 중에서도 보건산업분야 연구개발비용이나 행정 운영비용 등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지난 12일 정부가 발표한 대규모 추경예산에 포함된 복지분야 지출도 저소득층에 대한 6개월짜리 한시적 지원이나 저리 대출 등 일시적인 ‘땜질’에 그쳤다.

성장 우선론에 복지부는 왕따 

한국이 현재의 수준이나마 복지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지 10년이 채 안된 데다 이마저도 ‘성장우선론’에 눌려 제대로 정착되지도 못했다. 지난 1월 복지부가 신빈곤층에 대비한 정책을 발표하던 날의 일이다. 복지부는 기존 정책들의 수혜자를 소폭 늘리는 것 외에 경제위기를 맞아 일시적으로 빈곤층으로 전락한 계층 등에게 긴급생활비를 지원하고 대출이자를 보조해주는 새로운 방안을 준비했다.

이런 내용들을 담아 원래 오후 2시에 기자회견을 예정했지만 회견은 오후 5시쯤에야 열렸다. 기획재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지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대책은 결국 이날 발표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복지부가 준비했던 대책은 지난 12일 기획재정부 등을 통해 추경예산에 반영됐다. 복지부가 할 때는 안되고, 재정부가 할 때는 되는 것, 이것이 한국 복지를 만드는 정부의 현주소다. 또다른 복지부 관계자는 “국무회의 때 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해야 하는 복지부장관은 현 정권에서 사실상 왕따”라고 털어놨다.

기초복지 도입도 유럽에 반세기 뒤져

대다수의 학자들은 한국에 본격적인 복지제도가 도입된 원년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1999년으로 보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전에도 이와 유사한 ‘생활보호법’이 61년 제정돼 시행된 바 있지만 말 그대로 ‘구휼’에 그치는 수준인 데다 당시 불법적으로 집권한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시기가 외환위기 이후라는 점으로 볼 때 대공황을 겪은 뒤 복지제도를 확충한 과거 유럽의 움직임과 유사하지만 시기로는 유럽보다 반세기 가까이 뒤졌다.

외환위기 이후 10여년의 짧은 기간에 건강보험 통합(99), 국민연금법 전지역 확대(98), 고용보험 확대(99) 등 필수 사회보험들이 차례로 도입된 것은 일련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아직 복지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의료원 민영화, 서민 갈 병원 사라져

2003년 중국발 사스 파동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사스(SARS·중증급성 호흡기 증후군)는 사스-코로나 바이러스(SARS coronavirus)가 인간의 호흡기를 침범하여 발생하는 질병이며 2002년 11월에서 2003년 7월까지 8096명의 감염자가 발생, 774명이 사망했다.

가까운 한국에도 사스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고 정부는 대책 마련을 서둘렀다. 문제는 병원이었다. 사스를 관리하고 치료하려면 지정병원이 필요한데, 어느 병원도 사스 환자를 맡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다. 국립대 병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유일하게 사스 구호기관으로 지정된 곳이 바로 국립의료원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달 초 이 국립의료원을 사실상 민영화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정부는 현 서울시 을지로에 있는 국립의료원 부지를 팔고 서울 외곽이나 근교에 최첨단 병원으로 새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연간 2000억~3000억원의 운영적자가 발생해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병원 운영은 ‘특수법인’으로 만들어 재정·인사 등을 독립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국립의료원 노조 박성수 위원장은 “말이 좋아 특수법인이지 이는 공공기관인 의료원을 민간병원으로 만든 것과 똑같다”며 “사스와 같은 재난·전염병 상황 시에는 공무원 신분인 국립의료원 직원들 말고는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를 돌볼 곳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실장은 “그나마 서민들이 저렴하게 이용하던 의료원을 민영화하면 병원비가 늘어날 것은 뻔한 일”이라며 “국립병원이 연간 2000억원 정도 적자 보는 것은 그 기능상 정상”이라고 말했다. 최근 재정부가 발표한 ‘병원 영리법인화 허용’ 방안도 같은 맥락이다. 기재부는 “해외 의료수지 적자폭이 해마다 늘고 있다”며 “국내 병원을 발전시켜 해외 의료 수요를 국내로 돌리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영리법인으로만 제한된 병원들이 영리법인화할 경우 의료비 상승과 건강보험재정 악화 등 수많은 부작용이 예고되고 있다.

우석균 실장은 “해외 의료서비스 이용자 대부분은 부유층이라 국내 병원을 영리법인화해도 적자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며 “병원이 영리화될 경우 돈이 안되는 서민 환자나 건강보험 환자는 받지 않는 병원이 무더기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송진식기자 truejs@kyunghyang.com>


 

입력 : 2009-03-19 17:54:39수정 : 2009-03-19 23:02:10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사회 임금’ 인상 운동 벌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임금을 받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가족의 생계를 임금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로부터 보육료로 50만원을 지원받는다면 그만큼 임금이 오른 것과 같다. 민간의료보험에 10만원을 내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건강보험에 4만원만 더 내 얻을 수 있다면 가계소득을 6만원 늘린 것과 같다.

서구 노동자들은 우리보다 안정적으로 생활한다. 그들 역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은 많지 않지만, 사회로부터 다양한 복지를 얻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회사(노동시장)에서 얻는 소득이 ‘시장임금’이라면, 보육지원금, 노인요양지원금, 건강보험 적용 진료비, 기초노령연금 등 사회적으로 얻는 수혜는 ‘사회임금’이라 할 수 있다. 복지를 강화하자는 것은 사회임금을 늘리자는 이야기다.

사회임금은 ‘필요에 따라’ 제공된다. 아이 수에 따라 보육료를 지원받고 어르신이 계시면 기초노령연금을 받는다. 민간의료보험에선 가입한 상품에 따라 보장액이 다르지만 건강보험에선 보험료 납부액과 별도로 아픈 만큼 적용받는다.

경제위기 시기에는 사회임금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사회임금이 커지면 서민들의 생계 위험이 줄어들고, 구조조정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감소한다. 그래서 사회임금은 시장임금과 함께 노동자가 의지하는 양대 기둥이다.

보육·노인요양 지원금, 노령연금 등 사회임금 빈약

사회임금 앞에는 두 가지 장벽이 있다. 첫째, 재정 장벽이다. 세입에선 직접세 비중이 작다. 특히 누진적으로 부과되는 소득세가 크게 부족하다. 2006년 우리나라 소득세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4.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9.2%에 비해 5.1%포인트 부족하다. 한해 GDP를 1000조원으로 치면, 앞으로 매년 51조원을 더 소득세로 거두어야 OECD 회원국 값을 할 수 있다. 세입이 부실하니 복지도 취약하다. 2005년 우리나라 사회복지비 지출은 GDP 대비 6.9%로 OECD 평균 20.5%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복지 불량국가’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나라를 거꾸로 몰고 간다. 부자, 대기업에 혜택이 돌아가는 대대적 감세로 세수 감소분이 임기 5년 동안 무려 96조원에 이른다. 이러니 사회임금을 늘리기 어렵다.

올해 복지재정 지출에서 국민연금 수급자 증가, 기초노령연금 대상 확대 등 법률에 의해 시행되는 자연증가분을 제외한 증액분은 고작 1조6000억원이다(정책적 증가율 1.8%). 20만원까지 올리겠다는 대선공약과 달리 기초노령연금은 여전히 8만4000원에 묶여 있다. 대대적인 감세로 중앙재정에서 지방에 지원하는 지방교부세가 5조원 줄어들어 지방정부의 복지사업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 지자체가 월 1만2000~1만8000원씩 노인에게 제공되던 교통수당을 올해 전면 폐지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취약한 직접세 -> 작은 국가재정 -> 복지 불량국가’ 고리가 이명박 정부에서 심화일로에 있다.



복지를 시장에 맡기는 이명박 정부두 번째 장벽은 ‘사회복지의 시장화’다. 사회임금이 늘어나기 위해선 복지서비스가 공공영역에서 제공돼야 한다. 똑같은 서비스라도 시장에서 상품으로 매매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이용하기 힘들어진다.

2006년 미국은 GDP의 15.3%를 의료비로 썼음에도 병원 문턱이 서민들에게 여전히 높다. 영국은 GDP의 8.4%를 사용했지만 국민들이 의료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이용한다. 미국에선 의료서비스가 사보험, 민간의료기관에서 구입되는 시장상품이지만, 영국에선 공적 재원, 공공의료기관을 토대로 환자에게 필요한 만큼 제공되는 사회임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복지서비스는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서민들은 어려운 살림에 민간의료보험, 사연금 보험료를 내야 하고, 작년에 노인요양보험이 도입되었지만 요양서비스는 거의가 민간기관에서 제공된다. 엄마들이 선호하는 공보육시설은 전체 5%에 불과해 아이들은 영세한 민간보육시설로 가야 한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사회복지를 더욱 더 시장으로 내몰고 있다. 사보험사에 개인질병정보를 제공해 민간의료보험의 성장을 도우려 하고, 영리병원을 허용해 의료기관의 돈벌이 경영을 재촉한다. 보육, 노인요양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바우처제도(복지서비스 이용권)를 확대해 오히려 민간기관 복지를 늘리고 있다.



복지 경험 없어 복지에 기대하지도 않는 병폐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을 이기고 사회임금을 늘리려면 시민,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복지를 체험할 수 있는 상징적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다수 국민들이 복지를 원하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까닭은 제대로 된 복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에 주목하자. 민간의료보험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그나마 절반의 신뢰를 얻고 있는 게 건강보험이다. 진보정당이 내놓았던 무상의료를 되살려내자. 무상의료는 공짜의료가 아니라, 우리가 낸 보험료로 운영되는 건강보험공단이 진료비를 전액 책임지는 것이다. 민간의료보험에 내고 있는 사보험료만 건강보험으로 전환해도 가능한 이야기다. ‘사보험 제로화, 건강보험 전액 책임’을 내걸고 무상의료운동을 벌이자.

둘째, 노동시장의 불안정화에 따른 복지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 노령, 질병, 실업, 산재 등을 다루는 사회보험은 사회구성원들이 일을 해 번 소득으로 보험료를 낸다고 가정하에서 설계되었다. 지금 노동자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경제위기로 인해 보험료 납부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 국가가 불안정노동자의 보험료를 지원하는 획기적인 보험료체계 혁신이 요청된다. 비정규보호법안에 이 조항이 포함돼야 한다.



감세 비판하면서 정작 세금 내기는 싫어해셋째, 국가재정을 키우기 위해선 직접세 증세가 불가피하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명박 감세가 부자만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내가 얼마라도 더 내야 하는 증세엔 소극적이다. 세금이 복지로 되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세와 복지를 연동한 재정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부유계층에게 세금을 더 내라고 요구하되 시민들도 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고용불안 광풍이 몰아치는 경제위기 시기다. 시장임금이 휘청거린다. 재원 마련과 복지 확대를 함께 담고 있는 것이 사회임금이다. 버는 만큼 내고 필요한 만큼 받는 사회임금 인상운동을 벌이자.

<오건호 | 사회공공연구소 실장>


 

입력 : 2009-03-19 17:48:46수정 : 2009-03-19 23:04:06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제조업 쇠퇴, IT·서비스업 부상

한국 교육에 신자유주의적 요소가 도입된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는 수출주도형 한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웃 중국이 저렴한 임금을 무기로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며 한국의 수출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공산품의 경쟁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한국정부는 이에 정보기술(IT)산업 및 서비스산업을 위주로 하는 국가인재 전략으로 교육체제 개편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95년 ‘5·31 교육개혁안’이다.

95년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가 발표한 이 계획의 핵심은 ‘경쟁’과 ‘수월성’이다. 쉽게 말해 엘리트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 입안자인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은 이 개혁안에 정통하다. 당시 KDI 연구원으로 교육개혁위원회에 참여한 이 차관은 ‘교육 개혁이 왜 필요했나’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인적자원을 길러내야 21세기 세계경제에서 앞서나갈 수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아이디어였고 반발도 많았습니다. 지난 10년간 개혁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던 반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적극적인 개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교육제도의 변화는 한국의 경제·고용 구조를 반영한다. 정부가 집중하는 IT산업이나 고소득 서비스업은 특성상 소수 고급 인력, 말하자면 개성과 창의성을 갖춘 ‘다품종 소량생산’을 요구한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97년 금융위기 체제를 거치면서 국내에 굳어진 ‘고용없는 성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한국노동연구원 허재준 노동시장연구본부장은 “이전에는 신발·의류 등 노동집약적 산업을 비롯해 중공업, 전기전자산업 등이 고용창출의 주된 역할을 담당했으나 현재는 젊은이들이 취업할 만한 일자리가 많지 않다”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제품 품질을 보장해야 했기 때문에 ‘대중교육’ ‘평준화 교육’을 해야 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교육 방향을 담은 5·31 교육개혁안은 지난 10년간 민주화 세력 집권기에도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줄곧 추진돼왔다. 외국어고교가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난 것도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 기간이었다. 보수성향의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수요자 중심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세분화·전문화된 정도가 지난 10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방향은 결국 공교육 강화를 위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게 됩니다. 다만 국가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자사고 및 국제중 등 특수한 학교가 특정계층 위주로 운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교육이 ‘부의 세습’ 도구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교육이 공교육을 강화할 것이라는 논리에는 반론이 거세다. 중앙대 교육학과 강태중 교수는 “선택을 허용하면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비용과 정보를 갖춘 계층만 더 나은 교육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의 공공성이 훼손될 뿐 아니라, 소득에 따른 교육격차가 발생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며 “이건 단순한 교육의 문제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민영·임지선기자>

입력 : 2009-03-22 17:53:38수정 : 2009-03-22 17:53:38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실패한 영·미식 ‘경쟁교육’ 검증도 없이 수입

ㆍ2부 - 7 정글에 던져진 교육

신자유주의에 휩쓸린 한국 교육

‘교육은 곧 시장과 경쟁이다.’ 이명박 정부가 학교교육의 이념을 바꾸고 있다. 보수주의 교육혁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나라 영국과 미국을 벤치마킹한 결과이다.

마거릿 대처 영국 정부는 교육을 대대적으로 손댔다. 1980년대 영국을 강타한 경기침체의 원인을 정체된 교육제도가 초래한 학력저하 때문이라고 진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자연히 해결책은 ‘경쟁’과 ‘선택’이었다. 일제고사를 실시했다. 학교별 순위도 공개했다. 학부모에게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이유였다. 이명박 정부의 일제고사·학교정보공시제·고교선택제 및 ‘고교 다양화 300’, 국제중학교 정책과 닮았다.

국제중학교 설립에 찬성하는 시민과 반대하는 시민이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서로 등진 채 시위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영국 제도 무분별 도입

영국은 신자유주의 교육을 도입한 이후 중등교육이 무시험·학비 무료의 공립학교, 입학시험·학비 유료의 사립학교, 입학시험을 보는 공립학교인 문법학교로 나뉘었다. 이명박 정부의 일반고교, 자사고·특목고, 기숙형 공립학교와도 유형이 같다. 특히 미국의 교육정책은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외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의 미국박사 비율이 70%가 넘는다는 학술연구진흥재단의 통계도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로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이 충분한 논의나 검증절차 없이 우리 사회에 직수입됐다. 학교운영위원회 및 대학이사회 제도, 교원평가, 대학평가, 시·도교육청 평가, 자율형사립고, 입학사정관제 등 굵직한 정책은 모두 미국에서 일정 시차를 두고 건너온 것들이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이영탁 이사는 “북유럽과 달리 최근 영·미식 교육은 모든 이들에게 수월성(성적 높이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귀족학교’의 등장과 그에 따른 사회의 계급화를 촉진했다”고 진단한다.

중산층도 감당못하는 영국 사립학교 등록금

“현재 영국의 사립학교 등록금은 몇 만파운드 수준입니다. 웬만한 중산층도 감당하기 어렵죠. 주어진 조건을 보완하지 않고 무조건 경쟁하면 ‘불공정 경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명박 정부가 따라하고 있는 교육모델입니다.”

이같이 ‘민간’에 의한 고급교육은 교육의 민영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국가가 수돗물·가스·전기 등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2012년까지 100곳의 사립고교들이 자율형사립고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재단전입금 비율을 학생등록금의 5%선으로 낮추면서도 정부의 예산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공교육 전체가 한꺼번에 특성화·전문화된 교육을 하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고 효율도 적기 때문에 사학에 맡기는 게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부가 직접 추진하기보다는 민간에 맡겨야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교 운영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고급 교육→고급 일자리→고급 인생

그러나 ‘고급’ 교육을 민간이 담당하면 학부모는 ‘소비자’로서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중학 입시 부활’의 신호탄인 국제중의 경우 연간 학비만 700만원에 달한다. 서울 소재 외국어고 역시 경비를 포함한 연간 평균 등록금이 약 700만원이다. 신설 예정인 자율형사립고의 등록금도 외고 수준으로, 일반계 고교보다 3배 이상 비싸다. 지난해 3분기를 기준으로 할 때 소득 1분위(최하위)가 96만원이라는 통계청 자료를 감안한다면 저소득층이 자녀를 국제중과 자사고에 보내려면 연간 최소 7개월치 임금을 학비로 지출해야 한다. ‘1000만원 시대’를 맞은 대학 등록금까지 감안하면 중산층 이하의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은 점점 먼 얘기가 된다. 이들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단계의 사교육비도 마찬가지다.

이런 교육의 사회적 결과는 명백하다. ‘고급’ 중등교육을 받고 명문대를 졸업해 고소득 일자리를 잡는 엘리트와 그런 통로에 접근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경쟁에서 도태되는 인생으로 양극화될 수밖에 없다. 영국의 경우 연간 학비 수만파운드짜리 사립학교 학생들이 전체 학생수에서는 10%에 못미치지만, 대입에서 최상위 성적을 내는 100개 학교 가운데 80% 이상을 차지하고, 이들은 대부분 고급직종에 일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사교육비 늘리는 경쟁 교육

“6학년생인 아이를 대치동 학원에 처음 보내게 됐어요. 한 유명학원의 수학반에 보내려는데 학원 측에서 ‘선행 몇 년 했냐’고 묻더군요. 그런 거 한 적 없다고 했더니 ‘우리 학원 다니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서 2년 선행은 보통’이라고 하더라고요. 등급시험을 봤는데 우리 아이는 초등 2~3학년 아이들과 같은 수업을 들어야 한다나요. 결국 인근의 한 수학학원에 보냈더니 우리 아이 또래는 벌써 중3학년 과정을 배운다더군요. 수학·영어학원비가 교재비를 포함해 첫 달에 100만원이 들었어요. 이 정도면 많은 것도 아니라던데, 앞으로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할까요.”

학부모 유모씨는 지난 겨울방학 때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을 처음으로 학원에 보내는 과정에서 사교육의 실체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약속에도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사교육비가 줄어들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어 사교육비 11.8% 증가

그동안 ‘경쟁’을 강조해온 이명박 정부는 자사고 및 국제중 신설, 3불정책 폐지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사교육비를 줄이는 길일까. 집권 첫해인 2008년, 사교육비 총규모는 8600억원(4.3%)이 늘어난 20조9000억원으로 집계됐다. 특히 ‘아륀지 파동’으로 상징되는 영어몰입교육 논란 등의 영향으로 영어 사교육비는 11.8%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소득이 높을수록, 공부를 잘 할수록 사교육비를 더 많이 투입한다는 것이다. 통계청의 2008년치 발표에 따르면 월평균 소득이 700만원 이상인 가구는 100만원 미만의 가구의 8.8배를 지출해 월평균 47만4000원을 자녀 학원비로 쓴다. 대학 문턱에 가까워지는 고교가 되면 11.2배까지 벌어진다. 공교육 내의 석차나 대학 입학이 사교육 효과에 의해 좌우되는, 불공정경쟁 상황이다.

그래도 정부는 여전히 경쟁을 강조한다. 경쟁을 통해 공교육의 질이 향상되면 사교육비가 향후 수년에 걸쳐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의 사교육비 증가 추세에 대해서는 정책의 본격적인 효과를 거두기에 앞선 과도기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가 제시하는 사교육비 경감 교육의 모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낙오방지법(NCLB·No Child Left Behind)’을 본뜬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와 학교 지원, 교원평가의 연계 정책이다. 학력미달 학생의 비율을 줄이기 위해 시작한 것이지만, 사실은 2011년부터 성적이 좋은 학교는 더 많은 지원을 받고 성적이 나쁜 학교는 덜 받는 구조가 된다. 이 때문에 오히려 학교 간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학력평가로 저소득 지역 학교 몰락할 것

공립학교 현장에는 불안감이 돌고 있다. 서민층이 많은 서울 영등포구의 한 중학교 교사는 “정부 지원을 몇 년 받는다고 해도 낙후한 학교 건물이나 시설, 저소득층의 비율이 높은 환경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기피학교로 낙인찍힐 수 있다”고 걱정했다.

“교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지역의 교육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요. 일제고사 성적이 전년에 비해 오른 정도에 따라서 지원을 차등화한다는데 기피학교가 되면 학생들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성적이 오르지 못하면 지원을 못 받으니 점점 도태되고, 내년부터 실시되는 학교(고교)선택제까지 더해지면 암담할 따름이죠. 이러다간 학교가 지역사회의 중심은커녕 슬럼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영국과 미국도 학업성취도 또는 학생 모집 등 ‘경쟁’에서 우수한 학교에 더 많은 재원이 지원되는 방식의 정책을 펴고 있다. 영국은 2013년까지 중등교육자격시험(GCSE) 성적이 나쁜 학교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폐교 또는 흡수통합시키겠다는 방침이다. 대상은 전체 공립학교의 5분의 1인 670여개에 달한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 위주 정책은 공교육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성열관 경희대 교수는 최근 교육학자 155명이 ‘일제식 학력고사’ 철회를 요구한 자리에서 “획일적 점수에 의한 외부 평가방식이 아니라 기초학력 미달학생과 취약계층 학생에 대해 다각도로 지원이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영·미도 실패한 ‘철 지난’ 정책을 수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일 밤 10시 서울 대치동 학원가 버스 정류장. 학원에서 공부를 끝낸 학생들이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창길기자>


학력 중시, ‘문제 푸는 기계’ 양산 가능성

21세기형 ‘다품종 소량생산’과 걸맞지 않은 ‘소품종 대량생산’ 방식의 평가 잣대로 학생과 학교를 평가할 경우 정부 재원으로 운영되는 일반적인 학교교육은 기계적인 문제풀이에 함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창의적인 교육은 고비용의 사립학교 또는 사교육 시스템이 제공할 수밖에 없다.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교육업체 관계자는 “교과부 및 각 지자체마다 영재학급을 늘리고 있지만, 그에 필요한 시설이나 교사 연수는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 학부모들의 총평”이라고 말했다.

“최근 KAIST에서 과학 잠재력이 있는 일반고생을 선발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교사 1인당 학생수가 30명이 넘는 현실에서는 무리라고 봅니다. 교사 1인당 8명이 실험을 하는 것도 벅차거든요. 창의적인 교육을 제공하려면 그에 걸맞은 투자가 이뤄져야 하지만 공교육은 그렇게 못합니다. 영재학급 등을 정부가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기초단계에 불과합니다.”

교육지옥, 학벌 사회

2010년부터 자율형사립고·기숙형 공립학교 등 엘리트 고교가 ‘3불’(고교등급제·본고사제·기여입학제 금지) 폐지와 맞물리면 초·중등교육은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무엇보다 특목고·자사고에서 명문대로 이어지는 견고한 학벌통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2009학년도 서울대 진학 ‘톱10’ 고교 가운데 일반계 고교는 단 한 군데뿐이었다. 교육계에서는 “야구로 치면 특목·자사고는 ‘1부리그’이고 일반고는 ‘2부리그’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고교 평준화’는 이제 교육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질 운명이다.

이 같은 경쟁 시스템이 주는 긴장감 때문에 학부모들은 탈출을 꿈꾸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기 전인 지난해 통계청 ‘사회통계조사’에서 학부모 절반이 자녀를 외국에 유학보내고 싶다고 응답했다. 경쟁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교육 기회를 얻기 위해, 혹은 더 강력한 경쟁자가 되기 위해 짐싸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전에 거주하는 학부모 김향숙씨는 “고교 1학년이 된 아들의 학교생활을 보느라면, 돈만 있다면 짐싸들고 외국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낙오 막으려 혹은 경쟁력 강화 위해 조기 유학길로

“전인교육, 이런 건 입시가 닥친 학교현장에서 의미가 없어요. 과목당 25만원씩 하는 학원을 몇 개 보내, 하루에 6시간도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서 사교육으로 내몰리는 게 아이들 현실이더군요. 학원 보낸다고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주도 학습능력만 잃어버리더라고요. 저처럼 아이들 인성교육을 고민하는 주변 학부모 몇몇은 자녀를 인도나 핀란드 등지로 조기유학을 보냈어요. 그렇게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은 것 아니겠어요. ‘3불’ 폐지 얘기가 나오는 마당에 입학사정관제 도입이 답이 될지 암담할 뿐이죠.”

또다른 서울지역 학부모 이모씨는 3년 전 초등학교 5학년이던 자녀를 호주로 조기유학 보냈다.

“어차피 경쟁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영어가 중요해진 만큼 최소 3년 정도 해외 거주경험은 필수적이지 않겠어요. 게다가 최근에 정부가 외국인학교 입학요건을 5년 이상에서 3년 이상 외국 거주로 완화했잖아요. 국내 명문대에 진학한다면 좋고, 만약에 사정이 된다면 다시 외국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다고 봐요. 선택의 폭을 넓히는 거죠. 지금은 환율이 좀 올랐지만 한국 내에서 사교육 받을 비용이나 효과를 생각하면 차라리 외국 나가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경쟁의 내면화, 공동체 파괴

신자유주의 교육이 경쟁을 얻는다면, 잃는 것은 계급 이동이다. 현재 세계 중간 수준인 한국교육의 사회적 평등이 향후 세계 최하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영남대 김재춘 교수는 “중간 이하의 계층은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 상승의 희망이 없어지니까 스스로 교육을 포기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며 “한국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은 60~70년대만 해도 가능했고, 90년대 들어 어려워졌지만 앞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를 인생 경쟁자로 인식

신자유주의 교육이 시장에 의존할수록 개인은 파편화되고, 사회적 연대는 사라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교직 경력 19년차인 경기 시흥 장곡중학교 박현숙 교사는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말이 10년 전에 등장하면서부터 교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91년 처음 발령받았을 때는 신자유주의 파도가 치기 전이었어요.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있었어요. 반 아이들과 생일잔치도 하고 학급회의도 하고 집단상담도 진행했죠.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급우를 경쟁자로 여기는 것 같고, 담임교사는 행정을 처리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 같아 안타까워요. 협동활동을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교직 10년차인 서울 동성고 김행수 교사도 같은 의견이다. “가장 많이 차이나는 게 동아리 활동이에요. 교직 입문때만 해도 학교마다 특색있는 동아리가 있었는데 2004년에는 지원자가 없었어요. 보이스카우트가 없어졌고 풍물패도 사라졌어요. 아이들이 공부에만 빠져 있기 때문이죠.”

시험 문제에만 있는 공동체

정규성 서강대 교육문화학과 교수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문화가 붕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쟁논리가 강조되는 교육제도 속에서 그런 가치를 한 번도 배우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공동체 의식은 피상화돼서 내가 직접 체험하는 게 아닌 오로지 교과서와 시험문제에만 나오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학교에서의 기업 및 시장 논리 확대를 들 수 있다. 오는 4월부터 경제교육지원법이 시행되면 중·고교 경제교육에 친기업 내용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정경제부는 2013년까지 95억원을 들여 경제교과서를 개정하고 교사들을 재교육할 방침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신자유주의 등 미국 보수주의 운동이 추구하는 핵심이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 집단에 해가 되는 정책을 뒤집는, 근본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인 목표”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의 학교교육에도 사회지배층의 이익을 재생산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최민영·임지선기자 min@kyunghyang.com>


 

입력 : 2009-03-22 17:51:39수정 : 2009-03-23 09:43:29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수준높은 공교육’ 만이 희망이다

경쟁아닌 것 무가치하다는 고정관념

인간에게는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 강하게 작용한다. 자신의 믿음이나 경험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속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서울 강북의 한 중3 교실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집단 최면처럼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믿음이 바로 ‘경쟁 신화’이다. 경쟁은 효율과 발전을 담보하는 부동의 지렛대였다. 그 믿음이 수십년간 철저하게 교육에 투영된 현실이 바로 우리의 입시지옥이다.

2009년 2월3일 영국의 가디언 신문은 ‘백인 중산층 가족이 명문 대학을 지배하다’라는 제목 아래 큼지막한 기사 하나를 내보냈다. 카시(Caci)라는 시장동향 전문 조사기관이 17개 대학 입학생 1만7000명의 가정환경을 조사한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상위 2% 계층이 명문 대학 입학생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층 격차 심화시킨 영국 공교육

이는 새삼스레 밝혀진 사실이 아니다. 영국의 최상위 대학은 이른바 ‘러셀 그룹(Russell Group)’이라 불린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런던정경대학 등 러셀 그룹 소속 학교 20곳은 정부가 보조하는 연구 기금 가운데 3분의 2를 독식한다. 이들 대학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최상위 계층에서 충원되는 것이다.

계급 격차에 입각한 교육 수혜의 분리 현상은 영국 교육의 역사에서 오래된 전통이었지만 지금처럼 교육에서의 불평등 현상이 더욱 심화된 시기는 1980년대 초반 대처 전 총리 집권 이후였다. 시장 경제는 물론 사회복지와 보건 의료, 교육 서비스 등 공공 영역에 휘몰아쳤던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에서 30년 후의 계층 격차 심화가 비롯된 것이다.

그로 인해 오늘날 교육과 관련된 영국인들의 행복 지수는 높지 않다. 밤거리에는 칼부림을 일삼는 청소년이 늘고, 어린 자녀의 보육비 걱정으로 젊은 맞벌이 부부들은 한숨이 깊다. 빈곤선 이하의 어린이 숫자는 200만명을 넘어섰다. 어느 지역에 사는가에 따라 공교육 서비스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결국 ‘모든 이들을 위한 양질의 공교육 제공’이라는 교육 이념이 실종되고 말았다.

차별 없는 북유럽 교육이 더 질 높아

이런 측면에서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같은 북유럽 선진국처럼 교육에서의 평등성과 학습자 개인의 자유를 꾸준히 지원해 왔던 나라들이 보여준 교육 성취는 의식 있는 영국의 교육학자들에게 늘 부럽고도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 이들 국가가 PISA와 같은 국제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어느 학교에서든 어느 학생이나 차별을 두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 수준에 맞추어 학습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지고 교육서비스를 보장해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이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총론을 잘 몰라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비록 ‘모든 이들을 위한 공평하고도 자유로운 교육’에 심정적으로 동의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내 자식의 입시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사교육에 입각한 강압적 교육’을 거의 모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실시해 왔다. 그 결과 경쟁 신화는 비수로 돌변해 모든 이들의 가슴에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선택적 지각’에 따른 형벌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교육 경쟁으로는 미래 없어

명심하자.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교육 경쟁으로는 한국의 미래가 없다. 신자유주의를 이끌었던 대서양 양쪽 두 국가의 교육지표나 현황을 살펴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하지만 발틱해 연안의 북구를 보라.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는 교육에서의 총론을 가지고 씨름한 것이 아니라 각론을 가지고 탐구하면서 실천에 옮겨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자리에서는 교육과 관련하여 두 가지 측면을 제안하고 싶다. 첫 번째는 솔직함이다. 교육계 단독으로는 입시와 사교육 문제를 도저히 풀 수 없노라 솔직하게 고백하자. 입시지옥을 교육 영역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사회문제로서 새롭게 인식하자. 그래야만 노동이나 복지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공동의 해결책을 들고 힘을 합치려 나설 것이다.

모든 이를 위한 공평하고 질 높은 공교육이 대안

두 번째는 용기이다. 입시 문제는 상대하기 매우 어려운 사회적 과제이다. 불행히도 외국의 사례를 참조하거나 그들로부터 지혜를 구할 수도 없다. 입시 경쟁을 이렇게 치열하게 벌이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으니까. 결국 우리의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간 입시 경쟁이라는 검문소를 통과하기 두려워서 갓길로 에둘러가듯 이런 저런 교육개혁을 시도했으나 거의 모두 공염불에 그쳤다. 정면 돌파만이 살 길이다. 비록 목표 달성에 10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입시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진정한 용기로 온 국민의 지혜를 모으자. 국가 차원의 특별기구나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도 바람직하겠다.

다시 천명하거니와 ‘모든 이를 위한 공평하고 질 높은 공교육의 제공’이 총론이다. 경쟁 신화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적 요소와는 과감히 결별을 선언하자. 그리고 솔직함과 용기를 가슴에 품고 지금부터라도 치밀하게 각론을 써나가자. 이 길이 아니면 한국 교육은 진정 희망이 없다.

<이병곤 | 런던대학교 교육연구대학원 박사과정·교육철학>


 

입력 : 2009-03-22 17:59:43수정 : 2009-03-22 17:59:43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재벌의 공공서비스 사유화도 ‘선진화’라 부르나

ㆍ2부 - (8) 폭주 기관차에 올라탄 한국…새로운 우상 : 민영화

이명박 정부만 공기업 때리기 한다?

한국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의 통합을 반대하는 현수막으로 뒤덮여 있는 경기 성남시 한국토지공사 입구. <김기남기자>


아니다. 공기업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글을 보자.

“시장경제 체제의 성숙과 함께 공공사업 부문에 대한 기능 재조정의 여건이 갖춰졌음에도 공공기관은 지속적으로 비대해지고 방만해지면서 국가경제의 효율적 작동을 어렵게 하고 있다. 현재 예산규모로 국내총생산(GDP)의 33.6%를 차지하고 있는 공공부문에 대한 개혁 없이는 대한민국이 선진화 단계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특히 공공기관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서 보듯이, 많은 공공기관이 경영 실적과 상관없이 고액연봉과 성과금을 보장하고, 낮은 생산성에 비례해 쌓여가는 적자를 고스란히 국민 세금으로 메워나가는 비정상적 운영으로 ‘신이 내린 직장’이란 국민적 질타를 받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정책 포털>, ‘공공기관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이명박 정부만 이런 시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논리가 이 사회에 확산된 이래 공기업 때리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을 사회악처럼 취급하는 정도가 좀더 심한 것일 뿐, 이미 한국 사회는 이런 공기업 인식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다.

그 결과 공기업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개혁 대상으로, 곧 대자본이 사유화해도 괜찮은 것으로 당연시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공공 서비스를 재벌이 맡아도, 그걸 개혁, 혹은 선진화라고 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공기업은 방만하고 효율성이 떨어진다?

아니다. 미래경영개발원이 기획재정부에 지난해 3월 제출한 ‘공기업 재무현황 분석’ 보고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공기업들의 경영성과는 우수한 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96~2006년 10년 동안 성장성을 보여주는 매출액 증가율을 보면 21개 국내 공기업이 11.9%였다. 글로벌 500대 기업(9.2%), 국내 500대 기업(10.1%)보다 높았다. 특히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포스코, KT 등 국내 5대 기업의 0.7%보다 높았다. 매출액 순이익률은 평균 7.2%로 글로벌 500대 기업 6.1%, 국내 500대 기업 5.6%보다 높고 국내 5대 기업의 11.1%에 비해서는 다소 낮았다. 안정성을 나타내는 부채비율은 국내 21개 공기업이 104.9%로 글로벌 500대 기업(205.0%), 국내 500대 기업(140.5%)에 비해 낮았다. 반면 96년 7만8205명이던 종업원수는 2006년 5만4324명으로 줄었다. 이에 따라 1인당 당기순익은 2000년 800만원에서 2006년 8500만원에 달했다.

“공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30% 정도 인력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이후 2001년까지 신규채용이 없었습니다. 저희 공사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지만 성과는 좋았습니다. 공기업 고용이 과다하거나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단 얘기죠. 인력채용은 공사가 하고 싶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한명 한명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공기업 운영이 방만하다고 하는 정부가 공기업을 관리·감독하고 있고 매년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공기업이 방만하다면 정부의 책임이 더 큽니다.” 한 공기업 간부의 말이다.

민영화 원칙에 일관성이 있다?

아니다. 흔히 공기업은 망하지 않기 때문에 비효율적으로 운영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비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민간기업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정부는 비효율적인 민간기업이라 해도 고용 규모가 크거나 국가경제에 영향을 크게 미칠 경우 재정지원을 통해 죽이지 않고 살리고 있다. 민간기업이라고 해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바로 퇴출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본토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재무부는 자동차 빅3 중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에 대한 구제자금 지원을 지난해 말부터 단행했다. 6조원짜리 초대형 인수·합병 기업으로 관심을 모았던 대우조선해양도 외환위기 시절 정부가 국유화시켜 살려낸 기업이다.

김용구 미래경영개발연구원장은 “ ‘공기업은 방만하고 이에 따라 민영화해야 한다’는 단순논리는 국민적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킬지 몰라도 거대한 후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면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최근 같은 경제 위기일수록 보편적 사회서비스는 강화돼야 하고 오히려 없던 공기업도 만들어서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효율성을 우선한다?

아니다.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포스코는 여전히 정치권과 정부의 입김에 흔들려 왔다.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내년 2월까지 임기가 남아있지만 ‘노무현 정부 사람’으로 찍혀 새정부 출범 때부터 사퇴압력을 받다 결국 사퇴했다. 이 회장은 경제악화 속에서도 지난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한 인물이다. 이명박 정부가 겉으로 내세우는 대로 공기업을 경영실적과 효율성의 잣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영화된 KT의 사장에는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을 낙하산으로 임명했다. 관료 출신이 KT 사장으로 임명되기는 2002년 민영화 이후 처음이다. 조폐공사 사장에는 천안에서 낙선한 전용학 전 한나라당 의원이 임명됐다. 공천에서 탈락한 안택수 전 의원은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앉았다. 정광윤 가스공사 감사, 이이재 광해관리공단 이사장, 김주완 한국전력기술 감사는 모두 한나라당 출신이다. 토지공사 사장에는 현대건설 출신으로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도시계획국장 등을 역임한 이종상씨가 임명됐다. 주택공사 사장에는 영남 출신인 최재덕 전 대통령직 인수위 경제2분과위원이 앉았다. 철도공사 사장 자리는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 차지했다.

공기업 선진화는 사유화와 무관하다?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초기 ‘공기업 민영화’를 내세웠지만, 지금은 선진화로 간판을 바꿨다.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공기업 민영화의 결과로 수도·전기·가스 요금 인상 우려가 높아지자 정부는 네트워크 산업의 민영화는 없다고 천명한 뒤였다. 그러나 선진화는 민영화의 다른 이름이다.

예를 들어보자. 정부는 지난해 10월 ‘제3차 공기업 선진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2010년부터 발전용 가스 도입, 도매 시장에 민간 참여를 허용하고 점차적으로 산업용 가스 도입 경쟁 범위를 확대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공기업을 매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민영화’가 아닌 ‘선진화’라는 것이다. 해당 공기업 노조는 이를 민영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은 가스를 공공재로 인정해 한국가스공사가 필요한 물량을 전부 통합 구매해 왔는데, 앞으로는 민간기업들도 이 권한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세계 가스 시장이 공급자 위주여서 수입 사업자가 많아진다면 결국 공급자가 가격 주도권을 쥐게 되고 도입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배분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현행 가스요금은 시장 원리가 아닌 사회적 원리에 따라 가격이 책정된다. 실제 비용을 반영하면 주택난방용을 더 비싸게 받아야 하지만 발전용과 산업용에서 얻는 수익으로 주택난방용 가격을 낮추는 ‘교차보조’로 형평성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종훈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은 선진화 계획에 따르면 이런 공공요금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결국 발전용·산업용 가격은 소폭 낮아지겠지만 서민용 가스요금은 2배 인상이 불가피합니다. 결국 선진화의 실체는 가스 도입권을 민간에게 허용하는 민영화입니다. 참여할 민간기업이래봐야 SK와 GS, 포스코 정도의 재벌 대기업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조치인지 뻔하지 않습니까.” 공기업 선진화는 결국 재벌 사유화일 수밖에 없다.

물 관리 민영화해도 물값 안 오른다?

아니다. 공기업은 자본이나 시장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공익성 때문에 존재한다. 수자원개발이나 물 관리 등을 공공이 운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상수도 요금은 1t에 577원 정도다. 이는 물산업이 완전히 민영화된 영국(1820원), 수도운영에 민간기업이 참여하는 프랑스(1579원)보다 3배 정도 싸다. 이것이 민영화의 실상이다.

볼리비아는 98년 세계은행(IBRD)으로부터 수도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차관을 받는 대가로 사업을 민간기업에 팔기로 했다. 이후 3대 도시 중 하나인 코차밤바시의 수도서비스 부문을 99년 미국 벡텔이 구성한 컨소시엄에 넘겼다. 그러나 민영화 직후인 2000년 1월 수도요금이 35% 올랐다. 요금은 인상과 함께 제한급수가 풀리자 물 사용량은 늘었다. 일부는 소득의 3분의 1을 물값으로 써야 했다. 결국 2003년 대통령은 하야했고, 2004년 벡텔과의 계약은 취소됐다. 볼리비아뿐 아니라 수도 운영을 민영화하거나, 민간기업을 참여시킨 영국·프랑스·이탈리아·아르헨티나·우루과이·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도 각종 문제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물 관리를 민간에게 맡겨도 물값이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수자원공사 관계자는 “민간기업의 수자원 관리는 투자는 저조한 반면 운영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물값을 인상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수도 관리를 완전히 민영화한 영국에서는 재작년부터 공공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의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높다. 지난 1월15일 ‘제5차 공공기관 선진화 추진계획’을 통해 공공기관 출자회사에 대한 대대적인 매각과 청산, 통·폐합 방침을 밝힐 정도다.

민간기업은 항상 효율적이다?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한편에서는 공기업 민영화를 주장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공기업의 역할을 강화하는 모순적 행동을 하고 있다. 정부가 주공과 합치기로 한 한국토지공사와 민영화하기로 한 대한주택보증이 건설업체 살리기에 나서는 게 대표적 사례다. 토공은 정부의 10·21 건설대책에 따라 주택건설업체가 보유한 토지를 사주고 있다. 주택보증은 지방의 미분양주택을 매입하고 있다. 유동성 위기를 맞은 건설업체를 지원한다는 이유였다. 토지공사와 주택보증이 투입할 자금 7조원 규모는 10·21 대책으로 정부가 투입할 자금 9조2000억원의 76%에 해당한다.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 개혁 능력이 있다?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 개혁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토공 부채는 34조원 정도이고 주공 부채가 52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통합 후 2010년부터 영업이익으로도 이자를 갚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는 분석도 나왔다. 또 통합공사가 발행해야 할 채권 규모는 매년 20조원 이상인데, 이는 전체 공사채 발행 규모(35조원)의 절반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지공사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누가 이렇게 부실한 공기업의 채권을 사려고 하겠습니까. 통합을 하더라도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구조조정이 선행되고, 통합된 조직원들이 화합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추진해야 합니다. 일단 통합부터 시키겠다는 것은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참여정부 때 전력산업구조개편을 위해 조직된 공동연구단에 중립 인사로 참여했던 중앙대 이병훈 교수는 “당시 정부는 연구단에 노조 측 인사도 정부 측 인원과 동수로 참여시켜 배전분할에 대한 설득과 이해의 폭을 넓히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참여 주체들의 합의는 도출하지 못했지만, 연구단의 결과를 수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기업 민영화와 같은 사회적 합의나 중요한 사항은 일방적으로 추진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박재현기자 parkjh@kyunghyang.com>


 

입력 : 2009-03-26 17:40:41수정 : 2009-03-27 09:31:38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모든 규제를 惡으로 치부…‘새로운 신앙’으로 부상

ㆍ2부 - (8) 폭주 기관차에 올라탄 한국…새로운 우상 : 규제 완화

김대중 정부는 1999년 1월 아파트 분양가 규제조치를 전면 해제했다. 전국의 모든 아파트의 분양가는 건설사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시중 여유자금을 주택시장에 흘러들게 해 수요를 늘려 경기부양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해 3월에는 수도권 분양권 전매 규제도 풀었다. 소형주택 의무건설비율, 재당첨 금지제한 기간도 사라졌다. 1가구 2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도 일시 면제했다.

정부는 이런 조치로 아파트 물량공급이 늘어나 장기적으로 주택시장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그해 여름부터 서울 강남과 분당신도시 등을 중심으로 전셋값이 급등했다. 많은 지역에서 아파트 매매·전셋값이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올랐다. 98년 이전 3.3㎡당 500만~600만원인 분양가는 2003년 1000만원(1129만원)을 넘어섰고, 매년 10% 안팎 올랐다. 지방에도 3.3㎡당 3000만원대 아파트가 등장했다. 분양가 상승은 주변집 값을 올렸고, 이는 다시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분양권 전매제한이 사라지면서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세력은 모델하우스로 몰렸다. 그러는 동안 평생 내집마련이 꿈이었던 서민들의 한숨은 깊어갔다.

김헌동 경실련 아파트값거품빼기운동본부장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시민단체 활동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98년부터 여유시간을 활용해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그는 2000년 전업 활동가로 변신했다. 김 본부장은 건설회사에 근무했던 지식과 경험으로 분양가 거품 구조를 밝히고, 분양원가 공개 운동을 전개했다. 시민사회의 요구가 커지고 집값 폭등이 계속되자 노무현 정부는 2007년 11월부터 민간택지에도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경기가 침체되자 이명박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이를 폐지하기로 했다.

신앙이 된 규제 완화

전국민을 신용불량자로 만들 뻔했던 김대중 정부의 카드사태 역시 규제완화가 부른 후폭풍이었다. 신용카드사에 대출업무를 허용하고, 현금서비스 비중 등의 제한이 풀리면서 카드사들은 길거리 카드모집에 나섰고 학생과 실업자들도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한 대형 카드회사 관계자는 “금융기관도 수익을 쫓는 기업이기 때문에 고삐를 풀어놓으면 시장질서가 혼탁해지기 쉽다. 일정부분 감독과 통제가 필요하다”면서 “현금서비스 한도를 없앤 이후 무분별한 대출을 억제할 수 있는 보완장치가 뒤따라야 했다”고 말했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규제완화는 이제 신앙이 됐다.”(세종대 김수현 교수) 그 이유는 뭘까. “공장의 신·증설이나 투자기회를 규제 때문에 놓치는 경우가 많다. 기업 활동을 저해하는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해 시장기능을 활성화시키고 기업간 경쟁을 촉진시키는 것은 사회전체적인 이익으로 돌아온다”(대한상의 규제개혁단 관계자)는 게 주요한 이유다. 특히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규제완화가 더욱 필요하다고 한다.

규제완화는 더 큰 규제완화를 초래

이런 탈규제 논리에 따르면, 규제완화의 결과로 기업 활동이 증진되고 투자가 일어나야 한다. 기업에 대한 각종 혜택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까지 가해진다면 분명 눈에 띄는 성과가 나와야 한다. 기업도시 정책을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2004년 말 노무현 정부의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은 기자실에 들러 이례적인 조치를 발표했다. 강 장관은 “기업도시는 기업이 주축이 되는 사업인 만큼 기업도시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제정할 때 기업의 실무자들을 대거 참여시켜 업계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기업도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는 했지만 정부가 법안 제정 과정에 기업 관계자들을 참여시키기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기업도시는 계속 하락하고 있는 국가잠재성장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도입됐다. 전경련은 지역 개발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이 생산시설을 중심으로 연구·개발센터와 주거 등을 종합적으로 건설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규제완화와 세제지원책을 내놓는 등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본 도요타시 등 해외 성공사례가 대대적으로 홍보됐다.

이를 위해 정부의 고유한 토지수용권을 민간 기업에도 허용하는 등 기업도시에 쏟아붓는 열정은 대단했다. 토지수용권이란 개인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재산을 강제로 수용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에 민간이 이를 행사하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었다. 이런 특혜 속에 2005년 7월 충남 태안 등 전국 6개 지역이 기업도시 시범지구로 지정됐지만, 현재까지 기업도시 건설은 지지부진하다. 무주 기업도시는 사업자인 대한전선이 투자연기로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고, 전남 영암·해남기업도시도 개발계획 승인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전경련은 “기업도시 인프라에 대한 정부지원 미흡과 개발비용 증가 때문에 기업도시 추진이 지지부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공공성을 해칠 정도의 무리한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없다”며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이 사례는 정부의 규제완화와 지원이 반드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규제완화는 더 큰 규제완화를 요구한다는 악순환의 논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규제완화는 善? 좋은 규제가 있어야

기업이 원하는 규제 완화는 어느 수준일까. 이명박 정부 출범 두 달 뒤인 지난해 4월 전경련 등 경제 5단체는 지식경제부에 규제개혁 과제 267건을 제출했다. 지식경제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퇴직금과 적극적 고용조치 제도를 없애고, 고령자와 장애인 고용의무 및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이 주였다. 산재유해요인 조사, 사업주 벌칙조항 완화 등 산업재해를 막는 장치도 풀 것으로 요구했다. 육아휴직에 대한 거부권 및 직장 보육시설 설치 의무 완화도 요구했다.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벌칙 규정도 풀라고 했다.

만일 재계가 요구한 규제완화가 모두 이뤄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미 외환위기 이후 기업규제 완화라는 명분으로 각종 산업안전규정을 완화시킨 바 있다. 그 결과 98년 0.68%까지 떨어졌던 산업재해율이 2007년 0.72%로 다시 증가했다. 기업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증권선물거래소 분석결과 546개 상장기업이 내부에 쌓아둔 현금성 자산은 2007년 말 현재 약 63조원으로 1년 전보다 20%나 늘어났다. 이 중 10대 그룹이 쌓아둔 돈이 33조5000억원으로 절반을 넘는다. 500명 이상 기업 소속 노동자 수는 93년 210만명에서 2005년 131만명으로 줄어든 반면, 정규직 임금의 절반 정도를 받는 비정규직은 전체 임금노동자의 56% 규모로 커졌다. 대기업의 투자가 고용 창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은행 조사국 한성훈 과장은 “제조업의 경우 규제완화의 효과가 서비스업보다는 높지 않다”면서 “제조업의 효율성은 연구개발(R&D)이 크게 좌우한다”고 말했다. 규제의 특성과 산업별 모형을 토대로 ‘규제완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이란 보고서를 낸 그는 규제를 10%만 완화해도 0.3%포인트의 총요소생산성이 증대하는 등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규제는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로 나뉠 수 있습니다. 규제는 환경·노동 등 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한 ‘사회적 규제’, 경제활동의 진입과 가격 등에 개입하는 ‘경제적 규제’, 행정일반을 다룬 ‘행정적 규제’로 나뉩니다. 규제의 강도는 사회적 규제보다는 경제적 규제가 훨씬 셉니다. 또 사회적 규제는 기업의 편의 때문에 훼손될 수 있는 소비자나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바람직한 규제’라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규제완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적 규제에 초점을 맞춰야 해요.”

규제완화의 혜택은 부자들에게만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경제적 규제 완화뿐 아니라 사회적 규제 완화까지 전방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거나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을 위한 금산분리 완화도 추진되고 있다. 분양가상한제 폐지,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3구의 투기지역 해제, 재건축시 소형·임대주택 의무건설 완화 등 ‘부동산 핵심 3대 규제’도 조만간 폐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부동산 규제는 투기를 막고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부동산 규제를 경기활성화의 장애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규제완화의 혜택은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서민이 아니라 부동산 부자와 건설업체들이 독차지한다는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정부가 추진한 종합부동산세와 고가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 감면 등의 혜택도 서민들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경실련 윤순철 시민감시국장)

94년 그룹의 신격호 회장 구상으로 추진됐으나 국방부 등의 반대로 무산됐던 ‘제2 롯데월드’ 신축 허가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수도권 차원에서는 성장의 문제이지만, 지방에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점에서 수혜자와 피해자의 격차는 심각하다.

“수도권 규제는 어느 정부에서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위기가 확산되는 시기여서 기업들의 투자가 급속도로 냉각된 상태였기 때문에 규제완화가 힘이 될 것이라고 봤죠. 특히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5+2 광역경제권’이란 균형발전의 틀을 제시했고, 지난해 7월과 9월 연이어 지방발전 대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10월30일 수도권 규제완화 조치가 발표되더라도 충분히 지방의 이해와 설득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의 반발은 예상 외로 강했습니다. 이에 정부도 새로운 지방발전 구상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국토해양부 관계자)

신자유주의 성공 위해서도 규제는 필요

본래 법률과 제도를 통한 규제는 시장의 자율에 맡길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독·과점 현상을 막고, 소수만 혜택을 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은 거대한 독과점 재벌의 사익을 늘리기 위해 진입장벽을 치는 수단으로 규제를 이용했다. 행정당국의 편의주의적 발상에 따른 이런 규제는 당연히 비효율성을 낳았다. 규제개혁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바로 이런 부문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런 권위주의 정권의 잘못된 규제를 빌미로 모든 규제를 악으로 치부하며 ‘무조건 규제완화’를 주장하고 있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은 “일정한 규제와 룰을 만들어주는 게 오히려 시장의 안정을 높인다”고 말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실현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아이러니하지만 규제는 필요하다.

<박재현기자 parkjh@kyunghyang.com>


 

입력 : 2009-03-26 17:44:16수정 : 2009-03-27 09:31:20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민주주의에 균열 생기면, 갈등은 거리로 분출

ㆍ2부-폭주 기관차에 올라탄 한국 (9) 아담 쉐보르스키에게 듣는다

‘민주주의는 왜 시장의 난폭한 질주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나.’ 이런 의문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시장의 실패를 목격하고도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미국의 저명한 민주주의 이론가인 아담 쉐보르스키 뉴욕대 교수와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핵심축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시장)와 민주주의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어떤 문제를 암시하고 있는가.

“돈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거나 거대기업이 정치를 점령했을 때 민주주의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번 위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규제의 실패는 규제를 받아야 할 산업들이 오히려 규제기관들을 점령한 데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각종 권위주의 체제들이 퇴조하고 민주화의 물결이 휩쓸었다. 거의 동시적으로 사회주의, 케인스주의, 발전국가가 퇴조하고 시장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왔다. 이중적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였다. 결과적으로 이 두 개의 물결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맺기보다는 충돌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대체로 미국과 영국 정부,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이 상호 조율된 정치적 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러 국가가 친시장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이런 정책들이 실제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은 매우 인기가 없다는 것이 판명됐고, 대중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주주의는 시장이 작동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해주고, 시장의 사회적 영향을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오늘날 시장의 실패는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시장을 조절하고 그것의 파괴적 영향력을 완화시키는 데 무기력했기 때문 아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정치 체제들은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미국에서 실패했을 뿐이다. 더구나 위기를 심화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는 국제적 차원에서 실질적 규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국제적 차원은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주의가 시장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가.

“민주주의시스템은 로비, 정치자금 모금, (규제대상의) 규제기관 점령 등 돈이 정치에 접근하는 것을 좀더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투명성 또한 매우 중요한데 오늘날은 정보기술의 발달로 투명성을 확보하기가 과거보다 쉬워졌다.”

-당신은 민주주의를 ‘경쟁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제도화된 정치체제’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주로 선거경쟁의 제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최소강령적 민주주의론으로는 시장주의의 범람에서 발생하는 사회양극화 문제와 사회양극화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시민권의 황폐화 문제에 대처하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민주주의는 규칙에 따라 갈등하는 메커니즘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결론에 도달하고 이 결론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구조에 불과하다. 규칙이 중요하긴 하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결과물은 투입물에 의존한다. 한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제도적인 통로로 흡수되고 이러한 갈등들이 규칙에 따라 전개될 때 민주주의는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경제적 평등이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인가 아닌가는 정치적으로 조직된 집단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적 혹은 경제적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민주적 제도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행 이후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연속해서 일어났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더욱 공고화되는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거경쟁에서 승리한 한국의 현 정부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사회갈등을 더욱 격화시킨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당신이 펼쳐온 절차적 민주주의론의 맹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아니다. 그것은 절차가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좋은 절차는 갈등을 제도적인 경쟁의 장 안에 머물게 하고 민주적 과정을 거쳐 도달한 결정에 대한 순응을 만들어 낸다. 갈등이 거리로 분출한다는 것은 제도적 시스템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정부가 임의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면 민주적 제도들은 약화된다.”

-2008년 봄 한국에서는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에 항의해 100만명 이상의 군중이 동시에 촛불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행동은 매우 평화적이고, 이성적이었다. 그리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도출해 나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직접 참여의 강화는 민주주의를 더욱 증대시킬 수 있는 대안인가.

“그것은 나를 포함한 정치학자들이 아직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슈라고 생각한다. 정당하게 선출된 정부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면 우리가 그 결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정부는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올 때마다 자신의 결정을 바꿔야 하는가? 나는 정부가 나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하지만 초점은 나쁜 결정이라 할지라도 적법하게 내려졌다면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되는가이다. 결국 민주주의하에서 우리는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교체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이다.”

-여러 학자가 현대 민주주의의 기능부전은 정당정치의 쇠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은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다. 정당의 기능은 대표와 대변인데, 정당의 이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시장에 대한 합리적 규제는 더욱 더 어려워진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대의기제인 정당의 쇠퇴가 현대 민주주의 약화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정당이 시민·사회운동이나 비정부기구 혹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의 핵심적 제도는 선거다. 선거는 어떤 사람들이 지배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또한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우리가 정책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평등한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갈등은 선거에서 경쟁하는 조직들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이 조직이 바로 정당이다. 해법은 정당을 강화시키는 것이어야지 이들을 대체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가. 버락 오바마의 당선으로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으로 보는가.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앞서 한 가지를 언급했다. 바로 규제시스템이 (규제를 받아야 할 주체들에 의해) 점령됐다는 점이다. 투자, 고용, 사회 서비스에서 국가 역할의 한계와 공적 제도의 약화도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나는 버락 오바마 정부에 대해선 매우 긍정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가 역할의 근본적 개혁에 대한 신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위기는 이러한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구상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경제발전모형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식 자본주의, 유럽식 자본주의, 동아시아형(일본식) 자본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번 경제위기사태로 유럽식 혹은 일본식 자본주의 모형이 우월한 대안으로 각광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앞서 규제에 관한 국가의 역할, 공공 서비스, 투자조정의 확대를 통해 미국 경제가 개혁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암시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은 유럽과 일본 모델에 근접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과 일본 모델도 자체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은 더 많은 (사회)보장을 제공하고 경기순환을 완화하는 데에는 유능하지만 사적 영역의 비효율성을 보호할 뿐 아니라 혁신을 증진시키기 위한 역동성이 부족하다. 우리는 경제적 보장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사적 영역의 혁신을 독려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나 슘페터적인 ‘창조적 파괴’는 (사회)보장을 허물기 때문에 둘을 조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도 현재의 위기는 우리를 더 나은 해결책으로 인도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좌파에게는 정돈된 개혁 아젠다가 없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모든 케인스주의적 조치들이 자본주의의 구조를 개혁하기보다는 과거의 모습만 복원하는 데 그친다면 위험하다.”


△아담 쉐보르스키 교수
아담 쉐보르스키 뉴욕대 교수(69)는 민주주의의 본질, 민주화 이행의 조건, 민주주의와 시장의 관계 등에 관한 중요저작들을 발표한 저명한 정치학자로서 국내 학계에서도 흔히 인용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와 경제>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등이 국내에 소개돼 있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가 인터뷰를 주선했으며, 고원 상지대 학술연구교수가 인터뷰 질문 구성에 도움을 주었다.


< 2부 끝>

<김재중기자 hermes@kyunghyang.com>


 

입력 : 2009-03-29 17:32:41수정 : 2009-03-30 11:22:27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영리병원의 목적은 이윤 창출

ㆍ이명박 정부 ‘의료 선진화’ 논리의 허구성
ㆍ인력 줄여 의료서비스 질 저하

한국 정부는 지난 3월13일 ‘의료서비스산업 선진화를 위한 토론회’를 열고 의료 민영화 재추진 의사를 명확히 했다. 의료 민영화는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하나는 현재 비영리인 병원을 주식회사형의 영리병원으로 전환하는 것, 다른 하나는 현재 건강보험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는 민간의료보험의 역할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다.

정부가 의료 민영화의 추진 명분으로 삼고 있는 논리는 의료기관에 대한 민간투자 활성화 및 고용창출, 경쟁을 통한 의료서비스의 질 개선, 해외원정 진료 감소 및 해외환자 유치와 의료비 절감 등이다. ‘삽질’ 말고는 달리 새로운 투자처를 찾지 못한 이 정부에 병원은 좋은 투자처로 보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병원은 모두 ‘비영리’이다. 많은 병원이 ‘돈벌이’를 하고 있는데 이를 ‘비영리’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여기서 영리성을 나누는 기준은 영리적 행위 여부가 아니라, 발생한 이윤을 병원의 외부로 유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병원은 돈을 벌 수는 있지만 이를 외부로 가지고 갈 수는 없고, 병원에 재투자를 해야 한다. 영리병원이 되면 외부 자본이 이윤을 목적으로 투자될 수 있고, 병원은 환자의 건강보다는 투자자의 이윤 창출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는 것이다.

미국을 보자. 병원의 응급실 기능은 지역사회 건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미국 영리병원은 이윤이 남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경우 응급실을 닫기도 한다.

영리병원이 된다고 고용이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줄어들 가능성이 더 높다. 영리병원은 기본적으로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지출을 최소화하려 한다. 병원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인건비이기 때문에 인건비를 줄이지 않고는 지출을 줄일 수 없다. 실제 미국 비영리병원의 100병상 당 의료인력은 522명으로 영리병원의 352명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영리병원은 특히 진료와 관련된 인력(간호사, 의사 등)을 줄이기 때문에 이는 의료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 영리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의 질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미국의 영리병원과 비영리병원의 질에 관한 연구를 종합한 한 연구에 의하면 영리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비영리병원에 입원한 환자에 비해 사망률이 2% 더 높았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영리기관에서 인공신장투석을 받는 만성신부전 환자의 사망률이 비영리기관에 비해 20%가 높았다. 영리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의 질이 나쁘다는 연구 결과는 이외에도 수 없이 많다.

영리병원 도입으로 해외로 유출되는 진료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부가 추산한 해외의료비 적자는 약 6000만달러(당시 기준 665억원)이다. 이는 국민의료비 54.5조원의 약 0.12%에 불과하다. 더구나 해외원정의료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정출산이나 부유층의 해외 의료 이용이 영리병원 도입으로 크게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 정부의 주장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의료 민영화로 의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의료기관간 경쟁이 심해지면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일반론만 되뇌고 있다. 환자가 병에 걸리면 환자가 아닌 의사가 환자의 대리인으로 의료서비스의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병원간 경쟁이 심하다고 가격이 내려가지는 않는다. 영리병원은 멋있는 인테리어 등으로 환자를 ‘유인’해서 높은 진료비를 물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영리병원 도입은 악화되고 있는 건강 불평등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 영리병원의 높은 진료비 부담은 저소득층 환자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심각한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의료 민영화의 다른 한 축인 민간 의료보험 활성화는 어떤 영향을 줄까. 현재 민간 의료보험의 건강보장의 핵심적 역할을 하는 미국은 전 국민의 16%인 4700만명이 건강보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은 전국민건강보험을 가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민간보험의 역할을 대폭 확대해서 현재의 건강보험을 대체하도록 하면, 건강보험은 현재보다 대폭 축소될 것이며 일부 저소득층은 ‘실질적으로’ 건강보장을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민간보험은 환자진료에 필요한 진료비(민간보험회사는 이를 ‘의료적 손실’이라고 한다)는 가능한 한 줄이지만 행정비용은 훨씬 더 많이 지출한다. 캐나다 공공 의료보험인 메디케어는 가입자 1만명당 직원이 1.2명인 데 비해 미국 최대 민간보험사인 에트나는 20배인 20.8명에 달한다.

의료 민영화는 국가경제에도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최근 거의 부도 상태에 빠진 GM 자동차가 경쟁력을 상실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직원과 은퇴자에 대한 과도한 의료비 부담 때문이다. 미국 GM의 경우 자동차 1대를 만드는 데 1525달러를 지출하는 데 비해 캐나다 GM은 187달러, 일본 도요타는 97달러를 지출했을 뿐이다.

주식회사형 영리병원 허용과 민간 의료보험 활성화는 의료부문을 자본의 ‘놀이터’로 만들 것이다. 이제 병원은 국민의 건강이 아닌 투자자의 이윤 극대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본은 의료정책의 결정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할 것이며 이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취약계층의 접근성 축소와 건강 불평등의 심화로 나타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정책변화가 한 번 이루어지면 뒤로 무를 수 없다는 데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다시 건강보험체제로 돌아올 수 없다. 경제자유구역에는 래칫조항(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이 적용되고, 그 외의 지역에는 투자자국가제소조항이 기다리고 있다.

의료서비스의 선진화는 의료 민영화로 달성할 수 없다. 의료기관에 대한 공적 자본 투입 확대,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와 함께 의료기관의 역할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올바른 대안이다.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을 확대하거나(예를 들어 보건소 방문간호 서비스 확대 등) 민간의료기관의 공공적 역할에 대해 정부의 지원을 강화하면(보호자 없는 병원에 대한 재정 지원 등) 질 좋은 일자리를 훨씬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정부는 의료를 시장에 맡기면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홍준 울산대의대 교수>


 

입력 : 2009-04-02 18:01:33수정 : 2009-04-02 18:01:33


CopyrightⓒThe Kyunghyang Shinmu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