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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카페] 5. 하늘을 우러른 ‘완전한 열정’

ngo2002 2011. 8. 29. 09:12

[이정우의 철학카페] 5. 하늘을 우러른 ‘완전한 열정’

                                                                                 한겨레21 / 2001년 11월 21일 제385호

 


이정우의 철학카페 5|고딕 성당과 스콜라 철학

신의 영광 드러내려 안정감 추구… 존재론적 위계 구조에 따른 사유 반영

      한 시대 문화의 다양한 계열들은 서로 동형(同形)을 이룬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한 시대, 한 문화의 건축, 음악, 철학, 정치, 종교, 윤리, 문학 등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먼 훗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전경(全景)이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것이다. 역사의 다양한 계열들을 밀접하게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어느 한 계열만을 집중해 보다가 다른 계열을 보게 될 때, 때로 우리는 예기치 못했던 연관성과 동형성을 깨닫고서 깜짝 놀라곤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역사의 한 계열만 배타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서구 건축사의 영광된 세기

     건축과 철학 역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동형을 이뤄왔다. 개념을 다루는 철학과 물체들을 다루는 건축은 서로 전혀 다른 작업 유형에 속하지만, 그들을 떠받치는 사유 자체의 측면에서 서로 교차하는 것이다. 가장 추상적이고 납嶽岵?철학적 사유와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건축적 사유 사이에서 성립하는 연관성을 읽어내는 것은 한 시대, 한 문화의 정신 구조를 읽어내는 데 필수적이다.

      스콜라 철학의 최전성기인 13세기는 서구 건축의 역사에서도 영광된 세기였다. 고딕 성당과 스콜라 철학은 손을 맞잡고 신의 영광을 노래했다. 스콜라 철학의 성격을 그 누구보다 잘 보여주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지배했던 하나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고대 철학의 세 가지 핵심 유산(플라톤의 이상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 플로티노스의 신비주의)을 거대한 사유체계 속에 완벽하게 융해해 사유의 역사에서 가장 종합적인 철학들 중 하나를 건설했다.

    사진 / 중세적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 건축물

             아미앵 대성당의 평면도.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사물들을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로 본다. 질료를 떠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천사들과 신뿐이다. 질료와 형상은 존재의 누층적(累層的) 위계를 형성한다. 제일 질료에 일정한 형상이 부여되면 물, 불, 공기, 흙이 나온다. 이들에 다시 일정한 형상이 부여되면 나무, 쇠, 뼈, 동 등이 나온다. 이렇게 질료에 일정한 형상이 부여되어 좀더 높은 층위의 존재가 나오는 과정이 누층적 위계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의 한 층위에서 한 사물은 그보다 낮은 층위의 사물에 비해서는 일정한 형상을 더 가지고 있고, 그보다 높은 층위의 사물에 대해서는 질료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위계(hierarchy)구조가 중세 전체를 지배한 사유 구조였다. 질료가 덜 할수록 고급한 존재이고, 따라서 천사들과 신은 질료를 완전히 떨어버린 존재로 표상되었다. 이기론(理氣論)의 사유와 매우 비슷하다.

     아래 층위의 사물은 위 층위의 사물에 대해 질료 역할을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아래 층위의 사물은 위 층위의 사물에 대해 가능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책상이 될 수 있는 기능태로서 존재하며, 책상은 나무의 가능태가 현실화된 것이다. 따라서 질료-형상의 위계는 가능태-현실태의 위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최하위에서 최상위까지 완벽한 정돈

    위계의 위로 올라갈수록 좀더 많은 형상이 부여된 사물들을 만나게 된다. 중세의 철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존재의 양’, ‘실재의 양’ 같은 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양(量)은 정도(degree)를 뜻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이 개념을 좀더 일상적인 말로 하면 ‘완전도’(完全度) 즉 완전성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있어, 나아가 17세기 철학에 이르기까지도 ‘완전함’(perfection)이라는 개념은 핵심 역할을 했다. 존재의 위계에서 더 높은 층위에 위치한다는 것은 곧 더 큰 완전도를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존재론적 구도는 중세 새회(?)의 구도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하위의 존재가 상위의 존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곧 목적론적 사유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되었다.

       사진 / 아미앵 대성당의 내부.

       고딕 성당은 총체성을 추구했다. 즉, 최하위의 질료에서부터 최상위의 신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전 위계를 완벽하게 정돈하고자 했던 스콜라 철학처럼 고딕 성당 역시 다른 어떤 신대에 비해서도 두드러진 안정감을 추구했다.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각 부분들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자동차 부품이 모두 제자리에 있을 때 차는 안전하게 굴러간다. 그래서 고딕 성당은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모든 지식들을 건물의 각 자리에 위치시키고자 했으며 자리를 잡지 못하는 대상들은 철저히 배제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실리카면과 중앙면은 탁월한 평형을 이루게 된다(‘바실리카’라는 말이 ‘장대한’, ‘장려한’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시사적이다). 지하 예배당, 갤러리, 망루 등 이런 평형을 깰 수 있는 요소들은 배제되었다. 오직 파사드만이 예외로 남았다.

      1088년에서 1120년 사이에 걸쳐 건설된 클루니 수도원의 제3성당이나 1220년에 기공된 아미앵 대성당은 이런 중세적 구조를 잘 보여준다(그림 평면도 참조).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은 긴 장방형꼴을 기본으로 중앙홀의 높이가 측당(側堂)의 높이를 훨씬 추월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이것은 단일한 중앙홀을 가진 성당들이나 중앙홀과 측당의 높이가 같은 성당들과 대조적이며, 스콜라적 사유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서로 상동(相同)의 관계를 형성하는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또 이 전체-부분들이 다시 모여 전체를 이루는 과정이 계속되는 하나의 체계에 입각한 조직화를 꿈꾸었다. 현대의 프락탈 구조를 상기시키는 면이 있다. 즉, 하나의 구조가 그 아래 계속 유사한 하부 구조를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고딕 성당은 로마의 건축물과 대비된다. 로마 건축물에서는 하나의 건물에 다양한 궁륭(穹륭-쪽자 참조)이 공존하곤 했다. 서구에서 유래한 궁륭들과 동방에서 유래한 궁륭들이 혼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딕 성당에서는 첨두형(尖頭型) 궁륭이 균일하게 배치되곤 했으며, 그래서 후진, 방사상 샤펠, 회랑 등의 궁륭들은 그 원리에 있어 중앙홀이나 수랑(袖廊)의 궁륭들과 원리상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거대한 건조물이 종말을 맞이한 까닭

      스콜라 철학과 고딕 성당은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라 신을 앙망(仰望)하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사유였다. 그것은 음표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무너져내릴 듯한 거대한 건조물이었다. 중세의 황혼이 찾아오면서 그 거대한 건조물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명론의 등장, 페스트, ‘죽음의 무도’, 십자군 전쟁 같은 징후들과 더불어 그 완벽했던 구조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단단한 것들이 결국에는 녹아서 무너져내린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출처 :Into the Real World 원문보기 글쓴이 : Nocturn