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淸山 윤영근의 십승지(十勝地)와 가거지(可居地) 56.세계자연유산에 오른 환상의 섬 (3)왕방 갑서 백록담 |
입력시간 : 2011. 11.14.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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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개 기생화산 껴안은 생태 보고
구상나무 한국인 강한 의지 상징
사계절 내내 꽃피는 이국적 정취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삼대명산은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을 말하며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1천950m)은 바다와 어울린 최고봉이다. 산이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기후로 하루 중에도 사계절을 경험하게 되는 바닷가 특유의 날씨를 보여주는 곳이다.
제주도의 중앙에 솟아있는 산,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현무암으로 아무리 많은 비가와도 한순간에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는 섬, 제주도 전체가 한라산 하나로 되어있는 편이다. 삿갓모양의 한라산 자락이 바다에 닿았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며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한 곳에 나무들이 자리한 산이다.
한라산의 줄기가 동서로 뻗어 있는 반면 서귀포의 남쪽은 경사가 급하고 제주시의 북쪽은 원만하다.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은 내륙지방의 다른 산들처럼 복잡한 능선은 없다. 368개의 기생화산들이 능선의 여기저기에 솟아있어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면서 사람들을 어머니 젖가슴 같은 몽실한 오름 위로 끌어들인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열고 쳐다본 하늘은 맑고 등산하기에 적당하다. 가장 긴 등산 코스인 성판악(해발 750m)에서 출발하면 백록담을 돌아 관음사로 하산까지 8시간의 장거리 겨울산행을 하기 위해서다. 아직은 주변이 어둡고 초행길이라 두려운 마음도 있었으나 성판악 휴게소에는 많은 산행 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한라산은 천연기념물(제182호)으로 지정해서 학술연구자원, 생물다양성의 보존을 도모한다고 한다. 천연보호 구역은 보호할 만한 천연기념물이 많은 한라산에서 해발 800~1천300m 이상의 구역을 대표지역으로 정해서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한라산은 껴안고 있는 368개의 기생화산이 있어서 특이한 경관과 생물상을 가지고 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오름이라고 부른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분화구는 독특한 모습으로 흥미의 대상이다. 한라산은 얼마 전부터 백록담을 중심으로 분화구에 균열이 생겨 물이 빠지고 계속적인 토양 침식이 일어났다. 그래서 백록담까지의 모든 등산로를 폐쇄시켰다고 한다. 단지 겨울철 눈이 쌓일 때만 정상까지의 산행을 허용한다고 한다.
특히 한라산은 우리나라 특산 식물인 구상나무를 비롯하여 정상부근의 고산 초원지대나 암벽지대에 복수초, 구름떡쑥, 참꽃나무 등 다양하고 보기 어려운 식물이 분포하고 있는 한국제일의 생물자원의 보물창고와 같은 산이다.
한라산은 천연기념물이며 그 안에 천연보호구역을 정해서 고도에 따른 다양한 식물의 모든 종을 포괄해서 보호해야만 한다. 한라산 천연보호 구역 안에는 많은 식물종이 자생하고 있고 명확한 생태계가 존재하여 글자그대로 생물 다양성이 매우 높은 곳으로 마땅히 충실한 보호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북위 33도라는 지리적 위치와 근해에 난류가 흐르는 관계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따뜻하고 유일하게 열대성 식물이 자생하는 지역으로 사계절 내내 꽃이 피기 때문에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도 한라산이다.
해발 1천100m 지점에서부터는 백록담까지 4.8k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반갑기만 하다. 정확하게 절반은 온 것이다. 여태까지는 보이지 않던 눈이 쌓여 있었다. 역시 한라산은 남한 제일의 높은 산이 분명했다.
보기 흉한 철거건물을 지나자 사라악 대피소가 보였다. 시야가 터진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나는 물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망망대해 가운데에 자리한 삼각추 같은 한라산은 어찌나 바람이 심한지 앉아있는 잠깐 사이인데도 땀이 식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변덕스런 날씨의 조화라 하겠다. 해발 1천300m 지점에 이르자 눈이 등산화 속에까지 들어왔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구상나무들에는 굵은 고드름이 아이스크림처럼 길게 매달려 있었다. '살아 천년 죽어 백년'이라는 고사목(枯死木)에는 눈이 붙어 있지 않았다.
가지에 잎이 없어서 눈이 내려앉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회색인 듯 흰색의 고사목들이 처연하다 못해 슬픔이 넘치는 듯 외롭기 그지없었다.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 땅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으로 교목침엽수로 언제나 진초록의 푸른 잎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해 준다.
잎의 뒷면은 은빛을 띠며, 비비면 소나무 간 솔에서 나는 것 같은 싱그러운 향이 난다. 계곡 양쪽으로 빼곡히 자리한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데가 이곳이다. 한라산에 자리한 구상나무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서 옆으로 퍼지며 자란다고 한다. 그렇지만 겨울철에 쌓인 눈의 무게를 이겨내야 살아남는다.
추운 겨울!
오늘 대한(大寒)날씨에 본 구상나무는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이 녹색의 식물이 아닌 거대한 암벽을 보는 것 같았다. 녹다 만 물기가 가지에 고드름을 만들고, 줄기의 설화로 용케 버티며 서 있는 구상나무가 한국인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을 ‘수빙’이라고 하는데 한라산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경관이라 하겠다.
사라대피소를 지나자 온 세상이 눈뿐이다. 보이는 건 오직 눈, 눈, 눈! 성판악에서는 전혀 없던 눈이 잔뜩 쌓여 있음은 일부러 심술부린 요술 같았다. 겨울철에 쌓인 눈은 5월이 되어야 모두 녹는다고 한다. 제주도가 자랑하는 녹담 만설로써 더운 열대지방의 관광객들이 와서 보면 탄성을 지르며 즐겨한다고 해서 한라산 눈꽃축제 테마관광 상품으로 효자노릇을 한다하니 제주인들의 긍지라 할만하다.
이 지역에서 보이는 모든 나무들의 모습은 눈에 덮여 신비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태평양 가운데 홀로선 한라산의 심한 기후변화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어느 틈에는 눈이 내려 나뭇가지마다 얼음 꽃이 피어올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라산의 수빙 현상은 강한 바람과 함께 실려 온 습기가 나뭇가지나 잎에 얼어붙고 녹으면서 만들어진다. 얼었다 녹았다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점점 커지고 기묘한 모습의 괴물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얼음괴물 또는 ‘Snow Monster’ 라고 한다.
항상 세차게 부는 매서운 북서풍과 영하의 날씨 속에서 수빙은 만들어진다. 바람의 힘에 의해 눈의 입자들이 가지나 잎에 붙는다. 나뭇잎은 가늘고 가운데의 틈새로 눈이 쌓여서 안성맞춤이다. 잎에 부착된 눈에 또 다시 눈이 붙는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나무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이 얼어붙은 조각품만 남게 된다. 조각 작품의 뼈대에 진흙 대신 언 눈을 붙인 소조인 셈이다.
길이 가파른 곳에는 밧줄로 울타리를 했고 가운데에는 연줄처럼 가느다란 줄이 매어있었다.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볍게 줄을 잡고 상체의 체중을 줄에 실으면 안심이 된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 나는 모자를 벗었더니 훨씬 더 편했다. 눈길에서는 보폭을 좁혀야 한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갈 때는 발바닥을 옆으로 놓으며 가제처럼 걸어야 넘어지지 않는다.
진달래 밭 대피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아침 겸 점심으로 컵 라면을 먹었다. 진한 국물이 꿀맛이다. 한라산에서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휴지통을 찾아 볼 수 없다. 자기가 생산한 쓰레기는 각자의 배낭에 담고 가서 버려야 한다.
매점의 TV가 시끄러웠다. 독립형 태양광 발전시스템 덕분이다. 산업 자원부에서는 대체에너지 이용시설과 관련기술의 국민홍보 및 보급촉진을 위하여 이곳에 발전기를 가설했다고 한다. 진달래 밭 대피소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기는 태양 전지를 이용하여 햇빛을 전기로 전환하는 장치로, 거대한 집열판이 매점 뒷마당에 가득했다. 눈길에 지친 나는 매실주 한잔이 간절했으나 푹푹 빠지는 눈 때문에 안전이 두려워 참아야만 했다.
원래 등산이란 심판 없는 스포츠이다. 오직 자신과의 인내력한계를 극복하는 게임이다. 한 발짝만 헛디뎌도 만사가 끝장이다. 라면을 먹는 사이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며 사방을 덮어버린 운해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던 뭉게구름 떼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못 믿을 날씨다. 하루에도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한라산을 흔히 ‘천의 얼굴을 가진 산’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오늘 같은 날을 두고 한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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